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분명히 좋은 일이다. (2)
아무 제한 없이 쉽게 자를 수 있다면 그 또한 다른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하성원 원장이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김지훈을 마음대로 자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고개를 흔들며 수술 방을 나가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누구도 합병증을 피하지 못한다. 특히 담낭농증 환자처럼 염증이 심한 경우에는 김지훈도 똑같은 문제를 만들 수 있었다.
‘나도 아차하면 이런 일 만들 수 있겠지. 자만하지 말자. 미니콜레든 라파로든 시간 단축하겠다는 욕심도 버려야겠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수술을 빨리 끝낼 수 있어야 진정한 실력이지.’
간 출혈로 오인했던 정승옥 환자까지 생각났다. 수술 중에는 물론 수술 후에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일이었다. 그동안 결과적으로 좋은 일만 있었는데 오늘 일로 심난해 할 필요는 없었다.
자업자득!
정말 믿고 싶은 말이다.
하윤호 교수는 대가를 치르고 말 것이다.
퇴근하던 김지훈이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었다.
어깨까지 으쓱거렸다.
‘스승님이 내 의견을 심각하게 물어보셨다 이거지? 으하하! 경아 씨한테 자랑해야겠다.’
정신연령이 급격하게 저하됐다. 별 다섯 개에 ‘참 잘했어요.’란 선생님의 글을 보고 활짝 웃는 어린아이다. 이준영 교수 앞에서는 여전히 집도식도 치르지 못한 전공의 1년차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혁민 교수가 갑작스러운 수술 때문에 퇴근을 못한 이준영 교수와 함께 자리했다. 상황을 전해 듣고는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큰 문제입니다. 지금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는데 이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윤호도 문제지만 하성원 원장을 이해할 수가 없어. 가족일수록 더욱 철저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인간을 교수로 추천할 수 있지?”
“그러게 말입니다. 조카라는 사실 때문에 더 감싸고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체면부터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 있었어?”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부터 하 교수 실적에 신경 써 달라고 전화를 몇 번 받았는데 대사 부인 수술 이후로 부쩍 횟수가 늘었습니다. 실력을 알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를 수가 없잖아. 그동안 우리 모두 잘못 생각했어. 내년이면 늦어. 하윤호 문제를 확실하게 결론짓고 지금이라도 방법을 찾아야 해. 뭐가 있을까?”
유난히도 말이 길어진 이준영 교수였다.
답답한 마음은 알지만 당장 취할 방법은 없었다.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의아해 하던 이혁민 교수가 흠칫 놀랐다.
하성원 원장이었다.
때도 참 잘 맞췄다.
“지금까지 퇴근도 안 하고 뭐해? 마침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잠깐 들어가도 될까?”
‘이준영이 깝깝하지만 둘 다 있을 때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차라리 잘됐어. 설마 내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는 않겠지.’
잠시 뜸을 들이던 하성원 원장이 입을 열었다.
“바로 말하면 오해 살까 봐 지금 얘기하는데 대사 부인 수술할 때 보니까 하 교수와 김지훈 선생 사이가 너무 심각해 보였어. 과장 입장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 교수는 파트까지 같잖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지훈 선생 자세 말이야. 뛰어나다는 것은 알지만 윗사람을 대우할 줄 알아야지 앞으로도 발전할 수 있지 않겠어? 이 과장, 이 교수, 수술만 하지 말고 그런 면에도 신경 써. 내가 몇 번이나 전화했잖아.”
말이 끝나자마자 이준영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원장이기에 언제라도 제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수련 방식이 도제와 비슷하기 때문에 선후배 관계가 무척 엄격하면서도 중요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사건의 원인이나 본질을 말해야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걸고넘어지면 해결 방법이 없다. 더구나 하성원 원장은 객관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할 중앙 의료원 원장이다.
‘저런 식으로 말하면 누구라도 반발할 수밖에 없는데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심상치 않은 기색에 이혁민 교수가 먼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오늘 일이 없었어도 자리만 마련되면 하윤호 교수 문제를 돌려 말할 이준영 교수가 아니었다. 이혁민 교수도 사실상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일반외과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원장님은 하윤호가 대학 병원 교수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돌려 말하기는커녕 눈치 하나 안 보고 약점을 찔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연수까지 갔다 왔는데 자격이 왜 없어? 그리고 아무리 아랫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자격 운운하면서 이름을 막 부르면 쓰나?”
질문의 핵심을 벗어났다.
회의 때마다 이준영 교수를 보았는데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거의 말이 없는 탓도 있지만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가 더 클 것이다.
“정말 하윤호 실력을 모르십니까?”
단 한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야 가타부타 말할 것 아닌가? 이 과장, 자격에 실력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조카이기에 누구보다도 엄격해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자기 손과 입으로 직접 추천했다.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6개월을 근무한 이상 실력까지 모를 수는 없다.
의도적인 외면 아니면 책임 방기였다.
이혁민 교수는 답답한 소리만 낼뿐 말이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정말 모르시면 하윤호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대사 부인 수술 건까지 생각하시면 바로 답이 나올 겁니다.”
“이 교수, 하 교수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자넨 간담도 파트 주임에 응급 센터까지 맡고 있어. 그 정도 자리에 앉았으면 아랫사람을 먼저 보듬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자격이 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말이라고 다 말인 줄 알아? 그래서 재임용 때 발목이라도 잡겠다는 거야? 뭐야?”
“그럴 생각입니다.”
하성원 원장의 눈가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하윤호 교수를 욕하면 자신을 욕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무례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단도직입적인 말에 말을 잃었다.
“실력만이 승진 조건이 아니야. 위, 아랫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불이익이 커. 그걸 모르진 않겠지?”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이준영 교수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자격 없는 사람이 또 있었군.’
“그런 문제는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목소리는 꼿꼿했고 미동조차 없었다. 자리에 조금도 연연하지 않는 태도에 하성원 원장이 도리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과장, 내 앞에서 이래도 되는 거야?”
이혁민 교수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과장이란 자리가 주는 미묘한 입장 차이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많이 참아왔다.
터질 것이 터진 것뿐이었다.
고름은 터뜨려야 낫는 법이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철저히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하성원 원장이 버럭 화를 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알고 보니 몹쓸 사람이구만.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그렇지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 이 과장, 자네 정말 나한테 할 말 없나?”
할 말이야 많았지만 이준영 교수의 말로 모두 정리됐다. 하성원 원장의 입장을 변호하든지 아니면 일반외과 교수들의 생각을 확실하게 알리든지 둘 중 하나였다.
‘금경태 과장 때 머뭇거리다 도리어 일을 크게 만들었어. 이렇게 된 이상 그런 실수를 또 할 수는 없지.’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일인데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가장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알려진 자신까지 동의한다면 하성원 원장도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다면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최소한 라파로라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분 나빠 하지 마시고 하윤호 교수를 똑바로 보셔야 합니다.”
개망신이다.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성원 원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황이 불리하면 자신의 능력 이상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일수록 더욱 교묘하게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너무 격한 반응이었다. 하윤호 교수가 조카라는 사실과 자신의 행동에 발목이 단단히 잡힌지도 몰랐다.
“당신들 둘만의 생각이야? 아니면 일반외과 교수들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전체 의견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나한테 이래도 된다고 생각해? 실수하는 거야.”
무슨 말을 원하는 것일까?
이혁민 교수마저 할 말을 잃었다.
붉으락푸르락 얼굴만 붉히던 하성원 원장이 와락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시는 볼 일 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부서질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혁민 교수가 답답한 콧소리를 내며 입술을 모았다.
“선생님,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체면 때문이라도 오늘 일과 하윤호 문제를 크게 만들지는 못할 겁니다. 대신 재임용을 막으려면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화부터 내다니 금경태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사람이었네. 생각보다 원장 되기 쉬운가 봐. 이 과장, 간만에 술이나 한잔 할까?”
엉뚱한 대답이다.
갑갑하다고 술 찾는 사람도 아니다.
하성원 원장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의사로서 최악의 상황까지 맞닥뜨렸던 이준영 교수에게는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한 일일지도 몰랐다.
물론 김지훈을 빼고 생각할 때만 말이다.
이혁민 교수가 웃었다.
“그러실까요? 마침 지훈이 일로 드릴 말씀도 있는데 잘됐습니다.”
“지훈이 일?”
무슨 일일까?
이제야 이준영 교수의 눈이 반짝였다.
‘지훈이가 제일 중요하다고 티를 너무 내시네. 혁원이, 그노마 무척 서운하겠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또 웃고 말았다.
웃음 속에 논리로 무장된 비수가 서려 있었다.
다음 날, 김지훈이 재수술 환자를 찾았다.
이미 하윤호 교수가 아침 회진을 돌고 난 후였다. 하지만 직접 재수술을 했기에 반드시 경과 관찰을 해야 했다. 단단하게 유지된 T-tube에서 염증 섞인 담즙이 원활하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환자를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통증과 불편함에서 곧 해방될 것이다.
김지훈이 이것저것 물어보자 아무 사정 모르고 의아해하는 환자와 보호자의 얼굴에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다 미안하네.’
“혁원아, 환자 잘 봐. T-tube 관리 잘해.”
찜찜한 가운에 외래 진료를 마쳤다. 오늘도 신기동 교수에게 신나게 탄 후 늦은 회진을 돌았다.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이번에는 강병옥이 후다닥 달려왔다.
뭔가 섬뜩하다.
‘이 자식들이 왜 이 시간만 되면 저러지?’
“선생님, 과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외래로 내려오시랍니다.”
꽤 늦은 시간인데 무슨 일일까?
신현수와 이경석까지 불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김지훈의 눈이 반가움으로 동그래졌다.
작년에 제대한 최철한과 올해 군의관 3년차인 유석재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휴일이 아닌 평일이다. 최철한은 몰라도 유석재까지 병원에 오다니 약간은 의아한 일이었다.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어? 반갑다.”
얼굴 본 지 2~3년은 됐는데 마치 어제 본 것처럼 무지하게 반가웠다. 일반외과 선택에 가장 큰 동기를 준 선배들이기 때문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손짓을 했다.
“인사는 차차 하고 일단 앉아라.”
최철한과 유석재가 자리에 앉으며 눈가를 굳혔다. 상당히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단순히 인사하러 온 자리 같지가 않았다.
‘펠로우를 새로 뽑는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혹시 병원에 지원을 하신 건가?’
하윤호 자리를 대신한다면 직급이 더 높다고 해도 대환영이었다.
“김지훈, 신현수, 최철한 선생이 곧 구미 병원 과장으로 부임하게 됐다. 유석재 선생은 내년에 제대하고 함께 근무하기로 했다. 병원 규모도 작고 입지까지 불리한데 둘 다 흔쾌히 응해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과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너희 둘이면 구미 일반외과를 확실하게 키울 수 있을 거다. 내 믿음직스럽다.”
김지훈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장 존경했던 선배들이었다.
비록 거리 때문에 얼굴 보기는 힘들겠지만 같은 병원에 근무한다는 것 자체로 큰 힘이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잦은 과장 교체로 여러 문제가 끊이지 않는 구미 병원이었다.
이혁민 교수 말대로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언제부터 근무하시는 건가요?”
살짝 들뜬 목소리에 김지훈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예전하고 똑같네. 고맙다.’
“구미 과장님이 10월 중순에 그만둔다고 하셨어. 나도 지금 근무하는 병원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꽤 빡빡해서 걱정이야.”
“근무 시작하시기 전에 꼭 찾아뵙겠습니다.”
“과장님께 다 들었어. 지금도 수술 때문에 정신없는데 그럴 시간이 있겠어? 마음만이라도 고마워.”
최철한과 유석재가 웃었다.
잠시 그간의 일들이 오고갔다. 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아무 탈 없이 각자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가끔 손일석과 만난다는 유석재의 말이 꽤 반가웠다.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신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경석도 뭔가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과장님, 선생님들과 인사는 의국이나 사석에서 해도 충분한데 저희는 왜 따로 부르신 겁니까?”
생각해 보니 그렇다.
신변잡기에 불과한 말이었다. 소주잔 기울이며 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단순히 인사를 하기 위해 이 시간에 병원을 찾진 않았을 것이다.
역시 예리한 놈이다.
이혁민 교수가 팔짱을 끼며 헛기침을 했다.
무언가 중요한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김지훈, 신현수, 요새 신 교수가 상당히 날카롭지?”
난데없는 말에 당황스러운 물음이었다.
“아닙니다.”
“내 다 안다. 신 교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
귀가 번쩍 뜨였다.
어떤 사정이 있기에 전공의 때가 생각나게 할 정도로 비수를 던졌을까?
그것도 날이 살벌하게 선 비수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