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의료봉사, 짧은 휴가. (2)
눈 자 위만이 아니라 손바닥까지 귤 먹은 사람처럼 노랬다. 마르고 까만 얼굴도 햇볕에 탄 것이 아니라 오랜 지병을 앓았을 때 보는 혈색이었다. 약간의 가려움, 소화불량, 구역 등도 호소했다.
전형적인 황달과 이로 인한 증세다.
원인 질환은 내과 문제를 포함해 여러 가지지만 가장 위험한 경우는 역시 간담도를 침범한 외과 질환이었다.
신중하게 우상복부를 진찰했다.
비쩍 마른 탓에 다소 비대해진 간을 촉진할 수 있었다. 미세한 압통까지 호소했다. 느낌상 단순한 복통이 아니었다.
고성문에게 환자 상태를 설명했다.
내과 과장과 일반외과 의사들이 모두 모였다.
즉시 정밀 검사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고성문이 수요일에 검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할머니가 펄쩍 뛰었다.
“나 돈 없어. 우리 아들 어디 갔지? 어디 갔어? 그런데 당신 누구야? 여긴 어디야?”
“아버님, 치매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 할머니, 돈 걱정하지 마시고 오세요. 배 속에 큰 병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꼭 오셔야 합니다. 아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양반을 붙들고 내가 뭐하는 거야? 할머니, 집 전화번호 기억하세요?”
“몰라. 우리 집 전화번호를 내가 어떻게 알아?”
동네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일 나갔던 보호자와 간신히 연락됐다. 한참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바삐 서둘렀는지 일하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전에 검사해야 한다고 말은 들었는데 하질 못했습니다. 이번에 고추 팔면 그때 하려고 했는데······.”
어려운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돈이 아까워 이런 기회를 일부러 찾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비용은 걱정 말라며 신신당부하는 고성문에게 아들 내외가 연신 고맙다는 소리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송진우의 얼굴이 유난히 어두워 보였다.
가난이 죄라는 말은 언제 사라질까?
병원이나 의사, 환자나 가족을 탓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쨌든 이 환자 만큼은 돈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김지훈이 새삼 장인어른을 다시 보며 남은 진료를 이어갔다.
‘연세도 많고 쇠약하신데 암이면 어떻게 하지?’
걱정과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날은 점점 더 더워졌다.
다들 더위에 지칠 무렵 학교 뒤 높다란 산에서 불러오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났다.
한참 주변을 정리하고 있을 때 요란한 차 소리가 들렸다.
막 농사일을 마쳤는지 여기저기 온통 흙이 묻은 오래된 트럭 한 대가 들어섰다. 나이 든 남자 몇몇이 무언가를 잔뜩 내렸다.
송진우가 흠칫 놀라며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버지다.
투박한 웃음 속에 하루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실려 있는 우리들의 아버지였다. 내색은 안 하지만 자식을 바라보는 눈빛은 어머니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 우리 진우 가르치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니와 함께 또 고개를 숙였다.
김지훈도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야 했다.
“아닙니다. 아버님.”
“변변치 않지만 우리 선생님들 고마워서 드실 것 좀 가져 왔어요. 시간이 없으시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시골 인심일까?
아니면 부모의 마음일까?
삶은 닭 몇 마리와 돼지 수육, 김치, 막걸리와 밀가루 전 그리고 김지훈 머리통보다 훨씬 큰 수박 몇 통.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고성문이 일이 있는 직원들을 먼저 철수시켰다. 늦은 시간에 입장이 곤란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결국 김지훈과 송진우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만 남았다.
천막 아래 자리를 폈다.
먹을 준비로 왁자지껄했다.
고소한 고기 냄새와 시큼한 김치 냄새가 뒤섞였다.
“이 자리는 우리 김지훈 선생 후배인 송진우 선생 부모님께서 특별히 만들어 주신 자리입니다. 제가 대표해 감사 인사드립니다. 아들 훌륭하게 키워주신 우리 부모님께 박수 한 번 줍시다.”
고성문의 말에 환호성이 터졌다.
아버지는 먼 산을 보며 헛기침을 하고 어머니는 눈가를 찍었다. 그런 부모의 모습에 아들의 볼은 발갛게 물들었다. 지금 이 순간 어느 가족보다도 행복한 가족이었다.
정이 듬뿍 담긴 막걸리 한 잔씩 따랐다.
아들의 잔을 받는 아버지의 눈에 뿌듯함이 서렸다.
정훈철이 카메라를 보며 중얼거렸다.
“가난한 집 아들이 점점 기피하는 일반외과를 선택한 후 존경하는 선배와 함께 의료봉사를 와서 부모님을 울린다? 야! 이거 좋은 그림 하나 나오겠는데?”
시금털털한 막걸리 냄새가 퍼졌다.
운전할 사람은 금주다.
하! 하! 하!
손일석 당첨이다.
배 속에 희망과 기쁨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고경순을 위해 차를 가져 온 덕분이었다. 침통을 금치 못하는 모습을 보며 기분 좋게 잔을 든 김지훈이 송진우와 잔을 부딪쳤다.
빨간 김치를 얹은 돼지 수육은 이미 장전됐다.
단번에 들이키고 입으로 쏘면 끝이다.
캬아!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손일석을 보던 김지훈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막걸리에 돼지 수육이 기가 막히네. 묵은지랑 같이 먹으니까 예술이다. 예술. 일석아, 죽인다.”
쩝쩝 입맛을 다시는 손일석의 말 못할 안타까움이 눈에 보였다. 친구 앞에서 이러면 안 되지만 시금털털한 막걸리가 오늘따라 엄청나게 고소하다.
“친구야, 너무 맛있게 먹는 것 같다. 우리 김 교수 원래 소주 체질이잖아.”
“내가 그랬나? 그때그때 다르죠.”
송진우가 막걸리 병을 들었다.
기분 좋게 잔을 받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급히 일어났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난리를 치고 있었다.
느낌이 안 좋다.
(여보세요?)
(선생님, 이혁원입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야?)
(간 절제한 정승옥 환자 드레인이 심상치 않습니다. 출혈이 의심됩니다.)
(뭐? 열어야 할 것 같아?)
(바이탈은 유지되고 있는데 불안합니다. 박승준 선생님께 이미 연락드렸고 하윤호 교수님은 이미 나와 계십니다.)
하윤호 교수는 왜 나왔을까?
어쨌든 실력이 없다는 것은 판단 능력도 떨어진다는 말이었다. 하등의 도움이 되질 않을 것이다. 이혁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박승준 선생님 지금 나오셨습니다. 결정이 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휴가 중이신데 죄송합니다.)
(알았어. 환자 잘 봐.)
어디서 피가 날까?
세 곳 중 하나다.
대장을 자른 자리와 간을 자른 자리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연 절개창에서도 상당한 출혈이 발생할 수 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역시 간이었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이대로는 밤새 전화기만 붙들고 잠도 못 잘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이 가장 마음이 편안 일이었다. 마침 의료봉사 첫날 일정이 끝났고 오늘 밤은 특별한 일도 없었다.
“지금 병원에 다녀오겠다는 말이지? 그래. 다른 장기도 아니고 간인데 수술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별일 없었으면 좋겠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고경아와 가족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송진우의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일일이 양해를 구했다. 다들 한숨을 쉬며 별일 없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송진우가 따라 나섰다.
“부모님도 계신데 넌 안 가도 돼.”
“제 파트 환자입니다. 반드시 봐야 합니다.”
하룻밤이라도 휴가 중인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손일석이 목을 휘휘 돌리며 옆에 붙었다.
“넌 또 왜?”
“이럴 땐 노련한 운전기사가 필요한 법이야. 불안할 때 운전하면 안 돼. 어차피 나야 술도 못 마시고, 돌아갈 차가 내 차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만일 재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돌아올 때 100퍼센트 졸음운전이다. 처형 불안해서 잠도 못 잘 걸?”
“지훈 씨, 그렇게 해요. 번갈아 가면서 운전하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손일석 선생님, 부탁드려요.”
“아! 서운하네. 처형한테는 아직도 내가 그렇게 멀어요? 제부라고 불러야죠. 막걸리 생각하면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그놈이 정이 뭔지.”
김지훈의 불안을 덜어주려는 듯 농담이 따라붙었다.
“네. 제부. 부탁해요.”
결국 세 명 모두 서울 병원으로 향했다. 아니다. 막 출발하려고 할 때 허겁지겁 달려온 고경철까지 네 명이었다.
“넌 왜 따라와?”
“매형들 가시는데 제가 따라가야죠.”
손일석이 등을 두드리며 씨익 웃었다.
“우리 처남, 일반외과 하고 싶구나? 좋은 생각이야. 이러다 집안을 일반외과 의사로 도배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다른 때 같았으면 웃음을 터트렸을 김지훈은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진승옥 환자가 머릿속을 꽉 채운 모양이었다.
서울로 향하는 내내 분위기가 무거웠다.
“지훈아, 어디서 새는 것 같아?”
손일석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간이겠지. 대장 자르고 피 나기 쉽지 않잖아. 제대로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을 빠트렸을까? 후우! 답답하다.”
나직한 음악 소리마저 심난하게 들렸다. 중간중간 전화해 환자 상태를 물었다. 재수술이 불가피할 것 같다는 말에 김지훈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지훈아, 얼굴 펴. 의사가 신도 아니고 피가 날 수도 있지. 그리고 꼭 간에서 난다는 보장 있어? 대장 자르고도 얼마든지 날 수 있잖아. 절개창도 무지하게 크겠구만. 진우야. 넌 어떻게 생각해?”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우도 아는데 교수님이 왜 그러셔? 너무 걱정하지 마. 막상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어.”
어떤 말로도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매형이 꼭 가셔야 할 상황이겠지만 일반외과 의사 정말 힘든 것 같네.’
힘든 과는 기피하는 것이 현실이자 대세였다. 돈이라도 많이 벌면 모른다. 하지만 일반외과 보험 수가는 적자를 면하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본과 2학년 눈에는 무엇이 보일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울로 향하는 내내 고경철이 입을 꾹 다문 채 귀만 기울였다.
그 시간 박승준 교수가 심각한 얼굴로 드레인을 살폈다. 지동훈 교수와 하윤호 교수까지 함께 있었다.
뚝! 뚝! 뚝! 뚝!
검붉은 피가 하얀 거즈를 적셨다.
‘아무래도 멈출 피가 아니야. 간 출혈 가능성이 제일 높겠지? 제길! 하필이면 다른 환자도 아니고 이 환자에게 이런 문제가 발생하다니 갑갑하네.’
“교수님, 어떻습니까?”
보호자의 물음에 주름이 깊어졌다.
“일단 검사부터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혁원, 김지훈 선생한테 다른 연락 없었어?”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김지훈은 전화를 하며 당연히 병원으로 간다는 생각을 했고 이혁원은 별다른 말이 없어 미처 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휴가 중이긴 하지만······.”
나직한 한숨을 쉬며 은연 중 김지훈을 언급한 박승준 교수가 입을 열려는 순간 강병옥이 들어왔다.
“선생님,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그래? 가보자.”
모두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맨 뒤에 섰던 하윤호 교수가 슬쩍 눈치를 보았다.
‘지동훈까지 간 출혈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했으니까 틀림없겠지. 그 자식 버릇을 고칠 기회일 수도 있겠어. 미리 말을 던져놓는 것이 더 낫겠지?’
“보호자 분, 죄송합니다. 애초에 상당히 큰 수술이었기 때문에 합병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긴 했습니다. 게다가 간 절제는 상당한 경험과 실력이 필요한 수술이기도 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수술을 들어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거듭 죄송합니다.”
“하 교수님, 잘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하윤호 교수도 진승옥 환자의 대답까지 기대하진 않았다. 다행히 바이탈은 정상 수준을 유지하고 의식도 명료했지만 정신적, 육체적으로 대단한 부담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 정승옥 환자가 손을 까딱였다.
“김지훈 교수는?”
이 와중에도 다 들은 모양이었다.
하윤호 교수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휴가 간 사람이 오겠습니까? 박승준 선생님과 제가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일 없을 겁니다.”
살짝 뜨고 있던 눈이 힘없이 감겼다.
이만저만 실망한 모습이 아니었다.
김지훈에게 득이 될 일이 하나도 없었다.
정승옥의 입이면 여러 사람 영향 받을 것이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복부 CT를 확인한 박승준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출혈량이 제법 많은데 배 속에 고인 피는 의외로 얼마 없었다. 딱히 출혈이 의심되는 부분을 찾을 수도 없었다. 정말 드물지만 수술 부위에서 피가 진물처럼 흘러나오는 우징(Oozing)일 수도 있었다.
가급적 열고 싶지 않은 것이 집도의의 마음이었다.
“지 교수, 간 절제 단면의 우징 가능성은 없을까?”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생각보다 양이 많습니다. 다른 부위에서 발생한 출혈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부위?”
하윤호 교수가 쑥 끼어들었다.
“지 교수는 신현수 라파로 때문에 수술 못 봤잖아? 다른 부분에서 날 리가 없어. 간이야. 간. 다들 수술 잘한다고, 실력 있다고 하는데 담낭 절제를 빼면 두 시간 반 만에 잘랐어.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 안 들어? 박승준 선생님이 퍼스트를 섰어도 집도의가 그렇게 급하면 막기 힘들잖아.”
지동훈 교수와 이혁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배를 열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할 말이 아니었다.
은근한 비난이었다.
강병옥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김지훈 선생님은 어떻게 대처하실까? 환자가 최우선이라고 하지만 휴가 중인데 결국 박승준 선생님께 맡기겠지?’
다른 교수였다면 결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어떤 의사도 휴가 중에 복귀하기 쉽지 않다. 워낙 환자에 대한 의사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했기에 드는 의문일 뿐이었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울도 아니고 이미 휴가를 떠나신 것 같은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고심을 거듭하던 박승준 교수가 결정을 내렸다.
“이혁원, 전혈 하나 달고 혈소판 세 파인트 빨리 투여해. 일단 두 시간 정도 더 지켜보고 결정하자. 빨리 움직여.”
강병옥이 직접 피를 가져와 수혈을 시작하고 환자를 지켜보았다. 미세한 변화조차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뚝! 뚝! 뚝! 뚝!
한 시간째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