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04화 (704/1,329)

9화. 분명 좋은 일이다. (1)

김지훈이 바싹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내년 2월 아니면 3월경에 일 년 일정으로 연수를 간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다.

“연수를 가신다고요?”

“그래. 혈관이식과 재건 분야가 너무 많이 부족하단다. 어찌됐든 그렇게 되면 혈관 파트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 너희 둘밖에 없잖아. 많이 다그칠 거다. 원래 이 말도 연말에나 하자는 걸 미리 말해 주는 건 열심히 배우라는 의미야. 특히 신현수 니가 열심히 해야 한다.”

혈관파트를 맡아야 한다니 폭탄 발언이다.

신현수가 입술을 모았다.

전체적으로 김지훈보다 수술 경험이 부족하지만 혈관 파트는 특히 비교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혁민 교수도 그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예. 선생님. 저도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혁민 선생님은 대놓고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시고 현수는 순순히 인정을 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드디어 나를 인정하시는 건가?’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우쭐한 기분을 감추느라 표정 관리에 애를 먹었다. 티냈다가는 신현수를 자극하는 것은 물론 이혁민 교수에게 조근조근 탈 게 빤했다.

“알고 있다니 됐다. 김지훈, 그렇다고 방심하지 마라. 신 교수가 없는 동안 누군가는 명색이라도 혈관 파트 주임 교수를 맡아야 한다. 누가 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혈관 파트 주임 교수까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흘렀다.

미묘한 미소를 머금던 이혁민 교수의 눈길이 김지훈에게 향했다. 분명히 신현수에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다.”

또 뭐가 있을까?

과도한 흥분에 이혁민 교수의 말을 듣지 못한 김지훈이 상상의 나래에 빠져 들었다.

세부 전공을 떠나 일 년이 아니라 단 한 달이라고 해도 대단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욕심이 불끈불끈 치밀었다. 강렬한 자극과 함께 잠복해 있던 라이벌 의식이 화르륵 불꽃을 일으켰다. 느슨했던 눈빛까지 꽉꽉 조여졌다.

‘주임 교수!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나눠서 한다고 해도 일 년이면 도대체 혈관 수술을 몇 건이나 하는 거야?’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상상의 나래가 엉뚱한 곳까지 펼쳐졌다. 임시라도 좋으니 주임 교수가 돼 신현수를 보며 거만하게 말하고 싶었다.

- 신현수 선생, 내가 바빠서 다음 수술 맡아줘야겠어. 문제 안 되게 신경 바짝 써. 저번에 보니까 그런 식으로 마무리하면 곤란해. -

생각만으로도 붕 떴다.

신현수도 상당한 기대와 욕심을 보이고 있었다.

손일석이 이 사실을 안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기대와 흥분도 잠시.

연수가 갖는 여러 의미가 다가왔다.

혈관 수술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기동 교수다. 그런 실력을 가진 의사가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기 위해 연수를 간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몸소 알려주고 있었다.

‘평생 배우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겠지?’

시기도 절묘했다.

연수가 끝나면 손일석이 제대한다.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죽어날 것이다.

동시에 상당한 부담감이 다가왔다.

‘혈관 파트를 맡기실 정도로 우리를 믿고 계신다는 말이지만 책임은 그 이상 커지겠지. 남은 기간 한눈팔지 말고 정말 열심히 배워야 해.’

주임 교수란 말이 아니더라도 엄청난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각오를 다지는 순간 이혁민 교수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김지훈, 니 무슨 생각하나? 내 말 안 들리나?”

실수를 깨달은 김지훈이 급히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이혁민 교수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질책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김지훈, 구미 일반외과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알지? 과장 교체가 잦다보니까 조금만 큰 수술이면 대구로 나가 웬만한 수술은 하기도 힘들잖아.”

“예. 그런 점은 알고 있습니다.”

“최철한 선생이 오는 김에 새롭게 정비하려고 한다. 전반적인 수술을 비롯해서 라파로까지 해야 되지 않겠나? 김지훈 선생 생각은 어때?”

난데없이 김지훈 선생이다.

내용과는 달리 슬슬 감이 안 좋아졌다.

“저도 반드시 해야 할 수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근데 라파로를 경험도 없이 비디오만 보고 할 수는 없잖아. 혼자서는 쉽지 않은 일이야. 누군가 함께 하면서 가르쳐주면 좋지 않을까 싶다. 최철한 선생 실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메이저 수술한 지가 벌써 몇 년 전이다. 함께 해야 할 수술이 많다.”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이혁민 교수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김지훈도 이준영 교수가 아니었으면 복강경을 배우느라 지금까지 허우적거렸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당분간 최철한 선생님과 함께 수술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저야 상관없지만 다른 병원에 근무 중이신데 시간이 되시나요?”

최철한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을 둘 곳조차 찾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전공의 시절 가르치기만 했던 김지훈에게 이제는 배워야 한다는 것 때문일까?

이어진 말에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맞다. 다만 그게 서울이 아니라 구미다.”

“예? 구미요? 그럼 구미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갑자기 멍해진다.

“영영 가라는 말은 아니다. 한 이삼 개월이면 되지 않겠나? 아직 확실하게 결정된 사안은 아니지만 이사장님과도 어느 정도 얘기가 됐다. 김지훈 선생만 동의하면 중앙 의료원에서 정식으로 파견 결정을 내릴 거다.”

재단 이사장과도 상의 중이다?

신현수도 처음 듣는 말인 듯 눈만 껌벅거렸다.

당황스러웠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근무처는 엄연히 서울 병원이고 펠로우는 두 명이나 더 있다. 복강경 수술이 예외적이긴 하지만 최철한의 실력이나 펠로우들의 능력이 딸리는 것도 아니었다.

“선생님, 구미 병원과 최철한 선생님 사정은 알겠는데 제가 삼 개월 내내 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번갈아 가는 방법은 없을까요?”

“니보다 수술 많이 하고 라파로 잘하는 사람이 있나? 현수는 혈관 더 배워야 하고 경석이도 대장 수술에 바짝 신경 써야 할 때야. 일복까지 있으니까 구미에서도 수술 많이 할 거다. 좋은 일 아니가?”

‘어후! 일복이 그렇게 해석되나요?’

말발이 된다고 해도 이혁민 교수는 과장이다.

함부로 반론을 펼칠 수 없는 노릇이다.

분위기상 이미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훈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면 날카로운 손톱 맛을 심하게 봐야 할 것이다. 그 전에 고경아의 의견을 반드시 들어야 했다.

“선생님, 와이프하고 상의는 해야······.”

“가기 싢나?”

“그 말이 아니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3개월인데 최소한 동의는 얻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혁민 교수가 숨도 쉬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걱정 마라. 지금 수술 방 간호사들도 회의 중일 거야. 구미 간호사들에게 라파로부터 메이저 수술까지 확실하게 가르쳐 주려면 고 간호사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어?”

“함께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둘 다 동의하면.”

첩첩산중에 점입가경이다.

몸만 간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당장 머물 곳도·······.”

“니들 애 없잖아. 관사 넓다. 이사 비용은 물론이고 파견 수당까지 추가로 준다. 그동안 많이 바빴는데 최철한 선생이 있으니까 시간 나면 마음 푹 놓고 놀러 다녀라.”

일복 찾다 이번에는 시간 나면이라니!

정말 무서운 말이다.

고경아가 동의한다고 쳐도 문제는 또 있었다.

“선생님, 그런데 우리 파트 상황이······.”

계속 말이 잘렸다.

“이준영 선생님과 이미 다 상의했다. 몸은 조금 힘드시겠지만 우리 생활이 원래 그렇고 니보다 더 확실하게 통제하시겠지. 불만은 단 한 마디도 터트리지 못할 거다. 그리고 신현수나 이경석도 라파로를 배워야 하지 않겠나?”

하윤호 교수 문제까지 막히기는커녕 뜸도 들이지 않았다. 펠로들 교육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고민하고 준비한 일이 아니었다. 하긴 꼼꼼한 이혁민 교수가 허투루 일을 진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문득 음성 생각이 났지만 이번은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쫓겨나는 것도 아니고 최철한 선생님이 자리 잡을 때까지 함께 일하라는 말씀인데 어떻게 하지? 경아 씨는 뭐라고 할까? 못 간다고 할 수도 없잖아.’

은근히 고민스러운 문제였다.

그때 최철한이 눈빛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김지훈 선생, 사실 내가 과장님께 먼저 말씀드렸어. 김지훈 선생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고 내 욕심이라는 것도 잘 알아. 염치없지만 부탁할게. 다른 문제가 없다면 날 도와줬으면 해. 현재로서는 라파로는 물론이고 메이저 수술도 자신을 갖기 힘들어. 미안하다.”

유석재가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나도 정식 근무 전에 라파로를 배웠으면 좋겠어. 시간만 맞으면 휴가를 내서라도 갈 각오가 돼 있으니까 정말 미안하지만 부탁해.”

지훈이라고 부르며 욕마저도 어색하지 않았던 선배들이다. 그런 선배가 선생이라고 부르며 정중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먼저 교수가 된 후배를 확실하게 대우했다.

고맙고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래도 선배들 처지나 구미 병원의 사정과 특성만이 선택의 기준은 아니었다. 최소한 고경아와 먼저 상의해야 할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들 말씀도 있으시고 병원에서 파견을 가라면 가야 하지만 와이프하고 먼저 상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혁민 교수가 갑자기 껄껄 웃었다.

“니 애처가구나. 당연한 일이다. 다만 구미는 음성이 아니다. 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일부러 돈까지 줘가며 널 초빙하는 거야. 최철한 선생이 라파로에 익숙해지면 예정보다 일찍 올라와도 된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다음 주 초까지 결정해서 알려줘.”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말 그대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한 파견이다. 그 이유도 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병원에 매여 있는 의사에게 통보가 아니라 상의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어쨌든 시간이 늦었다.

회진을 돌아야 하고 최철한과 유석재도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쉬운 인사를 하며 또 한 번 부탁을 했다.

“김지훈 선생, 미안하다. 부탁할 게.”

유석재가 특유의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당장 확답할 상황이 아니기에 살짝 미소만 보이고는 병동으로 올라갔다.

신현수가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실력을 인정하지 못하면 보낼 수가 없잖아. 김지훈, 너 정말······.’

이래저래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 라이벌로 살아야 하는 모양이다.

어찌됐든 김지훈에게는 다소 갑갑하고 복잡한 일이었다. 임시 주임 교수는 먼 일이고 구미는 발등의 불이었다. 가부간의 결정을 빨리 내려야 했다.

‘좋은 일 같은데 왜 이렇게 심난하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차트를 펼치던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회진을 마친 이준영 교수가 마치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옆에 섰다.

‘파견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동의하긴 했지만 이참에 과 운영이 어떤 것인지도 알면 좋겠다고? 빨라도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이 과장이 고민 없이 말할 사람도 아니고. 어쨌든 지훈이 네게는 좋은 기회이자 귀중한 경험이 될 거야.’

“이 과장 만났지? 나쁜 일 아니다.”

미리 상의했다니 충분히 고민했을 이준영 교수였다. 그 점은 감사한 일이었지만 사실상 홀로 간담도 파트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보통 힘겨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선생님, 혼자 수술하시려면 힘들지 않으시겠습니까?”

“괜찮아. 현수하고 경석이도 가르쳐야 했는데 이참에 잘됐어. 경아도 긍정적이다.”

언제 고경아의 생각까지 알았을까?

하윤호 교수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하윤호 교수가 어떤 행동을 할지 걱정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윤호! 이 과장이 지나가듯 말했지만 지훈이를 보내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분명해. 눈에 걸리면 그냥 지나가질 못하겠지. 이 과장 말대로 3개월 정도 안 보고 사는 것이 네게는 더 유리할 것 같다. 갔다 오면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리돼 있을 거야.’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슬쩍 움직였다.

어림도 없다는 의미가 확실했다.

‘하긴 하윤호가 스승님께 덤빌 수가 없지.’

뭔가 팍팍 돌아가고 있었다.

파견이든 초빙이든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다.

거미줄 한가운데 딱 달라붙은 형국이었다.

‘스승님까지 이러시면 못 간다는 말을 할 수가 없네.’

콧등을 찡그리던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신현수와 이경석도 있는데 굳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는 믿음과 신뢰이자 인정일 것이다. 더구나 선배들을 가르친다니 돌려 생각하면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그날 저녁 고경아와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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