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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692화 (692/1,329)

3화. 진짜 VIP가 있긴 있다. (1)

김지훈의 처남을 떠나 본과 2학년이 병원까지 따라왔다면 길은 하나다.

‘4년차 치프 때 인턴이니까 말 안 들으면 죽음이지. 넌 그냥 우리 과하면 되겠다. 김지훈 선생님 처남이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

여전히 착각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이혁원이 불끈 주먹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고경철, 내년에 보자.”

착각이라지만 어차피 얼굴 보는 것은 마찬가지다. 임상 실습을 돌아야 하는 고경철이 부르르 떨었다. 하필이면 실습생도 인턴과 똑같이 3주를 돈다.

다함께 병실로 향했다.

정훈철의 카메라는 지금도 돌고 있었다.

조용히 문을 열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강병옥이 조심스럽게 드레싱을 하고 있었다.

수술 중 세척한 물이 흘러나와 드레인을 감싼 거즈가 푹 젖을 때가 됐다. 때문에 지금쯤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기척을 느낀 강병옥이 고개를 돌리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냥 가실 선생님이 아니겠지. 환자를 위한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이 이런 걸까?’

“강병옥 선생, 어때?”

“깨끗합니다.”

잠에 빠진 환자를 보며 한동안 보호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미 박승준 교수에게 결과를 들었을 텐데 유난히 질문이 많았다. 강병옥은 묵묵히 옆을 지켰다.

김지훈이 보호자의 마지막 말에 큰 보람을 느꼈다.

보호자의 표정이 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휴가 중인데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버님도 안심하고 수술 받으셨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휴가 끝나고 뵙겠습니다.”

병실을 나오던 김지훈이 강병옥의 어깨를 툭 쳤다.

“더운데 고생해.”

“조심히 가십시오.”

휴가 이후로 말수가 부쩍 줄었다. 열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가 더 마음에 와닿는 법이다. 그 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예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진지함? 아니면 진솔함일까?

비슷한 듯 다른 의미일 것이다.

밤늦게 원주로 돌아갔다.

정훈철이 송진우를 조수석에 태우고 이것저것 물었다.

2년차의 피곤이 하루 이틀에 풀릴 리가 없다. 의료봉사와 정승옥 환자가 가져온 긴장 또한 피곤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송진우가 꾸벅꾸벅 졸자 정훈철이 입맛만 다시며 피식 웃었다. 뒷자리에 앉은 고경철은 이미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전공의와 본과 2학년이라!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어디나 그런 모양이네. 지훈이도 위아래로 인복이 만만치 않아.’

각자 차를 따로 탄 덕에 하윤호 교수에 관한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손일석이 미간을 좁혔다.

“세상 참 웃겨. 어느 모로 봐도 자격이 없는데 연수 경력 하나로 교수 된 거잖아. 빽이 좋긴 좋다. 일단 들이받은 건 아주 잘했어. 마음 약해지지 말고 확실하게 아웃시켜. 설마 교수님들이 보고만 계시겠어?”

“나도 어떻게든 그럴 생각인데 후배들한테 책임 떠넘길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야.”

“힘들어도 그 인간 수술할 때 잘 지켜봐. 내가 교직원 자르는 문제는 잘 모르지만 지금은 정황 증거에 불과해. 원장 빽까지 있는데 이 정도로는 힘들 거야. 그래도 건수 하나 더 잡으면 길이 보일 것 같기도 하네. 근데 왜 너하고만 부딪치는 것 같냐?”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경석은 나이가 엇비슷하고 신현수는 이사장 아들이다. 게다가 같은 파트 교수니 아마 처음부터 가장 만만하게 봤을 것이다.

“건수 하나만 더 있으면 될 것 같다 이거지?”

“느낌상 그래. 하윤호가 사람 잘못 봤어. 김지훈이 웃을 때 잘해야 한다는 걸 알 리가 없겠지. 슬쩍 힌트라도 줄까? 어쨌든 주먹은 절대 쓰지 마라.”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간 문제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긴 하지만 박승준 선생님도 점점 알 수가 없네. 설마 하윤호처럼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 라인을 찾는 것 같더니 그 이후로 별다른 말이 없고, 그렇다고 더 가까워진 것 같지도 않고. 에휴! 머리 아프다.’

“박승준 선생님 인상은 어때?”

“내가 점쟁이냐?”

어느새 원주다.

송진우가 본의 아니게 신세를 졌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송진우 선생, 괜찮아. 횡성이면 같은 동네 사람인데 뭐 어때? 부담 갖지 말고 내일 아침 같이 먹고 봉사 가자.”

고성문의 웃음소리가 터질 때마다 송진우 얼굴은 점점 더 벌게졌다. 고경철이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맥주 한 캔을 내밀었다.

‘내년에 3년차 되시니까 실세 아닌가?’

불타는 고구마에게 잘 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

오늘도 송진우의 어머니가 어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저 대견하다는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아들이 진료하는 모습만 바라보았다.

송진우도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됐다고 말하는 것처럼 진료에 최선을 다했다. 이마에 흐르는 한 방울의 땀은 송진우의 정성이자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었다.

고경철도 본과 2학년답지 않은 집중력을 보였다. 항상 혀를 차며 핀잔을 주던 고성문의 입가에서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이 티를 채 벗지 못한 승희가 안 보일 때마다 한수임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카메라를 돌리던 정훈철도 어느새 승희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형편과 처지가 달라도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의료봉사가 막을 내렸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송진우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억지로 손에 쥐어 준 비닐 봉투가 묵직했다. 고추, 옥수수, 감자에 담긴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교수님, 우리 진우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잘 먹겠습니다.”

송진우 어머니의 얼굴이 빨개졌다.

‘저도 많이 부족하지만 훌륭한 일반외과 의사 만들겠습니다. 진우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진우야, 수고했다. 휴가 잘 보내.”

송진우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마치 전공의 때 김지훈을 보는 이준영 교수의 눈빛 같았다. 함께 있던 손일석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지훈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태평한 걸 보니까 송진우 너도 눈치 없구나.’

“안녕히 가십시오.”

자식을 부탁하며 얼굴 발개진 어머니의 얼굴과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는 송진우의 모습에 은근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송진우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졌다.

눈가에 잔뜩 몰렸던 힘이 더욱 강해졌다.

원주로 돌아와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른한 기운에 몸을 맡기던 김지훈과 손일석이 급히 자세를 잡았다.

“자네들 내일 동해로 넘어간다고 했지? 몇 시에 출발해?”

“새벽에 출발합니다.”

“그래? 그렇구나. 서 검사하고 정 피디까지 모두 같이 가는 거지?”

“예. 아버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눈치를 보니 뭔가 할 말이 있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동시에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대화를 이어나가면 절대 피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확신에 찬 직감이다.

김지훈이 슬며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훈철이 형님 뭐하시나? 아버님, 잠깐 보고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불편하시겠죠?”

“응? 응. 그래.”

손일석도 은근슬쩍 엉덩이를 뗐다.

“커피 탄다더니 뭐하는 거야? 아버님, 경희하고 처형들 뭐하는지 좀 보고 오겠습니다.”

함흥차사다.

한동안 아쉬운 눈빛으로 사위를 기다리던 고성문이 혀를 차며 입맛을 다셨다. 내일 잡아놓은 복강경 수술 두 건이 아른거렸다. 김지훈의 수술을 볼 겸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도 확인할 참이었다.

‘우리 김 교수가 고개를 끄덕일 정도는 돼야 마음 놓고 라파로를 할 텐데 내일까지 붙잡으면 욕심이지. 욕심이야.’

그날 밤 다시는 사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김지훈이 차문을 닫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장인어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는지 지금도 궁금했다. 하지만 휴가다.

“출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마지막 태클을 무사히 피한 알차고 보람찬 이틀이었다.

드디어 진짜 휴가다!

정훈철의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강릉에 위치한 아파트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는 것이 이런 용도로 사용하는 아파트인 모양이었다. 도합 네 가족이 바글거렸지만 이래야 휴가 맛이 나는 법이다. 짐 풀자마자 손일석이 약속 이행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자연산 감성돔!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입은 엄청나게 많다.

양식 광어와 우럭을 섞기로 합의했지만 공평하게 나눠 내는 돈 이외의 추가 부담에 고경아의 눈길이 사나웠다. 그래도 맛있다.

싱싱함과 쫄깃함의 극치다.

적당한 소주와 맥주가 맛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자! 출발이다.

강릉을 기점으로 주문진, 설악산, 고성을 차례로 찍었다. 식사 때마다 무엇을 먹을 지 격론이 벌어졌지만 그 덕에 시장이 반찬이 됐다.

저녁마다 처음처럼 벌어지는 이슬의 향연은 향기로웠다. 고경순의 안타까움이 눈에 걸렸지만 어째 점점 더 맛있어 지는 것 같았다.

즐거움은 여기까지다. 고경순이 먹었을 술까지 모조리 제부들 몫이 됐다. 술자리가 끝나고 나면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별로 먹지도 않았는데 둘 다 왜 이래? 우리 동생들 먹여 살릴 수 있겠어요?”

술기운이 가시질 않았지만 한 가지는 꼭 챙겼다.

(드레인 깨끗하고 회복도 순조롭습니다.)

꼬박꼬박 강병옥이 전화를 받았다.

이래저래 마음 편한 휴가였다.

하루하루가 쏜살처럼 지났다.

늑대는 소환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보는 눈이 많아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맨살이 채 타기도 전에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짧다 참 짧다.

모두를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밀리고 밀리고 또 밀리는 고속도로를 지나 서울에 도착했다. 가장 큰 아쉬움이 남은 손일석이 끝까지 함께 했다. 고경희는 그저 좋아 죽었다.

휴가 마지막 날이다.

점심 식사 후 김지훈이 옷을 갈아입었다.

“일석아, 환자 보러 가니까 늦을지도 몰라. 경희 보고 싶다고 울지 말고 꿋꿋하게 군 생활 열심히 해라.”

“국방부 시계도 똑같이 돌아가니까 김 교수 걱정이나 하셔. 어느 순간에 내가 옆에 모습 보고 깜짝 놀랄 거다.”

언제 보아도 어제 본 것 같은 손일석이었다. 왠지 모를 든든함을 가슴에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 간 절제 환자와 조기 위암 환자가 떠올랐다.

습관적으로 응급실부터 들렸다.

오늘도 의사와 환자들로 북적였다.

뷰 박스에 걸린 필름을 보니 정형외과 환자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혁원, 나종진, 강병옥이 스테이션에 둘러선 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지훈을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오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별일 없었지? 하윤호는 이번 주 수술 몇 건이나 했어?”

이젠 대놓고 이름을 불렀지만 다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준영 선생님이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혁원이 검지만 하나 들었다.

같은 파트 교수 수술이 하나밖에 없었다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 성격 완전히 버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정승옥 환자는 괜찮아?”

“예. 환자들 모두 잘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별일 없다며 왜?”

이혁원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윤호 교수님이 당직인데 담낭농증 환자가 왔습니다. 지금 스케줄 내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솔직히 불안합니다.”

“설마 담낭농증을 혼자 한데?”

“안 그래도 박승준 선생님과 지동훈 선생님께 연락을 했는데 두 분 다 사정이 있어서 못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김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사정이 있길래 박승준 선생님까지 못 나오지? 하윤호가 당직이라는 게 걱정되지도 않나? 에휴! 이준영 선생님에겐 연락할 엄두도 못 냈겠지.’

불에 타 죽고 싶다면 뭔 짓을 못할까?

헛웃음도 잠시, 담낭염도 아니고 담낭농증이라니 걱정이 앞섰다.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지만 지지리도 재수 없는 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들어갈 거야?”

“저희 셋이 모두 들어갈 생각입니다.”

3년차 둘에 2년차 한 명이라.

그래야 3년차 한 명의 능력에 불과했다.

잘 봐주면 3.5년차 정도일까?

아니, 역으로 생각하면 3.5년차나 된다.

어떤 교수도 마음 놓고 수술을 진행할 수 있지만 집도의가 하윤호 교수였기에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수술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자칫하면 하윤호 교수 볼 날만 길어질 것이다.

“침착하게 대처해.”

“만일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요? 이번 주 당직 때 수술 하나 있었는데 고생 많이 했습니다.”

전공의들의 눈길이 김지훈에게 향했다.

절박한 눈빛이었다.

강병옥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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