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90화 (690/1,329)

2화. 짧은 휴가의 끝. (1)

곁에서 지켜보던 이혁원이 입술을 내밀었다.

마음가짐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박승준 교수의 특실 환자기 때문에?

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면이 있었지만 완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강병옥은 이미 동료들 간에 존재해야 할 신뢰의 상당 부분을 잃었는지도 몰랐다.

하윤호 교수가 또 얼굴을 보였다.

“강병옥, 비슷하지? 역시 피가 날 곳은 한 곳밖에 없네. 보호자 분, 박승준 선생님 말씀대로 한두 시간 정도 더 지켜보겠습니다. 다들 퇴근도 미루고 남아 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병실을 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혁원이 눈가를 좁혔다.

‘후우! 수술도 하기 전에 아예 간으로 못을 박아? 이러니 다들 좋아할 수가 없지. 참관만 했으면서 뭐가 저렇게 확실할까? 성질나네. 바이탈이 괜찮을 때 수술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김지훈 선생님은 어떻게 판단하실까?’

그 때 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환자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의사일지라도 환자 안정에 유의해야 한다. 이번에도 하윤호 교수일 것이라 지레짐작한 이혁원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병옥의 얼굴도 다르지 않았다.

헉!

김지훈이다.

손일석과 송진우에 낯익은 얼굴까지 보였다.

깜짝 놀란 이혁원과 강병옥이 벌떡 일어나자 김지훈이 조용히 하라며 조심스럽게 환자에게 다가갔다. 보호자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환자 분, 김지훈입니다. 제 말 들리시나요?”

정승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상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이혁원 선생,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어?”

“이 정도 나온지 세 시간 정도 됐습니다.”

“바이탈이 흔들린 적은?”

“다행히 정상 범위 내에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강병옥이 재빨리 차트와 검사 결과를 가져왔다.

결과를 확인한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할 때 대장이나 절개창이라면 혈관 하나가 빠졌을 테고 간이라면 심한 우징이 발생한 것 같네. 어쨌든 간일 가능성이 더 높아. 어느 경우든 빨리 열어서 해결해야 하는데 왜 지금까지 기다렸지?’

박승준 교수도 집도의로서 상당한 부담을 느낀 모양이었다. 간 절제 면에서 스멀스멀 피가 새는 우징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하에 혈소판을 투여했을 것이다.

출혈량을 조금은 줄일지 몰라도 멈출 피가 아니었다.

“보호자 분, 박승준 선생님과 상의해서 바로 수술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다시 수술해야 합니까?”

“제 판단으로는 그렇습니다.”

“다른 교수님들이 간 수술에서 문제가 있다고······.”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수술 부위는 두 곳이고 출혈은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 심지어 절개창에서도 가능한데 너무 성급한 말이었다.

콧등을 찡그리던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수술 후 출혈은 불가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에 하나 명백한 실수가 있다면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실이나 실수라는 말이 두렵다고 해도 배운 대로 원칙대로 말할 일이었다.

“가능성이 가장 높긴 합니다. 수술 후 어느 부분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정확하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혁원 선생, 박승준 선생님께 연락 드려.”

교수들이 올라왔다.

모두를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하윤호 교수도 의외라는 듯 힐끔 김지훈을 보았다.

‘박승준 교수가 있는데 휴가 중에 와? 이 자식 정말 어디 한 군데 나간 놈 아냐? 아니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남몰래 웃음을 머금었다.

‘이 밤에 달려오는 온 걸 보니까 되게 불안한 모양이네. 환자 지위를 생각하면 겁이 나겠지. 너라고 문제 안 일으키고 실수 안 하겠어? 간이 문제면 고생 좀 해야 할 거야. 다른 곳 문제일 리가 없어. 이걸 어떻게 이용하지?’

바로 수술하는 것이 좋겠다는 김지훈의 의견에 잠시 고민하던 박승준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도의로서 부담을 상당히 덜었다는 표정이었다.

“환자 분, 죄송합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김지훈의 말에 정승옥이 고개를 돌렸다. 점점 창백해지는 안색 사이로 언뜻 미소가 보였다.

“고마워요.”

그 순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아니라 당연히 왔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떤 문제든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며 병동으로 나왔다.

뜻밖의 얼굴이 보였다.

반가움을 넘어서는 심난함에 목소리까지 처졌다.

“형님, 여긴 웬일이세요?”

정훈철이 다소 멋쩍은 미소를 머금었다.

옆에 선 고경철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한 손에 작은 방송국용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상황이 묘하지만 우리 일이 그렇잖아. 의료봉사에 송진우 선생까지 괜찮은 다큐 하나 나올 것 같아. 일반외과 의사의 24시간이라고 할까? 문제 될 일 없으면 촬영했으면 하는데 괜찮겠지?”

정규 수술도 아니고 합병증이 발생한 상황이다.

께름칙했지만 문득 부족한 1년차가 생각났다.

일반외과가 어떤 과인지 알리고 아울러 좋은 인상까지 준다면 지원자가 늘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잠도 제대로 못자고 휴가까지 반납하는 걸 보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촬영은 하셔도 좋은데 다른 선생님들에게 허락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기본이지. 환자 분 안정이나 수술에 방해되지 않도록 할 테니까 걱정 마. 나 이 바닥에서는 베테랑이야.”

환자는 자극에 아주 민감하다. 특히 정승옥 환자처럼 상태가 안 좋을 때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카메라 불빛이 마음에 걸렸지만 정훈철이라면 피해 끼치지 않고 융통성 있게 촬영할 것이다.

양해를 구한 정훈철이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수술 준비가 끝났다.

사흘 만에 다시 수술실로 향하는 정승옥이 몹시 힘들어 보였다. 박승준 교수가 김지훈과 함께 보호자에게 다시 한 번 설명을 했다.

간 절제라는 말이 유독 여러 번 반복됐다.

당연히 퇴근을 미룬 지동훈 교수가 김지훈을 보며 미안하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내색은 안 하지만 누구라도 기분 나쁠 상황이었다.

‘정말 왜 이러시지? 대장 쪽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확인도 하기 전에 간 쪽으로 미루는 것은 아니잖아. 하윤호 말에 영향을 받았다면 더 문젠데.’

그 탓인지 언뜻언뜻 눈가를 비치는 밝은 불빛까지 정신 사납게 했다. 이를 지나칠 정훈철이 아니었다. 또 한 번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자 하윤호 교수가 눈을 반짝였다.

옆에 손일석과 고경철이 있었지만 방송국 직원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끝까지 남아 이러저런 설명을 하며 다른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수고 많으십니다. 하필이면 수술 후 합병증이 발생한 경우지만 좋게 방송해 주십시오. 손가락 하나 삐끗하면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경력이 중요하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 과 의사들이 이러고 삽니다.”

하윤호 교수가 마치 자신이 집도인 양 물어보지도 않은 일까지 설명해가며 침을 튀겼다. 누구보다도 눈치 빠른 인간이었지만 김지훈과 정훈철이 어떤 관계인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경력이 중요하다고? 대놓고 지훈이를 거론하네. 말하는 폼을 보니까 대충 누군지 알겠다.’

가만히 듣고 있던 손일석이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심 혀까지 차고 있었다.

잠시 후 수술 방 앞이 어둠에 잠겼다.

정훈철과 손일석의 나직한 목소리만 들렸다.

“손 대위, 환자 문제 생기면 원래 이렇게 많은 교수들이 나오나? 그렇지 않잖아? 마지막까지 남은 교수는 수술한 의사도 아닌 것 같은데 누구야?”

“하윤호 교수라고 있는데 분위기 봐서는 그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가 봐도 예외적인 일이네요. 환자가 전직 차관이라는 데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직 차관? 설마 지훈이도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지?”

“형님, 그놈이 그런 문제에 신경이나 쓸 놈입니까? 가끔은 의사, 환자를 떠나 인연을 만들어도 좋은데 말입니다.”

“세상 사는데 그게 편할 수도 있겠지.”

고개를 끄덕이던 정훈철이 갑자기 갸웃거렸다.

“송진우 선생도 들어갔는데 손 대위는 안 들어가?”

손일석이 입맛을 다시며 고경철에게 힐끗 눈길을 주었다.

“집 떠나면 서럽다고 오늘은 저도 형님과 똑같은 처지네요. 지훈이 빽이 영 시원찮은데요. 처남, 넌 괜히 온 것 같다. 어라?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니까 우리 처남 일반외과 하고 싶구나? 그걸 이제야 눈치 채다니 내가 요새 많이 무뎌졌네.”

‘아까 차에서 일반외과로 도배한다고 하신 말을 벌써 잊으신 거예요? 하긴 둘째 매형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셨겠지.’

고경철이 우물쭈물 시선 처리를 하지 못했다.

“그건 아니고요. 그냥 궁금해서······.”

“제대로 말 못하는 거 보니까 내 생각이 맞네. 아버님이 좋아하실 거야. 물론 지훈이하고 나도 대 환영이다. 흐흐흐! 일반외과 좋다. 우리는 맨 땅에 헤딩했지만 처남은 든든하게 시작할 수 있겠어.”

‘시작하자마자 지훈이 때문에 새까매질 거다. 나? 나도 뭐 다르진 않겠지. 인턴 시작하면 죽었다고 복창해. 실습 때부터 시작할까?”

나직한 웃음소리에 많은 의미가 담겼다.

정훈철도 따라 웃다말고 눈가를 찌푸렸다.

“그건 그렇고 하 교수인지 누군지 간이란 소리 많이 하던데 어떻게 되는 거야? 지훈이 입장이 정말 난처해지는 거 아니야?”

“지훈이 저놈이 어떤 놈인데 허술하게 처리했을 리가 없죠. 절대 간 아닙니다.”

웃고는 있지만 손일석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아무리 노련하고 뛰어난 의사라고 해도 합병증을 피할 수는 없다. 간이 얼마나 위험한 장기인지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마취가 시작됐다.

환자에게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가급적 빨리 끝내야 한다. 소독약을 들고 기다리던 이혁원과 강병옥이 마취과 사인을 받자마자 복부 소독을 했다.

각자 자리에 섰다.

절개창이 크다고 일부만 열 수 없다.

일일이 실밥을 모두 땄다.

명치부터 골반에 이르는 절개창이 활짝 열렸다.

절개 면에서 발생한 출혈은 아니었다.

복벽의 가장 깊은 층인 복막이 보였다.

군데군데 검붉은 색이 관찰됐다. 봉합한 복막 사이로 배어 나오는 피는 관찰되지 않았다. 다행히 심각한 출혈은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그래서 바이탈이 유지되고 의식은 명료했을 것이다. 하지만 복강 내 출혈은 언제 환자의 목숨을 위협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가위.”

복막을 봉합한 실을 잘랐다.

“리트랙터.”

복벽을 걸고 좌우로 벌렸다.

배 속이 환하게 드러났다.

박승준 교수가 재빨리 수술용 천으로 대장과 소장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발판 위에 올라서서 고개를 쭉 빼들고 배 속을 보던 하윤호 교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거 간일 가능성이 너무 높아지네. 손재주 하나 믿고 기고만장하더니 꼴좋다.’

간과 대장과 후복막 사이의 공간에 피가 잔뜩 고여 있었다. 여기저기 끈적끈적하게 뭉친 핏덩이가 보였다. 배 속에 박힌 드레인을 통해 공기가 유입된 탓이었다.

“이리게이션(irrigation : 세척). 석션.”

물과 섞인 피가 석션 통으로 빨려 나갔다.

주변에 고였던 피가 제거되며 간 절단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술 팀의 눈길이 일제히 간에 집중됐다.

액체로 된 지혈제는 이미 녹거나 흡수돼 보이지 않았다. 그물망처럼 만들어진 지혈제만이 절제 면에 간당간당 달라붙어 있었다.

그 사이로 검붉은 피가 스멀스멀 새나왔다.

김지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우징이 아니라 혈관 하나가 빠진 건가?’

불가피하다고 해도 재수술까지 벌어졌다.

절제 면에 묻은 피를 보는 순간 서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척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책임을 미루고 싶지 않았지만 솔직히 간 문제가 아니기를 바랐다.

박승준 교수도 확신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남은 지혈제 제거하고 이리게이션 다시 합시다. 석션.”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지혈제를 떼어냈다.

어느새 응고된 피딱지가 그 자리를 덮고 있었다.

적정하게 데워진 증류수로 간을 씻었다.

석션기를 따라 흡입되는 증류수가 여전히 발그스름하게 보였다. 답답한 숨을 내쉰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며 거즈와 탭으로 물기를 제거했다.

피로 물드는 면이 작았다.

‘다행히 간 속 혈관이 빠진 것은 아니야.’

가장 큰 걱정은 덜었지만 우징이 남았다.

‘우징으로 출혈 양상까지 보이려면 절제 면 전체에서 피가 나와야 하는데 너무 성급하게 잘랐나?’

예상보다 빨랐던 수술 시간마저 마음에 걸렸다.

몇 번의 세척 끝에 간 절제 면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혁원이 꿀꺽 침을 삼켰다.

‘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조용하다.

김지훈 역시 아무 말 없이 절제 면만 주시했다.

다시 한 번 수술 부위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수술 팀의 시선이 거즈로 쏠렸다.

거즈를 적시는 피의 양이 많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간이다. 간을 자른 면 여기저기서 피가 새어나와도 역시 간이다. 소량이라고 해도 합치면 충분히 환자를 위협할 정도의 출혈이 발생할 수 있는 장기가 바로 간이기 때문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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