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93화 (693/1,329)

3화. 진짜 VIP가 있긴 있다. (2)

이혁원과 나종진도 강병옥 앞에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말하고 있었다. 하윤호 교수 때문에 걱정되면서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병동에 있을 거니까 감당 못할 사태가 생기거나 만일 책임 문제를 거론하면 간호사 통해서 바로 연락해.”

“감사합니다.”

힘 팍 들어간 목소리에 한숨이 나왔다.

교수라는 사람이 신뢰를 얻기는커녕 불안과 불신만 유발하고 있었다. 손일석의 말처럼 건수 하나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제발 당신을 위해서라도 환자와 수술에 관련된 사고는 치지 마. 그건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이야.’

담낭농증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수술이다. 예전 방식으로 절개창을 크게 열어도 실력이 안 되면 수습하기 힘든 사고가 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수술 방법을 택할지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문득 하윤호 교수가 욕심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니콜레 방식으로 하거나 무리하게 담낭 절제를 시도하면 튜브만 박고 끝내자고 말해. 억지로 떼다가는 정말 문제 생길 수도 있어. 에휴! 자기 손을 알면 그 정도는 판단하겠지.”

답답한 마음으로 응급실을 나왔다.

드르륵!

간이침대 바퀴 소리가 들렸다.

담낭농증 환자가 수술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사히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병동으로 올라간 김지훈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답답함과 불안을 잊었는지 차트를 보며 계속 웃었다. 회진을 돌면서도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강병옥의 글씨로 가득한 차트와 정성이 보이는 드레싱까지 이보다 흡족한 적은 없었다.

“선생님, 강병옥 선생님이 정말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환자 분들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다들 깜짝깜짝 놀랐다니까요?”

“드레싱도 다 병옥이가 했나요?”

“다는 아니지만 변종수 선생님이 선생님 파트는 할 일이 아예 없다고 할 정도에요.”

간호사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면 확실하게 변했다는 말이었다. 자만이라는 놈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를 다진 모양이었다.

짐작이 맞기를 간절히 바랐다.

모든 환자들의 회복도 순조로웠다.

이 역시 누군가의 정성이 큰 몫 했을 것이다.

“휴가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때는 제 몸이 좋지 못해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요. 고맙습니다.”

정승옥 환자의 정중한 말투와 태도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많이 회복됐는지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드레인도 깨끗했고 코 줄은 이미 뺀 상태였다.

“아닙니다. 잘 회복되셔서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코 줄이 없으니까 한결 편하시죠?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다들 신경 너무 써 줘서 감사할 뿐입니다. 특히 이혁원 선생과 강병옥 선생인가요? 며칠 전 배가 아프다고 했더니 새벽에 직접 달려와 진찰까지 하시는데 무척 고마웠습니다.”

VIP 환자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날 이후부터지? 하윤호 때문에 좋은 일도 일어나네. 써드를 서고 있겠지만 마음이 달라졌으면 수술에 임하는 태도도 달라졌겠지?’

하윤호 교수가 집도한다는 불안감 때문에라도 수술실로 가보기는 해야 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강병옥의 변화를 보고 싶었다.

수술 방으로 내려가기 전 문득 월요일 수술 스케줄이 궁금해졌다. 담낭농증 환자 때문인지 하윤호 교수 수술이 잡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근히 걱정됐다.

‘설마 정규 수술까지 잡힌 건 아니겠지?’

스케줄을 보는 순간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내가 본 환자도 아닌데 어떻게 내 앞으로 수술을 예약하셨지? 이게 몇 건이야?’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네 건이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역시 스승의 공력은 따라갈 수가 없다.

환자 차트를 왜 못 보았을까?

후다닥 스테이션으로 달려가 입원 여부를 확인했다.

당직 간호사 앞에 신환 차트 네 개가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내일 수술 준비를 위해 따로 빼 놓은 탓에 보지 못한 것이다.

상당한 시간 투자를 해야 했다.

“이준영 선생님께 충분히 말씀 들었습니다. 저야 빨리하면 좋죠. 잘 부탁드립니다.”

급한 불은 껐다.

처음 보는 환자의 신뢰에 고마웠고 다행히 네 건 모두 복강경과 미니콜레였다. 내일 수술을 생각하며 조용히 수술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통해 수술을 지켜보았다.

한숨이 절로 터졌다.

‘제거가 아니라 튜브만 끼워 넣고 이차 수술 해야지 실력도 없는 인간이 뭐하는 거야? 혁원이가 아무 말도 못했나?’

나종진보다는 상당히 강단 있는 이혁원이었다. 분명 말했겠지만 전공의의 말에 귀 기울일 하윤호 교수가 아니었다. 핀잔만 들었을 것이다.

선택의 결과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당연히 담낭도 제거하지 못했다.

판단 실수 혹은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벗어나면 사달이 나기 마련이다.

예상대로 난리가 났다.

“나종진, 강병옥, 똑바로 끌어. 이혁원, 석션 안 들어오고 뭐해? 다들 정신 차려.”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하윤호 교수의 얼굴이 시뻘겠다.

“피 나잖아. 뭐해? 그렇다고 석션 들어오면 어떻게 해? 이 자식들이 정말.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수술 중 짜증내기로 유명했던 전종훈은 저리가라였다.

수술 팀 전체가 긴장 아닌 긴장에 사로 잡혀 있었다. 하윤호 교수의 말 때문이 아니라 거친 손이 문제였다. 아차 하는 순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이혁원이 눈 부릅뜨고 손을 놀렸다. 나종진과 강병옥 역시 단 일 초도 수술 부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모습이었다.

‘그래. 써드라고 단순히 리트랙터만 끌면 된다는 생각을 하면 안 돼. 집도의 실력이 형편없어도 최소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도는 배울 수 있을 거야. 실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여기서 켈리를 주면 어떻게 해? 경력을 어디로 딴 거야? 모스키토 줘.”

어시스트를 서던 간호사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너무 한심한 일이었다.

‘저 인간을 어떻게 하지?’

환자를 위해서는 별 탈 없이 수술이 끝나야 한다. 그 점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차라리 사고가 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환자 한 명과 하윤호 교수를 맞바꾼다?

큰일 날 소리다.

‘이런 생각까지 들면 안 되는데.’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불안을 감추지 못하던 마취과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반색을 하며 당장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았다.

하윤호 교수 얼굴에는 철판이 깔려 있다.

수술 방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면 언제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을지 모른다. 도와주는 순간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환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 한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입가에 손을 가져간 김지훈이 손짓 발짓을 해가며 교수 휴게실이 아닌 연구실에 있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윤호 교수와 마주치고 싶은 생각 자체가 없었다.

간호사의 눈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눈가가 뻑뻑해지며 피곤이 몰려왔지만 조각 잠도 청하기 어려웠다. 어느새 1시간이 훌쩍 지났고 수술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4시간이 넘었는데 아직 배도 못 닫았어? 퍼스트를 설 때보다 더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네. 미니콜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수술인데 사고나 안 나면 다행이지.’

결국 1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환자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마취과 간호사가 찾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하는 현실이 우습기만 했다.

이혁원의 눈에 핏발이 솟아 있었다.

나종진과 강병옥도 거의 초주검 상태였다.

단 하나의 수술로 수술 팀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 것이다. 수술 방 간호사는 물론 마취과 당직 전공의와 간호사까지 말이다.

땀에 푹 젖은 채 보호자를 만나는 하윤호 교수의 입만 팔팔했다. 최대한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오늘도 역시 입가에 허연 침을 잔뜩 묻힐 것이다.

“어후! 피곤하다. 이혁원, 교수실에 있을 테니까 환자 완전히 깨면 연락해.”

보기 싫은 사람이 사라졌다.

김지훈이 슬며시 회복실로 들어갔다.

“혁원아, 문제없겠어?”

“삼사일 이상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때문에 퇴근도 못하시고 죄송합니다.”

“그게 왜 너희들 때문이야? 아무튼 수고했어. 너희들 말대로 실력 팍팍 늘겠다. 강병옥, 회진 돌았다. 잘했어. 마음에 쏙 든다.”

이 와중에도 이혁원과 나종진이 웃었다.

강병옥은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마음에 든다는 말을 언제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서글프면서도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꼭 해줄 말이 하나 더 있었다.

“수술 실력도 중요하지만 어떤 수술을 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도 매우 중요해. 환자 상태와 자신의 실력을 모두 종합해야 문제가 안 생길 거야.”

모두들 눈빛을 굳혔다.

‘이번 환자는 담낭 절제가 아니라 튜브만 박고 끝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겠지?’

김지훈이 슬쩍 환자 절개창과 드레인을 확인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크게 열었다. 드레인에서 나오는 삼출물의 색깔과 냄새가 좋지 않았다. 큰 문제없이 수술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새로운 걱정이 다가왔다.

“혁원아, 병옥아, 환자 잘 봐야겠다.”

슬슬 휴가 후유증이 느껴졌다.

눈가에 피곤이 깃든 김지훈이 미소를 보이며 수술 방을 나갔다. 믿을 수 있는 후배들의 존재는 여간 큰 힘이 아니었다. 5시간 동안의 기다림이 마냥 헛되지만은 않은 날이었다.

‘쯧! 당직 때 오는 환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네.’

잠깐 연구실에 올라가 다음 주 스케줄을 점검하며 풀어진 마음을 다잡았다. 스스로 잡았던 또 하나의 목표가 다시 생각났다.

‘라파로든 미니콜레든 한 시간 반 이내에 끝냈으면 좋겠는데 쉽지 않네. 서두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유일한 해결책인 경험은 단시간에 쌓을 수 없다.

펠로우로서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술을 하지만 한계가 명확하게 보였다. 결국 수술 하나하나에 최대한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눈가에 힘을 줬다.

‘내일 수술은 더 열심히!’

가운을 벗고 막 옷을 입으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여기가 끝일 리 없었다.

병원에 오자마자 응급실을 들른 것이 죄라면 죄였다.

(이혁원입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저절로 시계에 눈이 갔다.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무슨 환잔데 나한테 전화를 해?)

(급성 담낭염이 확실한데 증상이 상당히 심합니다.)

한숨이 절로 터졌다.

‘오늘 무슨 날이라도 되나? 지지리 일복 없던 하윤호 당직인데 담낭 쪽 환자가 왜 연속으로 오는 거야? 말려 죽이기 정말 쉽지 않네.’

(미니콜레 한데?)

(그게 아니고요. 선생님 혹시 영어 잘하세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김지훈이 갸웃거렸다.

(노티하다 말고 갑자기 영어는 왜 찾아?)

(환자가 벨기에 대사 부인입니다. 응급으로 수술해야 할 것 같은데 다들 영어가 짧아서 의사 전달이 정확하게 되질 않습니다.)

눈이 동그래질 일이었다.

(대사 부인이 환자로 왔다고? 확실해?)

(예. 확실합니다.)

정말 무슨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윤호 교수의 재수가 하늘을 찌르고 환자의 행운이 바닥에 처박히지 않고서는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순간 걱정과 불안은 물론 깜짝 놀라기까지 했지만 이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영어 걱정을 왜 하지?’

2년이나 미국 연수를 다녀온 사람이 오늘 당직이다.

(영어 회화는 너나 나나 마찬가지잖아. 설마 수술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집에 갔어?)

(계시는데 그게······.)

이혁원이 말꼬리를 흐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칸막이를 쳐 환자는 볼 수 없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얼굴 허연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싼 채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윤호 교수가 누군가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기는 하는데 아무리 봐도 의사소통이 원활한 것 같진 않았다. 무언가 서로 다른 소리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당직이 아닌 이상 김지훈이 대놓고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혹시나 몰라 슬쩍 귀를 기울였지만 주변이 시끄러운데다 대화가 빨라지면 더욱 알아듣기 어려웠다.

보고만 있자니 환자가 일국의 대사 부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몹시 걸렸다. 확실하게 수술할 수 있는 의사라고해도 상당한 부담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윤호 교수가 당직이라는 사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필이면 저 인간 당직 때 오냐. 차라리 다른 병원으로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환자의 신분 때문인지 상당히 신경 쓰였다.

정말 수술이 필요한지부터 알아야 했다.

“혁원아, 일단 검사부터 보자.”

담낭염이 확실했다.

담낭 벽에 상당한 부종이 발생했고 내용물이 지저분하게 보였다. 고열과 오한은 물론 복통이 상당히 심할 것이다. 대사 부인이 이렇게 악화되고서야 병원을 찾았다는 사실이 의아할 지경이었다.

힐끗 칸막이 사이로 환자가 보였다.

문제가 또 하나 보였다.

유럽 사람이라고 다 비대한 것은 아니겠지만 한눈에도 뱃살이 장난 아니었다. 개복하면 거의 100퍼센트 절개창에 감염이 일어날 수준이었다.

‘미니콜레고 뭐고 라파로가 답이야. 그나저나 대사 부인이면 국빈 아닌가? 이런 사람이야말로 VIP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하윤호가 수술을 해? 안 돼. 병원 망신이 아니라 나라 망신이다.’

“종진아, 대사 부인이라는데 혹시 통역하는 사람은 같이 안 왔어? 한국말 조금도 못해?”

“지금 보이는 사람들뿐입니다. 띄엄띄엄 우리말을 하긴 하는데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 단어 하나가 명확하게 귀에 들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