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평생 두려워해야 하는 장기. (1)
총치프를 새로 뽑아야 할 때가 왔다.
교수들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3년차 총치프로 누가 좋겠나? 내가 볼 때는 이혁원과 나종진, 둘 중의 한 명이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기탄없이 얘기해 봐라.”
용호상박이다.
도저히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었다.
실력이나 품성은 비슷하고 성격만 다소 다를 뿐이었다.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는 이혁원과 조용하면서 보다 논리적인 나종진 중 누가 돼도 의국을 잘 이끌어 갈 것이다.
은근히 미묘한 문제였다.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아이고! 결정할 수가 없네.’
“다들 곤란한 모양이구나.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자. 전보다 인원이 부족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을 수 있어. 이럴 때는 조용한 놈보다는 치고 나가는 놈이 더 적당하다. 할 말은 할 줄 아는 놈이 좋아. 올해는 혁원이 시키고 내년에 종진이 시키자. 3년차 총치프나 4년차 총치프나 다 중요하고 그놈들 되게 친하잖아. 좋다. 좋아.”
역시 송재덕 교수다.
가볍게 들리는 말 속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두 사람은 예외였다. 특히 하윤호 교수의 입장에서는 나종진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할 말 할 줄 아는 놈? 고분고분한 놈이 돼야 내가 편해. 이혁원 그 자식은 김지훈과 비슷한 놈이라 수틀리면 바로 덤비고도 남을 놈이야.’
“선생님 말씀도 맞지만 그럴수록 매사에 원만한 나종진이 적격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근무한지 이제 6개월밖에 안 됐고 만에 하나 의국까지 시끄러워지면 일하기 껄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교수라고 해도 총치프 의견을 무시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시끄러워지면 껄끄럽다니?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물론 누구든 당연히 자신의 의견을 밝혀야 하는 사안이다. 문제는 하윤호 교수의 의견을 듣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겠지만 지동훈 교수의 말이었다면 모두들 신중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사방에서 가자미눈을 떴다.
‘시펄! 이젠 말도 하지 말라는 거야? 그런다고 내가 고이 입 다물고 있을 것 같아? 6개월만 참으면 돼.’
내년에 하성원 원장의 힘을 빌려 조교수만 되면 이런 수모도 끝이었다. 스스로 나가지 않는 한 정말 자르기 힘든 신분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가급적이면 편하게 말이다.
하윤호 교수가 시선을 돌렸다.
박승준 교수가 슬쩍 교수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보탰다.
‘지금은 전공의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내게 문제될 일은 없겠지만 말 잘 듣는 놈이 해야 한쪽이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지.’
“저도 하 교수 말에 동의합니다. 그동안 제 앞가림 하느라 바빠 전공의들과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습니다. 이혁원도 자격이 충분하지만 나종진이라면 말이 더 잘 통할 것 같습니다. 가급적이면 우리 입장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면이 있구나. 그래. 나종진이라.”
권위를 내세우는 송재덕 교수가 아니었지만 찜찜한 표정으로 하윤호 교수를 노려보았다. 능력을 떠나 후배에게 책임까지 떠넘기려는 사람의 말이기에 김지훈은 더욱 그런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종진이도 줏대가 있지만 혁원이보다 마음이 여려서 자칫하면 하윤호에게 휘둘릴 수도 있어. 하윤호, 당신이 있는 동안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을 거야. 제길! 병옥이와 있었던 일을 과장님께 정식으로 말씀 드렸어야 했는데 왜 미뤘지?’
휴가에 이어 대사 부인 수술까지 벌어져 적절한 때를 놓쳤다. 문제가 될 만한 소지는 무조건 막아야 했다.
나종진에게 미안했지만 총치프는 의국을 이끌어야 한다. 외적인 요인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송재덕 교수의 판단이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윤호 아니더라도 혁원이가 이번에 하고 4년차 총치프는 종진이가 하면 딱 좋을 것 같다.’
신현수, 이경석과 눈을 마주친 김지훈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관적인 판단만은 아니었다.
“전 이혁원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부족할수록 총치프를 중심으로 단단하게 뭉쳐야 합니다. 종진이 성격을 볼 때 4년차 총치프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윤호 교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자식이 이젠 사사건건 발목을 잡을 작정인가? 원장님 말씀까지 무시하는 놈이니까 난 안중에도 없겠지. 당분간은 웃어주지만 결정적일 때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박승준 교수도 기분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 김지훈 선생 말도 맞고 박 교수 말도 일리가 있네. 알았다. 송재덕 선생님, 의견이 엇갈리니까 제가 과장으로서 결정하겠습니다.”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이런 일에 있어서는 과장이 원장보다 세다. 세. 많이 세다.”
이혁민 교수가 교수들과 차례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무척 고민스러운 표정이었다. 교수들의 의견이 엇갈려서가 아니라 이혁원과 나종진, 둘 다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자격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과장 눈에는 또 다른 면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이혁민 교수가 결정을 내렸다.
조근조근한 목소리다.
그러나 단호했다.
“3년차 총치프는 이혁원으로 결정했다. 4년차 총치프는 큰 변동이 없는 한 나종진이 하는 게 좋겠다. 박 교수나 하 교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올해만 근무하는 게 아니잖아. 김지훈, 신현수, 너희들이 직접 알려주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말해라. 파트 조정은 할 필요 없다.”
“예. 알겠습니다.”
과장의 결정이다.
갑론을박을 벌일 일도 아니었다.
모든 교수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뻥끗거리던 하윤호 교수가 인상만 팍팍 썼다.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
‘이거 완전히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 아니야? 몇 년씩 얼굴 본 당신들에겐 누가 해도 상관없잖아? 제길! 지동훈 저 자식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
누가 되든 문제 될 일이 아니었지만 하윤호 교수에겐 결코 유리한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완전히 등을 돌린 이상 전공의 특히 이제 치프인 3년차들의 손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이대로 지나가야 합니까? 총치프 결정이야 과장님 권한이라지만 우리 입장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러다 찬 밥 정도가 아니라 아예 떨거지 되겠습니다.”
박승준 교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사소한 문제조차 실타래처럼 꼬여 가고 있었다. 펠로우들과 대화를 나누며 병동으로 향하는 지동훈 교수의 뒷모습에 입이 쓰기만 했다.
회의실에서 나오며 하는 말을 분명하게 들었다.
생각마저 달랐다.
“김지훈 선생, 내가 생각해도 과장님 결정이 맞는 것 같아. 의국 분위기가 부드러워야 전체 분위기가 좋아지는 법이긴 한데 치프에겐 강단도 필요하잖아.”
자신의 뜻과는 정반대의 의견이었다.
‘후우! 좋지 않아. 내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걸까? 김지훈은 왜 교수들에게 하윤호와 있었던 일을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는 거지? 섣불리 편들었다가는 도매금으로 같이 넘어갈 수도 있어. 이쯤에서 하윤호를 정리하는 게 더 유리할까?’
고민은 하윤호 교수만이 아니었다.
복강경을 이용한 조기 위암과 대사 부인 수술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경석도 다시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무섭게 치고나오는 펠로우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
잠깐 고민에 빠졌지만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생각이 싹 바뀌었다. 교수들이 자신을 불신하는 이상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미래는 물거품에 불과할 것이란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예전에 말한 모임은 어떻게 됐어?”
“원장님께서 별말씀 안 하십니다. 어쨌든 제 상황이 좋아져야 원장님도 신경 써 주시지 않겠습니까? 김지훈, 저 자식이 원장님 오더까지 무시하는 바람에 아랫놈 관리 하나 못한다고 단단히 혼났습니다.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모르겠습니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듯 갑갑했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지동훈 교수마저 김지훈과 하윤호 교수가 충돌한 이후 전과 달라졌다. 하윤호 교수를 옹호하는 것 같은 자신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의료계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유력 인사들과 친분이 생긴다면 입지가 달라질까?
박승준 교수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다.
눈앞에 이미 그들과 친분을 가졌다고 말하는 하윤호가 어떤 상황인지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자신은 다르다는 생각이 때론 심각한 판단 실수를 유발할 수도 있다.
회진을 마친 김지훈과 신현수가 이혁원과 나종진을 만났다. 이경석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3년차 총치프를요?”
다소 당황스러워 하는 이혁원과 내색은 못하지만 착잡하면서도 실망스러운 나종진의 얼굴에서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총치프를 두고 은근한 신경전을 벌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상당히 심각했다. 돌이켜 보면 누가 먼저 했는지는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일이 아니었다. 이경석만 보아도 단박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도리어 건강하게 유지해온 라이벌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훈이 지그시 이혁원을 보았다.
‘혁원이가 어느새 총치프가 됐네.’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가슴이 벅찼다. 개인적인 아픔을 딛고 훌륭하게 성장했다. 스승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었기에 더욱 고마웠다. 아마 지금쯤 스승 역시 뿌듯한 가슴을 달래고 있을지 몰랐다.
“이혁원, 총치프는 단순히 전공의를 대표하는 자리가 아니야. 신경 써야 할 사람까지 있는 상황이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일 못하면 중간에 잘라 버릴 거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단한 목소리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혁원 못지않게 아껴온 후배가 눈앞에 있다.
“종진아, 실망스러워?”
“아닙니다. 저보다 혁원이가 총치프로서 해야 할 일을 훨씬 더 잘할 겁니다.”
얼굴이 좋았다.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종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종진아,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다. 혁원이와 함께 교수님들 실망하시지 않도록 열심히 해.”
“예.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혁원아, 축하한다.”
복잡한 눈빛 속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솔직히 미안하다. 종진이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알지?’
‘걱정 마, 인마. 네가 욕먹으면 내가 먹는 것과 똑같아.’
건강한 라이벌이 또 있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일어났다.
함께 일어서던 신현수가 나종진을 보았다.
“나종진, 4년차 때는 네가 총치프야. 혁원이하고 힘 합쳐서 의국 잘 이끌어.”
둘 다 깜짝 놀랐다.
“예? 벌써 결정된 겁니까?”
“반쯤. 올해 제대로 못하면 너희 둘 다 내년에는 총치프 꿈도 꾸지 마. 믿어도 되지?”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동시에 대답했다.
즐거움이 가득 넘쳐났다.
생각이 얕지 않기에 교수들과 펠로우들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고민스러운 문제였지만 도리어 쉽게 결정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럴 때는 놀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묵직했다.
“혁원아. 4년차 총치프가 진정한 총치프다. 분발해라. 이러다 종진이한테 완전히 밀린다.”
이경석이 한 방 더 날렸다.
“총치프 하는 놈들은 다른 점이 있어야겠지? 내 눈에 하나라도 걸리면 죽을 줄 알아. 나 알고 보면 정말 무섭다.”
가장 마음 편하게 대해주는 이경석의 말이기에 더욱 살벌하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형, 예전으로 돌아가면 절대 안 됩니다. 혁원이하고 종진이가 죽는 꼴을 볼 수는 없어요.”
‘헉’ 소리를 뒤로했다.
“옛날 생각나네. 현수야, 그때도 좋았어. 그치?”
“난 힘들었다. 먼저 총치프 한 놈이나 신났겠지.”
냉랭한 목소리였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난 서울 총치프는 하지도 못했어. 이 자식들아.”
이경석도 옛날 생각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신현수의 어깨를 한 대 툭 치고 의국에서 나온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송진우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강병옥이 후다닥 달려와 회진 준비를 했다.
“변종수, 뭐해? 김지훈 선생님 나오셨어.”
점점 확연하게 변하고 있는 강병옥의 모습에 가슴이 넉넉해졌다. 사실 그보다 더욱 가슴을 푸근하게 하는 일은 송진우와 예전 관계를 회복했다는 사실이었다.
또 하나의 건강한 라이벌이 될까?
‘이렇게 하나하나 발전해 가는 거겠지? 이제는 수술을 줘도 될 것 같네. 아니야. 자만한 놈이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하는지 조금 더 느끼게 하는 것이 좋겠어. 강병옥, 서운해 하지 마.’
회진을 돌았다.
특실 환자나 일반 병실 환자나 똑같았다.
아프면 찡그리고 퇴원을 앞두면 웃었다.
문득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지 않는 벨기에 대사와 부인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전직 차관인 정승옥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바로 자칭 타칭 VIP 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일지도 몰랐다.
이래저래 즐거운 하루였다.
간만에 카르페 디엠을 외쳤다.
오후 회진을 딱 마칠 때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