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진짜 VIP가 있긴 있다. Ⅱ (2)
수술 결정에 필요한 요소는 위계질서가 아니다.
“위계질서? 그건 당신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신현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만 내쉬었다.
“심각하네. 어떻게 아버님 눈까지 피했지? 지훈아, 신경 쓰지 말고 일단 할 일부터 하자. 수술 팀 어떻게 짤 거야?”
김지훈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씨익 웃었다.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후련하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특히 신현수의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교수 둘이 들어가야 할 정도로 어려운 수술이냐고? 자존심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구나.’
누구와 함께 수술할 지는 고민할 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복강경 소리를 듣자마자 수술 팀은 이미 다 짰다.
“신현수, 이혁원. 종진이는 백업(back up).”
“나도 들어가?”
“환자가 진짜 VIP 아니냐. 우리 펠로우니까 둘 정도는 들어가 주는 게 예의 아닐까?”
“너도 VIP 따져?”
“자식이! 벨기에를 대표하는 대사 부인이잖아. 환자 차별하지 말라고 하지만 문제 생기면 병원 망신을 떠나 나라 망신이야. 당연히 VIP지.”
“하긴 대사 부인이 VIP가 아니면 누가 VIP겠어.”
“펠로우가 수술한다고 다른 병원 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환자도 급하니까 빨리 설명하고 결정 기다리자.”
집도의가 펠로우라는 사실은 분명 약점이었다.
신현수도 그 점을 무시하지 못했다.
“나도 그게 걱정이야. 나가 보자.”
당직실 문을 열던 김지훈이 무엇인가 빠뜨린 것처럼 홱 뒤돌아섰다. 상당히 심각한 얼굴이었다. 지그시 신현수를 노려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은근히 자존심 상한다.
“신현수, 담낭 절제 어려워, 인마. 조기 위암 하나 했다고 까불지 마. 나니까 쉽게 하는 거야.”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담낭 절제할 때는 땀 안 흘리잖아?”
한 대씩 적절하게 주고받았다.
응급실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정장을 한 대사관 직원, 외교부 직원, 병원 직원에 정훈철까지 환자 아닌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나직한 말소리와 어디론가 급히 전화하는 모습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환자가 누구든 간에 다를 바는 없다.
먼저 신현수와 함께 환자를 정식으로 진찰했다. 꼼꼼한 질문과 신중한 손길에 환자와 벨기에 대사의 불안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담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평소 무증상이었다가 이틀 전에 갑자기 증상이 발생했단 말이지? 그렇다면 돌의 위치가······.’
김지훈이 수술 중 유의할 점을 생각하며 신현수와 함께 수술 팀 구성을 설명했다.
가장 큰 난관은 역시 김지훈과 신현수가 펠로우라는 사실일 것이다. 만일 간담도 전공 의사들이 모두 알아주는 이준영 교수에게 수술 받을 생각이었다면 한바탕 난리 친 것으로 끝날 상황이었다.
약간은 초조하면서도 기대 섞인 표정으로 벨기에 대사의 결정을 기다렸다.
“Operator, Dr. 김지훈.”
김지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First assistant, Dr 신현수. second, Dr. 이혁원. OK?”
가장 마음에 걸리면서도 중요한 수술 팀 설명은 간단한 단어와 이름으로 충분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10년을 넘게 배운 그 놈의 문법에 맞춰 말을 하려니 입이 열릴 턱이 없었다.
어쨌든 관건은 대화가 아니다.
벨기에 대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솔직하게 펠로우임을 밝히자 약간은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가를 찡그렸다.
“현수야, 빼먹은 게 있다.”
“설명 안 한 사항이 있어?”
“환자가 보통 비만한 게 아니야. 수술과 마취의 위험성, 수술 후 합병증까지 한 번 더 자세하게 설명해. 너무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것처럼 들렸어.”
“솔직히 일반적으로 설명하긴 했는데 우리가 펠로우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표정 변한 거 안 보여? 수술 안 받을 수도 있어.”
“그래도 원칙은 지켜야지.”
신현수도 욕심을 부린 모양이었다.
약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설명했다. 유리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벨기에 대사의 표정이 묘해졌다. 듣고 싶은 사항을 다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OK.”
예상외로 답이 바로 나왔다. 그리고는 한동안 빠르게 입을 열었다. 가끔 김지훈이라는 이름이 섞였다. 대화를 끝낸 신현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리어 자세하게 설명하니까 바로 동의하네. 네 말대로 하길 잘했다. 증상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미리 여기저기 알아 본 모양이야. 널 믿고 맡긴단다.”
“날 믿고?”
“벨기에까지 네 소문이 난 모양이야.”
“무슨 소리야?”
“라파로 많이 하는 병원으로 알고 있는데다 이준영 선생님과 널 담당 전문의로 알고 있더라.”
“홍보 덕을 본 건가?”
실력에 행운까지 따르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신현수의 눈가에 부러움이 살짝 묻어났다.
이로써 최종 결정이 났다.
고개를 숙여 벨기에 대사에게 감사를 표하자 마주 고개를 숙였다. 초조한 얼굴을 보니 어디나 가족 사랑은 똑같은 모양이었다.
머나먼 타국의 의사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고마웠다. 도리어 외교부 직원들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집도의가 펠로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은근히 입이 썼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하성원 원장이 다가왔다. 하윤호 교수가 바짝 붙어있었다.
두 사람 표정이 돌변했다.
감히 자신의 말을 거역했다는 듯.
똥 씹은 듯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무언의 압력이었다.
김지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실력과 자질은 없어도 하윤호에게 기회를 줘라?
죄도 죄 나름인 것처럼 실력도 실력 나름이다.
이것이야말로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김지훈 선생, 신현수 선생하고 들어간다고? 이왕 그렇게 된 거 전공의보다는 우리 하 교수도 함께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 대우한다는 느낌도 줄 수 있잖아.”
표정과는 달리 점잖은 말투였다.
하윤호 교수에게 말하듯 거칠게 반발하면 좋을 일이 없다는 것쯤은 김지훈도 잘 알고 있다. 쓸데없는 충돌은 불필요한 힘만 낭비하게 할 것이다.
“원장님, 교수 세 명씩이나 들어갈 수술이 아닙니다. 신현수 선생도 혹시 통역이 필요할지 몰라 함께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번 수술은 집도의와 가장 자주 손을 맞춘 의사들과 팀을 짜야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문제라도 생기면 병원 이미지만 실추될 겁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무척 정중한 말투였지만 확실한 거절이다.
‘이놈 봐라?’
“그동안 하 교수하고 수술 많이 했잖아? 전에 한 말도 있는데 같은 파트 의사끼리 왜 그래?”
슬슬 화가 난다는 얼굴이었다.
한 번 밀리면 계속 밀린다. 하성원 원장이라고 해도 일반외과 문제, 특히 수술 문제는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 이 점은 확실하게 말해야 했다.
김지훈이 눈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원장님. 집도는 제가 합니다. 수술 팀 구성도 당연히 제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신현수 선생과 6년을 같이 배우고 수술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완강한 거절이었다.
하성원 원장이 눈가를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감히 내 말을 정면으로 거절해? 이 자식 머릿속에 뭐가 들은 거야? 전임되면 가관이겠군.’
“그래서 기어이 둘이 들어가겠다는 거야?”
“집도의는 수술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합니다. 따라서 수술 팀 구성은 절대적 권한입니다. 저 대신 누가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하윤호 교수님, 책임질 수 있습니까?”
김지훈이 하성원 원장의 눈길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지위와 권위로 밀어붙일 상황이 아니었다. 하윤호 교수도 책임이라는 말에 움츠러든 기색이 역력했다.
‘펠로우 앞에서 뭐하는 거야? 꼬라지하고는. 이 자식 집안만 아니었으면 속 썩을 일도 없겠구만. 쯧!’
하성원 원장이 헛기침을 했다.
더 이상 말을 해봤자 체면만 구길 일이었다. 조카 챙기려다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까지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지나쳤다간 머리 꼭대기에 올라설 놈이야.’
“그래? 정히 그렇다면 알아서 해야지. 단, 자신의 말과 행동을 확실하게 책임져야 할 거야.”
눈초리가 사나웠다. 수술에 대한 책임만 의미하는 말이 아니었다. 은근한 압박을 넘어 협박으로 들릴 정도였지만 김지훈은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하윤호에게 꼭 해줘야 할 말입니다.’
말이 길어지면 헛소리를 또 들어야 한다.
김지훈이 힐끗 하윤호 교수를 보며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수술 준비 때문에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신현수 선생, 혹시 모르니까 응급실 상황 마무리하고 올라와. 이혁원 선생, 나종진 선생, 가자.”
뒤돌아서는 순간 두 인간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오로지 수술에만 집중해야 할 때였다. 과도한 긴장은 물론 숱하게 한 수술이라고 방심하면 사고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대사 부인이라 그런지 상당히 부담되네. 정말 VIP라고 불러야 하는 환자가 있긴 있었네.’
당직 전공의들이 비상대기했다. 강병옥을 비롯해 송진우까지 수술실에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정훈철의 입은 점점 더 크게 찢어졌다.
‘이거 극본 없는 영화 한 편 찍겠어.’
하윤호 교수와의 일을 알았으면 어떤 생각까지 했을까?
일요일 밤 수술 방 주변이 온갖 사람들로 가득했다.
수술 시작 직전이다.
서서히 잠에 빠지는 환자를 보던 이혁원이 슬쩍 복부를 만져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비만이 너무 심한데요? 확실히 우리나라 사람하고는 차원이 다르네요.”
“왜? 기구가 짧을 것 같아?”
“느낌상 그렇습니다.”
김지훈이 기구 하나를 잡으며 말했다.
“혁원아, 이거 미국에서 수입한 거다. 웬만해서는 문제가 안 되니까 그 사람들도 사용하지 않겠어? 현수야, 어때?”
“집도의에 따라 다르겠지.”
사실 김지훈도 내심 고도 복부 비만에 걱정이 되긴 했다. 하지만 서양 사람이라고 배 속 구조가 다른 것도 아니고 말마따나 미국에서 사용 중인 기구다.
그보다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이 있었다.
김지훈이 참관을 들어온 강병옥을 보았다.
“병옥아, 왜 이틀 만에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염증이 빠르게 진행됐을까? 수술 중 특별히 유념해야 할 부분이 어디일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민스러울 것이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에 마취가 끝났다.
반드시 필요한 말 이외에는 금지다.
강병옥이 눈가를 좁힌 채 고민에 빠졌다.
이내 수술 준비가 모두 끝났다.
“마취과 시작하겠습니다.”
“예. 시작하십시오.”
김지훈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대사 부인이라고 해도 지금은 환자 중 한 명일뿐인데 은근히 긴장되네. 평소 하던 대로 긴장하지 말고 차근차근 침착하게 하자.’
절개창 사이로 에어 팁을 찔러 넣었다.
불안할 정도로 깊게 찌르고서야 복막이 뚫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보기보다 비만이 훨씬 심하네.’
처컥! 처컥!
상당히 두터운 복부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뱃살이 더 두껍다고 해서 어려울 일은 없어.’
카메라와 첫 번째 기구를 넣는 순간 생각이 싹 바뀌었다. 배 속 구조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지만 노란 지방덩어리가 대장과 소장 및 장간막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크게 달라붙어 있었다.
담낭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복부 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장 비만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저절로 강병옥에게 눈길이 갔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강병옥과 송진우가 재빨리 복부 CT를 걸었다.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런 것 역시 실력 중 하나일 것이다.
지방 음영은 어둡게 나타난다. 복부 CT 각 단면의 상당 부분이 까맣게 보일 정도로 지방 양이 많았다. 수술 시야는 물론 난이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요인인데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에 무심코 지나친 것이다.
신현수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 김지훈을 보았다.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수술할까?
‘원칙대로 시야 확보하고 나머지는 내 손을 믿자.’
“마취과, 환자 머리 쪽 최대한 올려주세요.”
위이이잉!
침대가 기울어지며 내부 장기들이 조금은 아래쪽으로 밀려 내려갔다. 김지훈이 담낭 주변을 가리고 있는 대장과 지방덩어리를 밀어냈다.
마취를 해도 사라지지 않는 연동운동을 따라 소장과 대장이 스르륵 다시 제자리를 찾아왔다. 벌겋게 부어오른 담낭 일부분이 살짝 보이다 사라졌다.
더 이상 시야를 확보할 방법은 없었다.
눈빛을 굳힌 김지훈이 잠시 수술 과정을 그린 후 기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안 좋은 상황에 신현수가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이 정도면 미국 의사들도 힘들어 할 정돈데 괜찮을까?’
조심스럽게 간을 싸고 있는 단단한 막을 잡았다.
“혁원아, 위쪽으로 최대한 밀어. 현수야, 조작에 방해되지 않는 수준에서 최대한 가까이 비쳐 줘.”
간을 밀어 올리고 카메라를 바짝 담낭에 접근시켰지만 시야가 나아졌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김지훈이 담낭 끝부분을 잡았다.
염증으로 약해지고 지방층까지 두터운 담낭 벽을 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에 붙은 지방덩어리가 스르륵 밀려와 수술 부위를 가렸다. 지방은 쉽게 찢어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대장을 밀어내며 계속 진행했다.
조작할 수 있는 기구는 두 개였고 할 일은 늘었다. 또한 비만이 심할수록 출혈이 잘 발생한다. 예상 이상의 어려움에 은근한 긴장감이 다가왔다.
담낭 벽 박리부터 아슬아슬했다.
점처럼 보이는 출혈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김지훈은 침착했다.
계속해서 시야를 가리는 지방덩어리를 밀어내며 능숙하게 전기 소작기를 조작했다. 많은 경험에 펠로우답지 않은 노련함마저 엿보였다.
“보비!”
하얀 연기와 함께 지방이 녹았다.
빨간 피가 보였다.
통상적으로 한 번 더 지지면 지혈에 문제가 없다.
보비를 가져갔다.
연기가 다시 피어오르는 순간 피가 확 퍼졌다.
지방 속에 숨은 가느다란 혈관이 터진 것이다.
보비로 지혈될 출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