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어부지리? 노력의 대가? (2)
환자가 회복실로 옮겨졌다.
담낭 절제까지 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그렇다고 해도 8시간 넘는 대수술이었다. 신중한 눈으로 환자 상태를 살피던 나종진과 송진우가 누군가의 기척에 벌떡 일어났다.
김지훈이었다.
“환자 분 어때?”
“아직 마취 기운이 약간 남아있지만 바이탈 괜찮고 자극에 잘 반응합니다.”
“드레인은?”
“특별한 문제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다음 주가 휴가인 걸 깜빡 잊고 말을 안했네. 박승준 선생님도 있고 종진이하고 진우가 잘 보겠지만 수술 부위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공연히 불안했다. 마음 놓고 휴가를 즐기기에는 간 절제가 주는 부담이 컸다. 그 때 낯익은 얼굴이 회복실로 들어왔다.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병옥, 무슨 일있어?”
강병옥이 깜짝 놀랐다.
‘김지훈 선생님이 지금까지 계실 줄은 몰랐네. 수술 끝난지 꽤 됐는데 왜 안 올라가셨지?’
“뭘 그렇게 놀라? 무슨 일이야?”
“아닙니다. 환자 상태 확인하러 왔습니다. 선생님이 간 절제를 하셨으니까 우리 파트 환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모두들 묘한 표정으로 강병옥을 보았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분명히 있었다.
이경석 환자 대신 박승준 교수의 환자를, 김지훈 환자 대신 하윤호 교수 환자를 더 신경 쓰긴 했다. 주로 1인실이나 특실에 입원한 환자에 국한된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이 환자 역시 특실 환자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복잡 미묘한 시선이 오갔다.
잠시 눈길을 주던 김지훈이 어깨를 툭 쳤다.
“안 그래도 부를 참이었어. 환자 잘 봐.”
무심한 얼굴로 회복실을 나온 김지훈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강병옥의 눈빛이 전과는 달랐다. 변화의 시작일 지도 몰랐다. 이럴 때 후배를 격려하고 믿어주는 것이야말로 선배가 해야 할 일이었다.
단, 강병옥을 위해서라도 신중해야 할 것이다.
두고 볼 일이었다.
회진 돌며 오늘 수술한 환자를 보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했다. 조기 위암 환자는 기대대로 약간의 통증과 불편만을 호소했다.
“환자 분, 많이 아프지 않으시죠?”
“견딜 만합니다. 감사합니다.”
코 줄을 끼고 있었지만 웃고 있었다.
개복한 환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활짝 웃는 신현수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순조롭게 회복된다면 휴가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퇴원하고 난 후일 수도 있었다.
‘이런 날만 이어지면 정말 할 만한 직업이 의사겠지?’
다음 환자를 찾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경아 씨와 서연이까지, 애초에 실패할 수가 없는 수술이었네. 아니야. 경아 씨의 완벽한 어시스트기 아니었으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어. 신현수, 고맙다고 큰 절 한 번 하고 술 한잔 거하게 사라.’
간 절제 환자는 상당히 힘들어했다.
나직한 신음 소리마저 힘들게 내뱉었다.
명치부터 골반 위까지 길게 이어진 절개 창에서 전해지는 통증은 무지막지할 것이다. 며칠 간 유지해야 할 코 줄과 소변 줄도 불편과 고통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환자 분, 많이 힘드시죠. 박승준 선생님께 말씀 들으셨겠지만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지금은 절대안정을 요하니까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고 바로 말씀하세요.”
“으으으! 예. 으으으!”
말 한 마디 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억지로 대답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그냥 듣기만 하셔도 됩니다.”
보호자에게 주의할 점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병실을 나왔다. 여러 의미가 담긴 보호자의 눈길이 뒷덜미에 따라 붙었다. 실력은 나이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는 지도 몰랐다.
강병옥이 재빨리 스테이션으로 달려가 조기 위암과 간 절제 환자의 수술 후 검사 결과를 펼쳤다.
1년차인 변종수는 물론 송진우 심지어 이혁원과 나종진도 당연하게 하는 일이었다. 강병옥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확실히 뭔가 변한 것 같긴 한데 딱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네. 어쨌든 전보다 환자 열심히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진 않다.’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는 순간 신현수가 보였다.
환자 경과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돌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생각만 하면 바보다.
“현수야, 거하게 술 한잔 살 거지?”
“사긴 산다만 거하게?”
“등심에 소주면 난 대만족이다.”
신현수가 눈이 슬며시 찢어졌다.
“골뱅이에 소주로 하자.”
“자식이 넌 용돈도 카드로 쓴다며? 쩨쩨하게.”
“한도 있어. 넘치면 죽음이야.”
“너도 서연이한테 꼼짝 못하는구나?”
나직한 신음 소리와 함께 신현수가 휙 사라졌다.
왜 이렇게 즐거울까?
자! 이제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해결할 시간이었다.
휴가 갈 날이 하루도 안 남았다.
간 절제 환자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나종진, 송진우, 강병옥을 불렀다.
“종진아, 진우야, 내가 없는 동안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해. 혁원이 오면 환자 파악 지장 없도록 환자 상태 확실하게 설명하고 병옥이 너도 환자에게 신경 바짝 써.”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선생님, 죄송한데 저도 휴가 갑니다.”
“뭐? 휴가였어? 에휴! 일찍 좀 갔다 오지 하필이면 나하고 같이 가냐? 진우 없다고 생각하니까 은근히 불안하네. 종진이하고 혁원이를 믿어도 되나? 나종진, 어떻게 생각해?”
“선생님, 왜 이러세요? 저희도 믿을 만합니다.”
“그 말 확실하게 책임져.”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휴가는 어디로 가세요? 올해는 휴가답게 확실히 가시는 겁니까?”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해마다 일이 생겼고 올해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월화 이틀은 의료봉사다.”
“또요?”
“종진아, 내 처남 기억하지? 강의 끝나고 봤잖아.”
“예. 기억하죠. 고경철 맞죠?”
“기억력도 좋네. 그 자식이 나하고 의료봉사 같이 가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단다. 내 팔자도 이게 뭔지. 그래도 좋은 일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가야지 어쩌겠어?”
“일복이 끊이질 않으시네요. 어디로 가세요?”
“예전처럼 원주 근방이겠지. 왜 너도 오려고?”
“제가 휴가였으면 바로 달려갔는데 안타깝습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강병옥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한 마디 말에도 후배에 대한 신뢰가 뚝뚝 묻어났다. 농담도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 그런데 그 속에 자신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겠지?’
마음이 아픈지 아니면 기분이 나쁜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힐끗 강병옥에게 시선을 준 김지훈이 다시 한 번 단단히 부탁하고 의국을 나왔다.
‘병옥아, 내가 아니라 동료들의 믿음이 먼저야.’
송진우가 후다닥 뒤따라 나왔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할 말 있어?”
한동안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했다. 얼굴까지 벌게진 것이 뭔가 곤란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기다려 주던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나 퇴근해야 돼.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해.”
얼굴이 더 시뻘게졌다.
“이 자식이 왜 이래? 요새 얼굴 보기 힘들다고 집에서 난리야. 셋 셀 동안 말 안 하면 간다. 하나, 둘.”
그제야 송진우가 입을 열었다.
듣기 힘들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였다.
“선생님, 죄송한데 저도 의료봉사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엄한 말을 할 송진우가 아니었지만 뜻밖이었다.
“무슨 소리야?”
“부모님께서 가끔 의료봉사 온 선생님께 진료 받고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서요. 그리고 저희 집이 마침 원주 바로 옆 횡성입니다. 안 될까요?”
김지훈이 순간 말을 잃었다.
의료봉사 때 부모님이 진료 받았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암시했다. 적어도 넉넉한 집안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의대 공부시키기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꼬치꼬치 캐물을 일도, 티 낼 일도 아니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안 될 건 없다만 휴간데 그래도 되겠어? 일 년에 한 번 가는 휴가야. 잘 생각해.”
말없이 머리만 긁적였다.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았어. 연락할 번호 줘. 아! 집이 횡성이라고 했지? 내일 집에 어떻게 가?”
“버스 타고 갑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기특한 후배는 최대한 챙기는 것이 마땅했다.
“그래? 어차피 나도 내일 원주 가니까 같이 가자.”
송진우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얼굴이 난로를 방불케 했다.
“아닙니다. 선생님.”
“왜? 같이 갈 사람이라도 있어?”
“그건 아닌데 사모님도 계시고 폐 끼치는 것 같아서······.”
“폐는 무슨! 그냥 우리랑 같이 가면 돼. 사모님이 뭐야, 인마. 형수라고 불러. 근데 진우야, 너 이제 환자 볼 때는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얼굴이 벌게져? 혹시 내가 아직도 어려워?”
또 머리만 벅벅 긁었다.
환자 노티할 때는 똑 부러지게 말만 잘하는 놈이 사적인 대화에서는 도리어 버벅거리니 참 희한했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김지훈이 손을 흔들었다.
“내일 2시에 정문에서 보자. 안 기다린다.”
한참 있다 모기 소리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참 빨리도 대답한다.
이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송진우의 벌게진 얼굴과 동시에 조기 위암을 복강경으로 해냈다는 감동이 진하게 교차했다. 신현수는 말도 못할 것이다.
‘후우! 드디어 우리가 해냈단 말이지? 가슴이 뻐근하네. 기존 수술도 자신 있게 할 수 없는 수술이 많은데 새로운 기술과 방법까지 배우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
너무 앞선 걱정일지 모르지만 의료 상황 자체가 급변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신현수, 이경석을 비롯해 후배들과 고경아, 윤서연까지 모두가 노력하고 힘을 합친다면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철벽처럼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는 교수들의 힘은 말할 것도 없었다.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휴가에 마음이 들뜬 김지훈의 콧노래를 불렀다.
환자들 모두 순조롭게 회복 중이었고 믿을 수 있는 후배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간 절제 환자가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지만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방심하면 안 된다.
집담회 보고서를 보며 눈가를 좁혔다.
‘이번 주도 두 개로 잘 막았네. 다음 주는 스승님이 계시니까 하윤호가 더 기를 못 펴겠지? 눈치 보지 말고 알아서 나가. 그게 당신한테도 좋아.’
사람 미워하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윤호 교수에 대한 생각과 감정 그리고 판단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아침 회진이 끝날 때쯤 양승철 교수가 보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평소와 다르게 펠로우와 전공의에 일부 교수들까지 보였다.
“김지훈 선생, 잘 지냈지? 신현수 선생 어디 갔나?”
때마침 회진을 돌던 신현수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신현수 선생, 조기 위암 환자 수술 잘 끝났지? 처음 하는 수술인데 어려움이 없었나?”
“쉽진 않았습니다만 김지훈 선생과 지동훈 선생님이 함께 해 준 덕에 잘 끝났습니다.”
“아! 김지훈 선생이 라파로 쪽 경험은 엄청 나지? 신현수 선생, 앞으로도 가능하면 라파로로 수술해 줘. 이번 수술이 국내에서는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빠를 거야. 우리하고 좋은 논문 하나 발표하고 보자. 열심히 하면 선두 주자가 될 수도 있어. 일반외과 선생들 참 대단해.”
칭찬이 멈추질 않았다.
“참! 김지훈 선생, 어제 박승준 교수하고 간 절제도 했지? 혈관 수술도 많이 한다며? 그러고 보니 김지훈 선생은 전천후네. 도대체 어디까지 할 생각이야?”
아마 병원 내에 소문이 쫙 퍼졌을 것이다. 과가 다르다고 해도 최초 수술이라는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의료진은 없었다. 덩달아 김지훈의 이름도 오르내릴 가능성이 높았다.
어부지리?
노력의 대가?
주말 집담회 분위기도 좋았다.
불길과 비수를 날리는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휴가 중인 덕도 봤다. 물론 신현수는 땀을 무진장 흘려야 했다. 그냥 넘어갈 이혁민 교수가 아니었다.
당자사자가 아니면 느긋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처절하게 무너지는 신현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조근조근한 말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주인공인 신현수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현수야, 고맙다.’
박승준 교수와 벌어진 간 절제 환자에 대한 뜨거운 토론을 끝으로 마무리했다.
회의실을 나가던 송재덕 교수가 엉뚱한 말을 했다.
“지훈아, 아뻬 환자 퇴원 잘했지? 별 문제 없었지?”
아뻬 환자는 한둘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한 적도 없었다. 난데없는 말에 눈만 껌벅거리던 김지훈이 머리를 탁 쳤다.
“그 환자 며칠 전에 퇴원했습니다.”
“그래. 한 놈이 문제다. 한 놈이.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는데 한 가지만 명심해. 넌 우리 과 보배야. 보배. 성급하게 나서다 다치면 안 된다.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말투는 여전했지만 걱정이 가득했다.
미안하다는 기색까지 보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나머지 한 놈은 괜찮아 진 거니? 자식 같은 놈이라 그놈이 더 걱정이다. 그놈이.”
김지훈이 조용히 미소만 머금었다.
아직은 확답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송재덕 교수가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렇게 커 가는 거야. 이렇게. 산전수전 다 겪어야 사람 되고 진짜 교수 되는 거다. 그게 인생이다. 인생.”
어느 때보다도 오랜 시간 오후 회진을 돌았다.
웃고, 하소연하고, 휴가를 가면 어떻게 하냐며 얼굴을 붉히는 환자도 있었다. 강병옥이 눈가를 좁힌 채 김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승옥 환자를 보았다.
하루가 지나도 고통은 마찬가지였다.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휴가를 가게 돼서 일주일간 출근을 못하게 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박승준 교수가 집도의이자 실질적 주치의인데 구태여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할 일이 아니었다.
보호자가 웃기만 했다.
직접 상처를 치료하고 찬찬히 드레인을 살핀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까지는 문제없어 보이십니다. 다행입니다.”
“수술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강병옥 선생, 주말에 당직이지?”
“예. 당직입니다.”
어깨 한 번 툭 쳤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것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퇴근한 김지훈이 고경아와 함께 만반의 준비를 했다. 바리바리 짐이다. 그 속에 담긴 알록달록한 반바지와 샌들 그리고 까만 선글라스가 휴가를 실감케 했다.
드디어 휴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