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짧은 휴가의 끝. (2)
검붉은 피가 살짝 묻어 나왔다.
다발적이지만 묻는 피의 양이 확실히 적었다.
시간으로 두고 다시 확인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시름 놓았다.
등짝을 축축하게 만들었던 긴장이 누그러졌다.
“박승준 선생님, 간은 아닙니다.”
안도의 한숨과 답답한 한숨 소리가 교차했다.
김지훈 입장에서는 다행이었지만 간에서 비롯된 출혈이 아니라는 말일 뿐이었다. 박승준 교수의 결정을 기다리던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출혈 부위를 빠르게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결국 대장 절제 부위라는 말인데 어디에 어떤 문제가 발생한 거지?’
박승준 교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제길! 어디야?’
사뭇 당황하면서도 침착함을 잃지는 않았다. 수많은 경험의 힘이자 외과의가 가져야 할 태도였다. 집도의가 당황하면 또 다른 위험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재수술을 요하는 합병증은 언제 발생할지 모른다.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었다.
“김지훈 선생, 확실히 아니지?”
“예, 간에서 나는 피가 아닙니다. 다른 부위입니다.”
이혁원의 마스크가 불룩해졌다.
출혈 부위가 간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이렇게 편할 줄은 몰랐다. 아직 출혈은 지속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하윤호 교수가 도리어 당황했다.
‘이거 뭐야? 그럼 대장 자른 부위에서 나오는 거야? 씨펄! 운도 좋네. 간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보호자에게는 뭐라고 하지? 진승옥 그 양반 성격이 어땠지?’
배를 열어보기 전에는 당연히 틀릴 수 있고 가능성이 높았기에 문제될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윤호 교수 스스로 한말이 있고 그 속에는 김지훈에 대한 비난까지 섞여 있었다.
시쳇말로 설레발을 쳤다.
도리어 불신을 자초했는지도 몰랐다.
수술이 계속 진행됐다.
대장 절제 부위를 확인하던 박승준 교수가 일순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했다.
벌겋게 물든 장간막 사이로 피가 줄줄 새나오고 있었다. 연결 부 일부분의 색깔까지 살짝 변해 있었다. 혈류를 공급하는 혈관 하나가 손상 받은 것이 분명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닌 부분 손상이거나 매우 가는 혈관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환자 상태가 예상외로 잘 유지됐을 것이다.
“후우!”
답답한 한숨 소리만 들렸다.
펑펑 쏟는 피가 아니라고 해도 지켜볼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모스키토 주세요. 박승준 선생님. 시작하시죠.”
“그래. 시작하자.”
부종으로 퉁퉁 부운 장간막을 열었다. 약해진 조직을 박리하는 박승준 교수의 손은 신중하기만 했다. 이 와중에도 간결함을 절대 잊지 않았다.
출혈 부위가 드러났다.
다행히도 가느다란 혈관에서 피가 새고 있었다.
박승준 교수가 어렵지 않게 혈관을 잡았다.
“타이!”
손상된 혈관을 묶었다.
색이 변한 대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김지훈 선생, 지켜볼 수 있을까?”
완전히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었다.
당장은 불안해 보여도 다른 혈관에서 공급되는 혈류가 충분하다면 손을 대는 것이 불리할 수도 있었다.
확답하기 어려웠다.
박승준 교수의 눈길이 지동훈 교수에게 향했다.
역시 입을 열지 못했다.
상당히 애매모호해 집도의가 결정해야 하는 경우였다.
이대로 닫았다가 대장이 터지면 치명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다시 자르고 연결하는 것 역시 출혈로 인한 부종이 심해 순조로운 회복을 확신하기 어려웠다.
어떤 방법을 취해도 재수술 위험성은 상존했다.
박승준 교수가 심각한 고민에 잠겼다.
‘경험상 위험해도 다시 자르는 것이 제일 안전해. 퍼스트 실력만이 아니라 호흡까지 확실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하필이면 전직 차관인 환자에게 이런 생기다니.’
김지훈의 실력은 엄지를 치켜들 정도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집도의와 퍼스트의 호흡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환자가 VIP라는 사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박승준 교수가 지동훈 교수를 보았다.
지난번 김지훈과의 술자리에서 꺼낸 말로 의견 다툼까지 있었다. 하윤호 교수와 상종해서는 안 된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함께 근무한 세월만 수십 년이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랜 기간 손을 맞춰온 사람은 지동훈 교수였고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수술을 함께 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말하기도 전에 이미 퍼스트를 자청했을 지동훈 교수가 말이다.
‘선생님, 라인을 만드십시오. 단,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교수님들처럼 원칙과 신뢰의 라인을 만드셔야 합니다. 먼저 믿고 원칙에 따라 행동하셔야 합니다.’
간절한 눈빛이었다.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박승준 교수가 다시 물었다.
“김지훈 선생, 지켜볼 수 있을까? 김지훈 선생이 집도의라면 어떻게 하겠어?”
색이 변한 대장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수술하겠습니다. 그게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같은 결론이 났다.
‘여기서 손을 바꾼다면 동훈이도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 날 가장 곤란하게 만드는 김지훈과 계속 손을 맞춰야 한다니 세상일 참 우습군.’
눈빛을 굳힌 박승준 교수가 손을 내밀었다.
“대장 다시 자릅니다. 켈리.”
재수술이 시작됐다.
불과 사흘 만에 다시 배를 열었다. 수술 후 염증과 출혈로 인한 부종이 심각한 상태였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삐끗하거나 호흡이 안 맞으면 손상 주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수술 팀의 긴장이 치솟았다.
서로의 실력과 손을 믿지 않으면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다. 우려와는 달리 수술은 순조로웠다. 간결한 손과 과감하고 자연스러운 손이 어울렸다.
꼼꼼하고 정확했다.
손에 실린 힘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빠르다.
어느새 손상된 장간막을 자르고 정상 소견을 보이는 대장을 다시 이었다. 조심스럽게 구석구석 세척하고 배 속을 확인했다.
혹시 빠트린 부분이 있을까?
박승준 교수가 자신도 모르게 김지훈을 보았다.
“저라면 마무리하겠습니다.”
“오케이! 마무리하자.”
한 번 열었던 배를 닫을 때는 더욱 세심함을 유지해야 한다. 수술이 모두 끝날 때까지 집중력을 유지했다. 예상 밖으로 빠르게 끝난 수술에 마취과 당직 교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동훈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겁니다. 신뢰를 주시면 몇 배로 돌려줄 사람이 바로 김지훈 선생과 우리 펠로우 선생들입니다.’
회복실이다.
김지훈이 이혁원과 함께 환자의 회복을 지켜보았다.
부러운 눈으로 참관한 송진우를 보던 손일석이 수술 내용을 듣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고 있던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꽤나 마음을 졸인 모양이었다.
“거 봐. 내가 간 아니라고 그랬지? 그런데 신임 교수 세 명은 계모임이라도 하나? 집도의만 설명하면 되지 왜 저렇게 몰려다녀? 지동훈 교수는 격이 달라 보이긴······.”
말을 하다 말고 슬쩍 이혁원과 송진우의 눈치를 보았다. 전공의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고 엄밀히 말하면 외부인이기도 했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각자 생각이 있겠지.”
손일석이 김지훈의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검은 뿔테가 하윤호 교수지? 딱 보니까 네가 나한테 말한 것 이상이야. 눈빛부터 마음에 안 들어. 저런 사람이 뒤통수 잘 치니까 조심해. 어째 박승준 교수보다 더 나대는 것 같다. 누가 보면 집도의인 줄 알겠어.”
“환자가 없어서 그런지 저 인간은 빠지질 않아. 특실 전담 의사라니까.”
“뭔지 몰라도 바라는 게 있다는 말이지. 특실 환자만 쫓아다니면 빤한 거 아니겠어? 에휴! 교수님들 환자였으면 수술실까지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아깝다. 오늘은 그냥 운전기사로 만족해야 하는 모양이다. 김지훈 교수님, 뭐 느끼는 것 없으십니까?”
한결 마음이 편해진 김지훈이었다.
“알았어. 내가 한턱 낼게.”
“휴가는 바다고 바다는 곧 회지? 자연산 좋다! 이럴 때는 도미, 그 중에서도 감성돔이 제격이야. 우리 허리띠 풀고 제대로 한번 먹어 보자. 침이 다 도네. 언제 갈 거야?”
“병실 올라가서 환자 분 한 번 더 보고.”
“이놈의 열정은 도무지 식을 줄 모르네. 내가 그래서 김지훈 교수를 사랑하지만 휴가 때는 약간의 융통성이라도 발휘하면 안 될까?”
“그래야 일이 십 분이야.”
보호자에게 설명을 끝낸 교수들이 들어왔다.
마침 환자를 올려도 좋다는 마취과 사인이 떨어졌다.
“이혁원, 환자 분 괜찮으셔?”
“예, 잘 깨어나셨습니다.”
“오늘 밤 환자 잘 봐.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시지?”
손일석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김지훈 교수와 함께 트레이닝을 받은 손일석입니다. 지금 수통(국군 수도 통합 병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휴가 같이 갔다가 사정이 있어서 함께 왔습니다.”
‘손일석? 송재덕 교수님이 말한 그 손일석?’
“박승준입니다. 반갑습니다.”
박승준 교수는 물론 지동훈 교수도 관심을 보였다.
“지동훈입니다. 교수님들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혈관 파트로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후년 일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하윤호 교수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하윤호입니다. 반갑습니다. 내가 실례를 했네요. 아까 정 피디님하고 함께 있어서 방송국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예. 그러셨군요.”
그것으로 끝이다.
얼굴색이 변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년 후에는 볼일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럴 땐 일석이 성격이 참 부러워.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해도 어떻게 처음부터 안면을 몰수할 수 있지? 부러워.’
누군가에게는 확실히 어색한 상황이었다.
조용히 손일석을 보던 박승준 교수가 눈길을 돌렸다.
“송진우, 너는 어떻게 알고 왔어?”
“김지훈 선생님과 의료봉사 갔다가 상황 듣고 저도 따라왔습니다. 걱정돼서요.”
의료봉사라는 말에 모두들 표정이 묘해졌다.
휴가, 의료봉사, 한밤에 벌어진 재수술.
어딘가 어울리지 않기에 김지훈과 송진우를 보는 시선도 약간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휴가 중인데 미안하네. 하여튼 다들 신경 써 줘서 고맙고 김지훈 선생한테는 정말 미안해. 애초에 수술을 잘했어야 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네. 이만 들어가자고.”
하나둘 수술 방을 나갔다.
하윤호 교수가 눈에 콱 밟혔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급히 박승준 교수를 따라 나갔다. 지동훈 교수와 함께였지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이미 하윤호 교수와 어떤 관계인지 다들 알기에 돌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라고 해도 확실하게 의사 표현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선생님, 하윤호 교수님 행동을 제어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환자 분과 어떤 친분이 있는지 모르지만 설명은 주치의와 해당 파트 전공의가 해야 합니다. 불확실하거나 쓸데없는 정보를 전하면 불안만 심해질 겁니다. 제가 간 절제를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윤호 교수를 정조준했다.
박승준 교수도 수술 전 내린 성급한 판단과 내뱉은 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약간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게 바람직하긴 한데······.”
“선생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려면 최소한 신중함과 정확성이 동반돼야 합니다. 오직 집도의와 주치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내내 함께 했으면서도 거의 말이 없었던 지동훈 교수의 말이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는 박승준 교수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친김이었다.
“혹시 앞으로 비슷한 경우가 생긴다면 하윤호 교수님은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윤호 교수님의 조언은 필요 없습니다.”
유독 ‘하윤호’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사실 다른 교수의 조언은 언제든 환영이었다.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박승준 교수의 몫이었다.
환자를 보기 전 의국에 들렸다.
손일석을 본 나종진과 박순용이 난리가 났다. 고경철이 재빨리 사각 지대로 몸을 피했다. 카메라를 든 정훈철이 들어오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색해졌다.
그것도 잠시.
“촌스럽긴. 카메라 앞이라고 쫄지 말고 자연스럽게 행동합시다. 나종진, 나 기억하지?”
“농담이시죠?”
“농담 아니다. 기억하는 놈이 전화 한 통 없어? 어떻게 내가 먼저 전화를 해야 돼. 박순용 선생님, 잘 지내셨죠?”
“얼굴 좋으십니다. 수통이 그래도 편하죠?”
“왜 이러십니까? 수통 근무 안 하셨죠? 그럼 말을 마세요. 힘들어서 죽을 맛입니다. 나 없으면 수통이 굴러가질 않아서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판입니다.”
손일석의 넉살이 만개했다.
“내가 진우를 이번에 처음 봤는데 진국이네요. 종진아, 내 말이 맞지? 진우가 조금 더 빨랐으면 군대에서 팍팍 키워줬을 텐데 아깝네.”
“선생님, 진우 예비역입니다.”
“뭐? 너도 신의 아들이었어?”
얼굴이 벌게진 송진우가 손사래를 쳤다.
“18방위 다녀왔습니다.”
손일석이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어쩐지 김지훈 교수하고 비슷해 보이더라. 방위 출신들은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어. 같잖은 방위들! 그럼 진우가 4년차 때 제대니까 안심이 되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 보니까 펠로우 지원할 것 같은데 맞붙으면 자신 없다. 휴가 반납하는 놈 이기기 어렵다는 건 트레이닝 내내 뼈저리게 느꼈거든. 인생의 즐거움을 모르는 무식한 놈들.”
매서운 눈빛이 내리 꽂혔지만 김지훈이 가벼운 코웃음으로 대신했다.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어. 종진아, 병옥이 어디 갔어?”
“글쎄요. 일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일석아, 진우야, 환자 보고 출발하자.”
의국 문을 열던 나종진이 씨익 웃으며 고경철을 보았다. 마침 문 앞에서 마주친 이혁원도 똑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왠지 살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