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88화 (688/1,329)

1화. 의료봉사, 짧은 휴가. (1)

손일석이 도착했다.

고경희가 쪼르르 달려 나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오빠아아아!”

정훈철 가족도 도착했다.

한승희가 쪼르르 달려왔다.

휙 스쳐 지나간다.

“이모오오오!”

활짝 웃으며 팔을 벌리던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우리 승희 왔어? 아휴! 예뻐 죽겠네. 어머! 언니, 못 보던 옷인데 새로 샀어요? 너무 잘 어울리네. 역시 언니는 밝은 색이 잘 어울려.”

고경아와 한수임이 좋아 죽었다.

여자 셋에 남자 한 놈이 어린아이를 가운데 두고 수다를 떨었다. 찬밥도 이런 찬밥이 없었다. 강한 소외감에 정훈철과 껌뻑껌뻑 눈만 마주치던 김지훈이 소리를 질렀다.

“형님, 가시죠. 손일석, 그만 떠들어, 인마.”

병원에 들려 송진우를 태우고 원주로 향했다.

아직도 휴가 가는 사람들이 많은지 고속도로가 제법 밀렸다. 덕분에 송진우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부모님께서 애지중지 키우신 소 팔아서 의사됐는데 얼마 보내드리지도 못해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농사 지으시면서 의대 보내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돈 못 버는 일반외과는 왜 했어?”

“저 인턴 때 수술 방에서 나오시면서 사람 살리는 과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합니다.”

“내가 그랬나?”

마지막 말이 가슴에서 떠나질 않았다.

벌게진 얼굴 위로 뜨거운 가슴이 느껴졌다.

원주에 도착해서야 일행에게 인사를 시켰다.

정훈철이야 별다른 인연이 없지만 손일석은 하늘 같은 선배다. 송진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송진우입니다. 인턴 때 많이 뵀습니다.”

“얼굴이 낯설어. 너 학교 다닐 때 상당히 조용했구나. 어쨌든 나도 네 얘기 많이 들었다. 툭 하면 얼굴 벌게지는 놈이 너지? 말 들어보니까 실력도 있고 일 잘한다고 하던데 자신 있게 살아. 그나저나 이놈의 인기는 군대를 가도 식지를 않아요. 어떻게 날 모르는 놈들이 없어. 지훈아, 이 사태를 어떻게 하지?”

역시 하오문주다.

워낙 조용했던 터라 김지훈도 1년차 들어와서야 알았는데 군대 간 놈이 어떻게 아는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 뻥?

김지훈의 시선을 의식한 듯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한 번 하오문은 영원한 하오문이다. 우리 과에서 내 레이더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표정이 왜 그래?”

“그럼 하윤호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알겠네?”

“흐음! 교수 소리 빼는 거 보니까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구나. 기다려. 이 형이 한 방에 해결해 줄게.”

확실히 눈치 백단이다.

“너 올 때까지 못 기다린다.”

“어허! 김 교수, 무슨 섭섭한 소리를 그리 하시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잠시 후 자세히 듣기로 하세. 일단 이 형한테 얘기하면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야. 지훈아, 세상에는 항상 변수가 있기 마련이야. 지금은 정말 변수긴 하지만 말이야.”

변수라면 제대밖에 없다. 몸 건강한 놈이 설마 의가사제대 한다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뜻 모를 소리였지만 송진우를 보내느라 귓등으로 흘렸다.

그 시간 휴가에서 돌아온 이준영 교수가 끙 소리를 내고 말았다. 상당히 격한 반응이었다. 이혁원과 강병옥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차트가 산더미다.

반면 하윤호 교수 환자는 달랑 두 명이다.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네.’

김지훈이 얼마나 뛰어다녔을지 눈에 선한 이준영 교수가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이준영 선생님이 웃으셨다!’

전공의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온 식구가 다 모였다.

정훈철 가족도 한 식구처럼 환대를 받았다.

고성문과 최문옥 여사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폭죽을 터트려야 할 일까지 겹쳤다. 여자들의 환호성과 아우성이 마당 가득 울려 퍼졌다.

서정호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매형, 언제 낳아요? 드디어 나도 조카가 생기네요.”

“형님, 축하드립니다.”

“와! 이거 집안 경사네요. 형님, 감축드립니다. 아! 우리 큰 처형 이제 술 못 드시네. 오늘 벼르고 왔는데 안타깝습니다. 그 술 제가 대신 해결하겠습니다.”

“검사님, 축하합니다.”

“다들 고마워. 피디 형님도 이젠 편하게 불러 주세요. 저도 오늘부터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런 날은 허리띠 풀고 즐겨야 한다.

불타는 토요일이다.

삼겹살, 돼지 목살 소금구이에 1++ 등심.

처음처럼 마시는 이슬과 거품 가득한 알코올.

등 따습고, 배부르고 알딸딸하다.

분위기 메이커 손일석이 노래방을 외쳤다.

거부하는 자는 죽음이다.

음주에는 강하지만 가무에는 젬병인 김지훈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야 했다. 승희의 동요에 이어 뽕짝이 이어졌다. 고성문과 최문옥 여사까지 마이크를 잡았다. 고경순은 술도 안 마셨는데 머리에 넥타이를 두르고 탬버린 흔들어 대는 손일석 뺨쳤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자리에 하얀 재가 내려앉았다.

해장국으로 시작한 일요일은 제법 바빴다.

병원 직원들과 함께 의료봉사 준비를 했다.

꽤 많은 의약품과 소모성 의료 기구.

이틀에 불과하지만 그만큼 단축된 진료.

고성문 입장에서는 적잖은 비용이 들 텐데 즐거움이 떠나질 않았다. 연례행사기도 했지만 고경철은 물론 서정호와 정훈철 가족까지 함께 하니 더욱 즐거울 것이다.

직업병 도졌다.

벌써부터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카메라 두 대 가져오기를 잘했네. 서 검사, 우린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나하고 같이 촬영이나 하자고. 스토리만 있으면 방송 탈 수도 있는데 좋은 거 하나 안 걸리나?”

“형님들, 저 좀 잘 찍어주세요. 정면보다 15도 정도 약간 옆에서 찍으면 비주얼도 괜찮게 나올 겁니다. 그래도 제가 이 중에서는 카메라 빨 제일 잘 받지 않습니까?”

손일석, 너 잘났다.

월요일 새벽, 단단히 준비하고 의료봉사를 떠났다.

“큰 처형, 홀몸이 아니신데 제가 모시겠습니다. 제 차 타실 자격 되시는 분들만 타시죠.”

자격이라!

고경희, 고경순, 한수임, 한승희.

고경아는 의료진이라 탈락이다.

손일석이 씨익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점수 많이 따는 지름길은 식구 특히 여자 식구의 환심을 사는 것이다. 버스 뒤를 따르는 내내 웃음꽃이 만발했다. 군대 가서도 입심 결코 죽지 않았다.

고경순이 고경희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제부, 인사까지 다 했는데 날 잡자는 말씀 없으세요?”

“어머님께서 장모님께 곧 연락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전에 경희하고 같이 내려오라고 난리시네요. 여태까지 본 사람 중에 제일 이쁘다나 뭐라나 하시면서 말입니다.”

“어머! 선 본 적 있어요?”

손일석의 말발이 급격하게 치솟았다.

관심을 돌리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아직 멀었나? 비포장도로 나오는 거 보니까 곧 도착하겠죠? 날씨가 더워서 우리 처형하고 형수님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어휴! 푹푹 찌네.”

온갖 쓸데없는 말이 난무한 가운데 다행히 목적지가 보였다. 손일석이 김지훈에게 손을 흔들며 부리나케 사라졌다.

조그만 국민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한창 준비하고 있을 때 송진우가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긴 뭐가 늦어? 딱 맞춰 왔어. 일단 인사부터 드리고 나하고 같이 진료하자.”

일반외과 전공의라는 말에 고성문이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나이가 한두 살도 아닌데 까마득한 후배라 대견하고 귀엽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우리 사위가 조금 빡빡하지? 가르칠 때 보면 위아래 안 가리는 스타일이라 그럴 거야. 우리 후배님이 이해하시게.”

김지훈과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진우, 이 자식은 왜 벌게져? 내가 빡빡하다는 건가?’

고경철은 꽤나 놀란 얼굴이었다.

‘헉! 불타는 고구마 선생님!’

“인사 안 하고 뭐해? 본과 2학년이 빠져서.”

“아···. 안녕하십니까? 본과 2학년 고경철입니다.”

“응. 반갑다. 내년에 실습 돌 때 보겠네.”

실습 때 보자는 말에 또 한 놈의 얼굴이 벌게졌다.

각자 자리에 앉았다.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 고경철이 손일석과 김지훈 사이에 딱 버티고 섰다.

“처남 덕에 의료봉사도 오고 좋네. 이렇게 보니까 자세가 완전 의사야. 우리 오늘도 즐겁게 하루를 보내볼까? 내가 병원 들어가서 자리 잡을 때쯤 인턴이구나. 매형만 믿어. 가족이라고 마음 푹 놓으면 안 된다. 무시무시한 사람은 조심하는 게 삶의 지혜야. 누군지 알지?”

“예, 매형. 감사합니다.”

김지훈의 눈이 쫙 찢어졌다.

“경철아, 아직 매형 아니다. 그리고 같은 교수라도 교수하고 펠로우는 격이 달라.”

“김 교수님, 왜 이러세요?”

그렇게 의료봉사가 시작됐다.

이제는 병원이 없는 곳이 없을 텐데 사각지대는 언제나 존재했다. 길게 늘어선 줄도 그렇지만 별것 아닌 병을 키운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

뙤약볕이다.

천막 아래도 푹푹 찌긴 마찬가지였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정훈철 가족과 서정호, 고경순도 지쳤는지 그늘에 앉아 헉헉거리고 있었다. 고경희가 가져 온 음료수를 마시며 부채질을 멈추지 못했다.

역시 아이들은 지칠 줄 모르는 전차다.

승희만 쌩쌩하다.

정오가 넘어가며 더욱 따가워진 햇볕에 환자들이 뜸해졌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잠시 숨을 돌리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전 내내 운동장 끝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한 곳만을 바라보는 것 같아 더욱 신경 쓰였다.

“진우야, 저기 저 아주머니 보이지?”

“예? 왜 그러십니까?”

“아까부터 우리 쪽을 바라보시는 것 같은데 오전 내내 저 자리에 앉아만 계시네. 아파서 오신 것은 아닌 것 같고 이상해.”

송진우의 얼굴이 갑자기 벌게졌다.

“사실은 제 어머니입니다.”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어머니? 야 인마, 근데 왜 얘기를 안 해? 그늘도 더워 죽겠는데 저러다 탈수되시겠다. 경아 씨. 음료수 있어요?”

음료수를 챙기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까만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했다.

쪽진 머리는 하얀색 반 검은색 반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남자처럼 굵었다.

한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식을 뒷바라지한 우리의 어머니였다.

순간 가슴이 찡했다.

“안녕하세요. 진우 어머님이시죠? 김지훈이라고 합니다.”

넙죽 인사를 하자 안절부절못하며 김지훈보다 더 고개를 숙였다. 까만 얼굴에 불그스름한 색이 서렸다.

“아이고! 우리 애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진우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죠?”

“아닙니다. 진우 덕분에 한결 편합니다. 오셨으면 말씀을 하시지 왜 여기 앉아 계세요? 진우야. 뭐해?”

김지훈의 눈짓에 송진우가 음료수를 따 어머니의 손에 쥐어주었다. 한 모금 마시고는 아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 마침 점심시간이네요. 같이 식사하시죠.”

극구 사양하는 손을 잡고 식사 자리로 향했다.

송진우 어머니라는 말에 모두들 일어나 인사를 했다. 어머니의 까만 얼굴에 혈색이 돌며 이미 붉어진 송진우의 얼굴과 잘 어울렸다.

모전자전!

‘저 자식 얼굴이 빨개지는 이유가 있었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엄마 닮았다.

식사를 하는 내내 어머니의 눈길이 송진우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그저 대견하다는 것 같았다. 몇 술 뜨지도 않고 슬그머니 일어나 물 한 컵 옆에 놓아주는 모습에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붉혔다. 눈가에, 입가에, 온 얼굴에 자식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다.

그리운 어머니!

고경아가 살며시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를 따라 아련한 그리움이 씻겨 나갔다.

손을 축축하게 적시는 땀이 문제긴 했다.

김지훈이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아! 벌써 권태기일까?

고경아도 자연스럽게 손을 놓았다.

연애할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오후 진료가 이어졌다.

한낮의 더위가 수그러들 때쯤 다시 환자로 북적였다.

77세 고령의 할머니가 김지훈 앞에 앉았다.

친 보호자 대신 함께 온 동네 아주머니가 치매 기가 있다는 말을 하며 혀를 찼다.

“멀쩡할 때는 참 멀쩡하신데 가끔 깜빡거리고 사람을 알아봤다 못 알아봤다 그러네요. 그래도 용케 아들하고 며느리는 알아보세요.”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보며 김지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시간, 장소, 사람 구분, 기억 등 기본적인 인지능력을 확인한 결과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다행히 당장 문진에는 무리가 없는 상태였다.

“할머니,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몸도 힘들고 배가 아파서 왔어요.”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꽤 오래돼서 얼마나 됐는지 잘 몰라요.”

진찰을 위해 간이침대에 할머니를 눕히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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