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VIP란. (2)
팔베개를 하고 있던 고경아가 방바닥에 머리를 콩 찧었다. 따뜻한 품에 안겨 넋 놓고 있던 탓에 제법 아팠을 것이다. 눈을 흘기는 모습이 꽤 예뻤지만 김지훈의 신경은 이미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아야! 갑자기 팔을 빼면 어떻게 해요?”
“미안해요. 경아 씨 병원에 갔다 와야겠어요.”
“이 시간에 왜요?”
“최종철 환자 때문에 확인할 게 있어요.”
‘아직도 세척액에서 소화효소가 나온다면 어딘가 열려있는 것 아닌가? 혹시 이리게이션 횟수가 적은 탓일까?’
갑자기 든 불안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옷을 걸쳐 입고 부리나케 병원으로 향했다. 병동에 올라가자 당직 간호사가 급히 일어났다.
“선생님, 웬일이세요.”
“별일 아니에요. 일 봐요.”
곧바로 최종철의 병실로 향했다.
다들 잠들었을 시간이기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강병옥이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세척을 하고 있었다.
최종철과 나직하면서도 친근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말이다. 손길도 여간 세심한 것이 아니었다. 말없이 지켜보는 어머니의 등이 왠지 편안해 보였다.
어느 틈엔가 따라온 간호사가 속삭였다.
“강병옥 선생님이 제일 열심히 하세요.”
조용히 문을 닫은 김지훈이 물었다.
“종수가 아니고요?”
“아침저녁 드레싱이야 변종수 선생님이 하시죠. 틈틈이 이혁원 선생님도 하시지만 강병옥 선생님이 가장 많이 하시는 편이에요.”
“근데 왜 난 몰랐을까?”
“모르셨어요? 가끔 우리도 안 부르고 혼자 이리게이션 할 때도 있어서 그럴 거예요.”
이제야 회진 때 본 보호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최종철은 여전히 힘들어하는데 어머니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신뢰였다. 그런 믿음을 준 의사가 바로 강병옥이었던 것이다. 이혁원도 모를 정도로 티를 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따뜻해졌다.
강병옥이 마침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병옥아, 고맙다. 이번 기회에 의사와 환자가 쌓아야 할 관계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길 바란다. 이제 수술을 줘도 되는 걸까?’
이 시간에 병실로 들어가 아는 척을 해 봐야 공은 전공의가 아닌 교수에게 돌아온다.
무임승차는 금물이다.
김지훈이 편안하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열정을 가진 의사는 항상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뛰어난 실력까지 갖췄기에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똑같이 회진을 돌았다.
최종철을 보며 이것저것 대화는 나누는 사이에도 강병옥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혁원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신중을 기하는 기색이었다.
멋진 놈들이다.
자꾸만 찢어지는 입을 간신히 단속했다.
표정 관리가 안 된 모양이다.
“선생님, 좋은 일 있으세요?”
“소화액이 아직도 검출되는데 좋은 일이 뭐가 있어? 너희들 이리게이션 열심히 하고 있는 거야?”
이혁원의 눈길이 쓰윽 강병옥에게 향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담낭농증 환자는 어때?”
“아직도 새고 있습니다. 걱정돼 죽겠습니다.”
신경 쓰이다 못해 불안까지 다가왔다. 어쨌든 하윤호 교수가 책임지고 볼 환자였다. 자신이 살려면 눈 부릅뜨고 봐야 할 것이다.
“긴장 늦추지 말고 잘 봐. 에이! 내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이 자식들이 열심히 해줘야 하는데. 쯧!”
시치미 뚝 떼며 외래로 향하는 순간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아침부터 누가 전화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장인어른이었다.
(김 서방, 나야.)
(아버님, 웬일이십니까?)
(의료봉사 가서 본 할머니 한 분 있지? 검사 결과 다 나왔는데 담도암이야. 자네가 제일 먼저 봤으니까 끝까지 책임져. 다음 주 목요일 오후에 진료 예약돼 있을 거야. 비용 생각하지 말고 바로 입원시켜서 최대한 빨리 수술해.)
담도암이라니 황달 때문에 걱정했는데 불행히도 예감이 맞았다. 암이라면 누구나 서두르기 마련인데 일주일 후로 예약했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벌써 예약까지 다하셨다고요? 가급적 빨리 수술해야 하는데 왜 다음 주로 하셨어요?)
(난들 그러고 싶었겠어? 담도암 수술하면 오후 늦게 끝나잖아. 2주 후까지 수술 예약이 잡혀 있는데 진료만 빨리하면 뭐해? 다른 환자 수술 미루고 중간에 끼워줄 거야?)
이제야 적절한 날이 없다는 생각이 났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다녔다. 홍보 덕인지 몰라도 외래 진료와 정규 수술 예약이 밀려든 지도 꽤 됐다.
말려 죽이기 프로젝트도 한몫했을 것이다.
월, 수, 금 사흘이나 수술하는데 하루에 서너 건 이상은 기본이었다. 응급수술과 혈관 수술까지 더하면 정말 적지 않았다. 어떤 질환을 가진 환자든 급하지 않은 사람은 없기에 수술 스케줄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좀··· 죄송합니다.)
(내가 자네하고 수술했을 때 딱 알아봤어. 장인이 부탁한다고 빨리 해 줄 사람이 아니지. 황달까지 발생했지만 다행히 1기니까 일이 주 만에 영향 받진 않을 거야. 수술 잘해서 건강하게 퇴원시켜.)
(예. 알겠습니다.)
(어렵지 않은 수술이니까 이 교수에게 부탁하지 말고 자네가 직접 해. 그렇게 알고 끊는다. 치매 조심해.)
꼬장꼬장한 성격답게 툭 전화를 끊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일반외과 전문의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담도암 1기? 휘플인데 어떻게 안 어렵지?’
Whipple's operation.
췌장암이나 담도암에서 시행하는 일반외과 최고의 난이도를 가진 수술이다. 집도는 단 한 차례도 없었고 이준영 교수가 수술할 때 퍼스트 서 본 경험이 다였다.
생각만으로도 등짝이 서늘해졌다.
마침 회진을 마친 신현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곁에 선 나종진과 송진우까지 꽤 궁금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버님께서 담도암 환자를 보내셨어. 진료 예약까지 잡아 놓으셨네. 진우야, 너 황달 있었던 할머니 기억나지?”
“예. 기억납니다.”
“그 할머니가 담도암이란다.”
담도암이나 췌장암은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있는 질환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잊거나 사소하다고 빼먹는 내용이 있기 마련이다.
수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단단히 준비해야 할 질환이었다.
시간이 넉넉하다고 방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예정된 진료를 마치고 즉시 연구실로 향했다.
차근차근 점검해야 할 사항을 확인하고 수술 방법이 기술된 책을 펼쳤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렵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는 어떤 수술이든 스스로 결정하고 할 수 있어야 해. 스승님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는데 겁부터 먹을 일이 아니야. 환자는 확실히 오겠지?’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문득 최종철을 떠올리며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스럽게 느꼈다. 휘플에서 가장 처리하기 힘든 췌장 부분을 최근에 수술했다는 것은 큰 자산이었다.
벨기에 대사 부인까지 수술한 덕일까?
지금도 바빠 죽겠는데 외래 진료는 물론 정규 수술 문의가 점점 더 늘었다. 수술하는 날마다 저녁 늦도록 수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환자의 회복과 피곤 때문에라도 질환의 경중과 급한 정도를 따져 수술 예약을 조절해야 했다.
“선생님, 조금 더 빨리 수술할 방법은 없습니까?”
‘스승님 스케줄도 난리가 아니고 정말 다른 방법이 없네. 하윤호가 제 몫만 해줬으면 얼마나 좋아.’
“죄송합니다. 복강경 수술은 이준영 교수님과 저만 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더 이상 시간을 앞당길 수가 없습니다.”
외래 진료 표에 이름이 빤히 적혀 있었지만 하윤호의 ‘하’자도 꺼내지 않았다. 환자도 별말 없이 아쉬운 기색만 보이며 수긍했다.
‘이런 날이 다 오네. 이대로 쭉 갈 수 있을까? 혹시 이번 주까지만 반짝 오는 거 아냐? 담도암 환자 수술은 언제 어떻게 하지?’
좋으면서도 은근히 불안했다.
오지도 않은 환자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지금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이 무사히 회복되는 것이 먼저였다.
강병옥은 오늘도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최종철의 몸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드레인을 통해 세척한 물에서 소화액이 거의 검출되지 않았다.
수술 후 7일째 되는 날 김지훈이 이혁원과 단 둘이 앉아 조용히 최종철에 대해 상의했다.
회진을 돈 후 강병옥에게 한마디 했다.
“병옥아, 최종철 환자 오늘부터 물 시작하자. 깜빡하고 말을 안 했네. 네가 가서 직접 얘기하고 주의할 점 잘 설명해.”
“제가요?”
“나 수술 들어가야 돼. 혁원아, 가자.”
강병옥이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김지훈이 어떤 환자보다도 신경을 썼던 환자가 바로 최종철이었다. 더구나 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회복을 알리는 첫 단계였다. 의사만이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에게도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깜빡 잊을 수 있는 사안이 절대 아니었다.
‘후우! 날 진짜 믿어주시는 건가?’
최종철을 찾은 강병옥의 얼굴이 상기됐다.
“어머니, 종철이 물 마셔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종철아, 고생했다. 우리 때문에 잠도 못 자고 힘들었지?”
“정말이에요?”
“선생님, 우리 아들 정말 확실하게 좋아진 건가요?”
그동안 아들 앞에서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강병옥의 손을 잡았다.
가슴 뭉클함에 강병옥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최종철과 어머니의 믿음이 전해졌다.
이제야 김지훈의 말이 가슴속에서 진정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백 마디 말보다 보호자의 손에서 전해진 온기와 뜨거운 눈물 뒤에 가려진 눈빛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강병옥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술실에 들어서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기분 좋다. 요샌 하윤호도 잠잠하고 박승준 선생님도 환자와 수술에만 열중하시는 것 같아 정말 좋다.’
이런 날은 수술도 잘되고 시간도 후딱 지나간다.
어느새 이틀이 뚝딱 지나갔다.
정승옥 환자가 퇴원을 했다.
“김 교수님,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휴가 때 와주신 일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덕분에 잘 치료받고 퇴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장과 간 절제라는 큰 수술을 받은 환자치고 혈색이 상당히 좋았다. 항암 치료도 별 탈 없이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힘닿는 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정승옥 환자가 명함을 건네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특실 입원에 전직 차관이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여느 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왠지 고맙고 뿌듯했다.
‘VIP란 소리를 들을 만한 분이네.’
보호자가 조심스럽게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감사의 뜻입니다. 처음 아버님을 진찰하러 오셨을 때 너무 젊으셔서 사실 당황했었습니다. 제가 실례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마음에 걸리시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소한 일이었다.
하얀 봉투보다 더 반갑고 기쁜 말이었다.
“아닙니다. 가끔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감사하지만 이건 사양하겠습니다.”
“아버님과 제 마음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허어! 김 교수님,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환자까지 가세했다. 한사코 봉투를 집어주는 보호자와 실랑이를 벌이던 김지훈이 결국 지고 말았다.
“그럼 저 대신 우리 전공의 선생들에게 직접 주십시오. 보셔서 아시겠지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합니다. 그렇게 알고 미리 감사드리겠습니다.”
봉투를 던지다시피 침대 맡에 놓은 김지훈이 급히 병실을 나갔다. 정승옥 환자가 웃었다.
“하윤호하고는 많이 다르지?”
“예, 아버님.”
“김 교수 같은 의사가 많았으면 좋겠어. 신동철 이사장님 말고 이 병원 이사로 누가 있더라. 치료 잘 받았다고 인사라도 하면 도움이 되겠지?”
한동안 나직한 대화가 오고갔다.
다음 날, 이혁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선생님, 저희랑 같이 고기라도······.”
“사준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달라는 거야?”
“아니요. 이번에는 저희가 사겠습니다.”
“네가 산다고? 벼룩 간을 빼먹으라고 그래. 이 자식이 나를 아주 후안무치한 놈으로 만들려고 하네.”
“그게 아니라, 어제 정승옥 환자가 퇴원하면서······.”
“됐어. 힘없어서 일 못하겠다는 소리하지 말고 돈 있으면 너희들이나 많이 먹어. 그게 얼마나 된다고.”
이혁원이 정색을 하며 봉투를 꺼내려 했다.
“선생님, 액수가 작지 않습니다.”
“니들 수준에서나 그렇지. 종철이는 어때?”
환자는 돈과 비교할 수 없다.
이혁원이 입을 딱 다물었다.
‘자식이 그래도 내 생각을 하네.’
김지훈이 흐뭇한 마음을 안고 최종철을 찾았다.
“최종철, 미음 한 그릇 다 먹었다며? 배 안 아파?”
“괜찮은데요. 더 먹을 수 있어요.”
두려움과 고통에 시달리던 18살 청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지금도 배고파?”
“예. 배고파요. 과일도 먹고 싶고 주스도 먹고 싶어요.”
식욕이 있다는 것은 완연한 회복세에 접어들었다는 의미였다. 아주 좋은 조짐이었지만 절대 방심하지 말아야 할 환자가 바로 최종철이었다.
“욕심내지 말고 강병옥 선생이 하라는 대로 해. 강병옥 선생, 드레인은 어때? 식사 계속 진행해도 되겠어?”
“오늘 아침에 두 차례 시행했고 소화효소 검사 다시 나간 상태입니다. 검출 안 된다면 오늘내일 지켜보고 죽으로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김지훈이 강병옥에게 최종철의 치료를 전적으로 맡기고 있었다. 이혁원도 이때만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강병옥은 누구보다도 환자를 잘 알았고 지금도 가장 큰 열정을 보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