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94화 (694/1,329)

4화. 진짜 VIP가 있긴 있다. Ⅱ (1)

Laparoscopic operation.

(복강경 수술)

하윤호 교수는 환자를 가리키며 미니콜레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대화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갑갑해 보였다.

서양 사람 특유의 손짓까지 하며 대화를 나누었지만 짧은 영어로 들어도 자꾸 말이 꼬이는 것 같았다.

‘라파로로 해달라는 말은 확실하고 집도의와 수술 팀을 물어보는 것 같네. 스승님이 계신데 왜 자꾸 미니콜레를 말하고 있어? 저 인간 자기 실력은 생각도 안 하고 엉뚱한 수술 욕심을 내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좋은 기회라고 여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국빈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나라 대사 부인이 환자다. 그 점을 차치해도 최소 정확한 의사소통이 반드시 필요했다. 환자와 보호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했다.

하윤호 교수는 지금도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결코 믿을 수 없었다. 영어에 능통하고, 질환을 잘 알고 있으며, 환자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신현수에게 연락했다.

얼마 후 신현수를 비롯해 행정 직원들까지 도착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얼굴 벌게진 송진우와 함께 정훈철까지 보였다.

입이 쭉 찢어져 있었다.

“김지훈 선생, 벨기에 대사 부인이 환자로 왔다며? 누가 수술해? 이거 아주 제대로 그려진다.”

복강경으로 수술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었다.

집도할 의사는 이준영 교수와 자신밖에 없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윤호 교수의 수술만은 막아야 했기에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하윤호 교수라고 있는데 당직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상황 봐서 이준영 선생님께 연락하는 게 최선으로 보이네요. 신현수 선생이 왔으니까 잘 해결될 겁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누가 있는지를 더 따지기 마련이다. 예상대로 하윤호 교수는 신현수를 무시하지 못했다.

신현수가 대사관 관계자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일사천리다.

손짓 발짓도 없이 유창한 영어가 오고갔다.

이제야 김지훈을 본 하윤호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자식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가뜩이나 환자도 없는데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반드시 내가 수술해야 돼. 이 정도 VIP라면 일반 환자 수십 명 수술하는 것보다 나아. 하필이면 라파로를 원하는 건 또 뭐야? 어떻게 해야 하지?’

신현수도 모자라 난데없이 방송국 카메라까지 도는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뭔가 잔머리를 굴리는 것 같았다.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열심히 눈알을 돌리고 있었다.

은근슬쩍 전화기를 꺼냈다.

낮은 목소리로 한참을 통화했다.

그사이 의사소통이 확실하게 끝났다.

신현수가 하윤호 교수를 부르며 김지훈에게도 손짓했다.

“하윤호 교수님, 선생님도 들으셨겠지만 라파로로 수술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대사 부인이라는 위치 때문에 집도의와 수술 팀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누구인지는 물론 마취과 의사와 간호사까지도 확실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다니?’

하윤호 교수의 눈가가 심하게 찌그러졌다.

나라 이름도 누구나 아는 벨기에다.

VVIP라는 말로도 부족한 대사 부인을 수술한 의사!

입소문만 잘 타면 명예가 거저 굴러들어 올 기회였다. 덩달아 실질적 이득도 상당할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방송국 카메라까지 돌고 있는 판이었다.

이런 수술을 놓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대사관 측 태도였다. 갖가지 핑계를 대며 미니콜레를 권해도 강력하게 복강경 수술을 요구하며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윤호 교수 입장에서 보면 이유가 더 가관이었다.

좋다고 덥석 물은 홍보 탓이었다.

1,000예가 넘는 복강경 시행 경력에 혹하지 않을 환자는 없었다.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의 경험 차이를 아는지 모르지만 어떤 치료를 받을 지 충분히 알아보고 왔다는 말이었다.

‘씨펄! 지금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데 김지훈 이 자식이 하게 되면 거들먹거리면서 날 완전히 깔고 뭉개겠지? 그건 반드시 막아야 돼.’

최선이 아니라면 차악도 좋았다.

어차피 이준영 교수는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 큰 명성과 명예를 얻는다고 해도 자신에게 별 다른 영향을 끼칠 일도 없었다.

“상당히 중요한 환자 분이야. 라파로로 해야 한다면 경험이 가장 많은 이준영 선생님께 부탁하는 것이 좋겠어.”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모로 생각해도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옆에 서있던 이혁원이 갑자기 손을 저었다.

당황한 목소리였다.

“일이 있으셔서 부산에 내려가셨습니다. 지금쯤 출발하셨을 겁니다. 주말이라 언제 도착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하윤호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의사들이 바글바글한 대학 병원에서 다른 병원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완전히 외통수였다.

김지훈이 수술하게 되면 가뜩이나 펄펄 나는 놈에게 날개까지 달아주는 꼴이었다. 반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시도했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득과는 비교도 안 될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핵심적인 문제는 복강경으로 할 자신도 실력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구석에 몰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정말 되는 일이 없네. 이럴 수는 없어. 가뜩이나 환자도 없는데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야.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주치의라도 내가 맡아야 돼. 방법이? 방법이 없을까?’

하윤호 교수가 대답은 안 하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굴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왠지 초조해 보였다. 그 때 응급실 문이 열리며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

하성원 원장이었다.

상황이 잠깐 미뤄졌다.

벨기에 대사 및 대사관 사람들과 인사를 한 하성원 원장이 하윤호 교수와 나직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곧 김지훈과 신현수를 모두 불렀다.

“신현수 선생, 혹시 이준영 교수 연락 됐나? 하 교수가 당직이긴 하지만 대사 부인인데 그 정도 레벨은 돼야 하는 거 아냐?”

일부러 모른 척을 하는 건지 하윤호 교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산에 내려가셨답니다.”

“하필이면 이럴 때 부재중이야. 어쩔 수 없네. 오늘 하 교수 당직 맞지? 수술 팀은 짰어?”

“아직 못 짰습니다.”

“지금까지 뭐했어? 정말 중요한 환자니까 각별히 신경 써야 돼. 다행히 김지훈 선생까지 있어서 정말 잘 됐네. 최선을 다해 수술해. 병원 명예가 걸린 일이야.”

슬쩍 신현수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 신현수 선생도 라파로 할 줄 알잖아? 조기 위암까지 라파로로 했는데 다 같이 들어가면 되겠다. 셋이 함께 하면 실패할 수가 없잖아. 수술 잘되면 이사장님도 아주 좋아하실 거야.”

‘늦게 오는 줄 알고 가슴 졸였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에 딱 오셨네. 됐어. 설마 원장님 말을 거부할 수는 없겠지.’

하윤호 교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하성원 원장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대사관 직원들과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행여나 다른 병원으로 갈지 모른다는 초조함만이 엿보였다.

김지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윤호의 머릿속이 보이는 것 같았다.

‘중앙 의료원 원장님이라고 해도 수술 팀 구성까지 관여하는 건 아닌데 하윤호와 함께 하라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말 아무 것도 모르시는 걸까? 모를 리가 없어.’

전화기를 꺼내는 모습을 보았다.

이미 입을 맞췄을 가능성도 높았다.

어쨌든 수술은 해야 한다.

아직 동의도 받지 못했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환자 및 보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수술 팀 구성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어야 했다.

원칙적으로 결정권자는 당직 교수다.

신현수가 하윤호 교수를 보았다.

‘라파로를 하윤호 교수가? 말도 안 돼. 당직 교수라고 해도 지금은 예외적인 상황이야. 양해를 구하면 말만 길어질 테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 낫겠어.’

“교수님, 이번 수술은 반드시 라파로로 해야 하기 때문에 수술 팀 구성은 김지훈 선생이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윤호 교수가 화들짝 놀랐다.

잔머리 하나는 끝내주니 신현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원장님 말씀이 있었는데도 날 배제하려는 거야? 아무리 이사장님 아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 자식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사람이 바글거리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김지훈의 성격을 생각할 때 말 한 마디 삐끗했다가는 얼굴 붉히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신현수가 재단 이사장 아들이라는 점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자··· 잠깐, 신현수 선생, 김지훈 선생, 당직실에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말도 섞기 싫었지만 오늘 당직은 하윤호 교수다.

아무리 싫어도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는 당직 교수와 해결해야 한다.

그것 또한 원칙이다.

“앞장서시죠.”

당직실로 들어갔다.

“신현수 선생, 오늘 당직 교수는 나야. 내가 수술 결정하고 팀을 짜는 것이 원칙이야. 그걸 왜 김지훈 선생한테 물어봐? 아닌 말로 신현수 선생이 이사장님 아들이라고 해도 수술 팀만큼은 관여할 일이 아니잖아.”

그사이 머리를 굴렸는지 제법 목소리가 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소 특별한 대우를 바라지 않았던 신현수였다.

이사장까지 언급하자 도리어 입을 열지 못했다.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라파로는 할 줄 모르고 다른 수술도 개판인 사람이 욕심을 내? VIP라 이거지?’

의사와 환자의 입장만이 아니라 병원까지 고려해야 할 상황이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하윤호 교수에게는 도저히 수술을 맡길 수 없었다.

모든 의료진이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라파로로 하실 수 있습니까?”

“무슨 소리야? 아까 다 같이 들어가라는 원장님 말씀 못 들었어? 우리 셋이면 충분히 할 수 있잖아. 환자가 대사 부인이니까 주치의는 내가 맡고 집도의는 집도한 사람 이름을 정확하게 올리면 되지 않겠어?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야 할 때야.”

자기 딴에는 일종의 양보까지 포함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환하게 보였다.

‘책임은 나누고 대사 부인을 수술했다는 소리는 듣고 싶다? VIP라면 사족을 못 쓰네. 그렇게는 안 되지. 당신 목줄 연장 시켜주고 싶은 생각 없어.’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리는 순간 김지훈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확실하게 못을 박아야 한다.

“방금 전에 신현수 선생도 수술 팀 구성에는 관여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 잘했습니다. 원장님에게는 더더욱 권한이 없습니다. 집도의와 주치의를 구분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당직이니까 집도를 하든지 아니면 아예 관여를 하지 말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요. 집도를 하겠다면 난 안 들어갑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전에 한 말 다 잊었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집도의가 확실하게 책임지면 됩니다. 라파로로 대사 부인을 수술할 수 있겠어요?”

“원장님 오더를 어기겠다는 거야?”

“권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책임 질 수 있습니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라파로로 대사 부인을 확실하게 책임지고 수술할 수 있겠습니까?”

하윤호 교수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신현수를 보았다. 재단 이사장 아들인데 설마 하성원 원장의 말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란 기대가 보였다.

“나 역시 원칙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김지훈 선생과 같은 생각입니다.”

“조기 위암도 라파로로 했는데 우리 둘이 하면······.”

“선생님, 간담도 파트 아닌가요? 난 할 줄도 모르지만 담낭 절제가 교수 둘이 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수술이었습니까? 가장 많이 하는 수술입니다.”

특유의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일말의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완전히 구석에 몰렸다.

하윤호 교수가 손만 부들부들 떨었다.

김지훈이 삭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당직 아니니까 빨리 결정해요. 쓸데없이 수술 적응도 되지 않는 미니콜레란 말은 꺼내지도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환자와 보호자는 정확한 정보를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김지훈, 너 정말 이럴 거야?”

“욕심도 능력이 있어야 부릴 수 있는 법입니다.”

치명적인 약점을 면전에서 까발렸다.

말문이 콱 막혔는지 입도 뻥끗거리지 못했다.

자질, 품성, 인성을 떠나 실력 자체가 없으니 어떤 방법도 통할 수가 없었다.

‘이··· 이 새끼들 두고 봐. 내가 이대로 너희들에게 놀아날 줄 알아?’

“너희들 마음대로 해. 감히 원장님 말까지 무시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김지훈 너도 좋을 일 없어. 의사들에게도 위계질서가 있는 법이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하윤호 교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당직실을 나갔다. 빠드득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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