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또 하나의 이정표. Ⅱ (1)
박승준 교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간 절제를 내가 한다면 나도 집도의나 다를 바가 없잖아. 내 환자가 아니라 해도 확실하게 환자 파악하고 치료할 수 있어야 돼.’
“간 절제에 관한 부분은 제가 직접 환자에게 설명하겠습니다. 수술 이후에도 제 환자처럼 치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술만 하고 손 뗄 수는 없습니다.”
다들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특히 강병옥의 표정이 가장 크게 변했다.
‘굳이 책임을 자처할 이유가 없으시잖아? 일반외과 의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바로 이런 건가?’
과도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 본성에 가까운 일이다. 이번 환자의 경우 처신하기에 따라 책임을 한결 덜 수도 있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도리어 책임을 지고자 했다.
지동훈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박승준 교수는 입술을 모은 채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한 놈만 제외였다.
‘가만있으면 될 일을 두고 왜 책임을 자처해? 악을 쓰면서 덤빌 때 알아봤지만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었네. 혹시 간 절제는 지가 했다고 내세우려는 속셈인가?’
“그런 문제는 걱정하지 마. 그럼 수술 들어오는 걸로 알고 진행한다. 고맙다.”
박승준 교수의 말을 뒤로 하고 연구실로 향했다. 조금 더 대화가 필요했지만 하윤호 교수와 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싫었다.
문을 열던 김지훈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어후! 이번 주도 일찍 가기는 글렀네.”
조기 위암 라파로 수술만이 아니라 간 절제 역시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연이어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능하다고 해도 미흡하면 어디선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준비, 철저한 준비만이 답이었다.
이중고다.
아니 하윤호 교수 말려죽이기 프로젝트까지 삼중고다.
그 날 저녁, 네 명의 교수가 모였다.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지동훈.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빠질 이경석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준비를 하기 전 김지훈이 박승준 교수의 수술에 대해 말했다.
이경석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각자 알아서 수술한다지만 하윤호 교수까지 있었다는 말에 서운함을 금하지 못했다.
“이경석 선생, 너무 서운해 하지 말아요. 내가 노력한다고 당장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곧 좋아질 겁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보다 박승준 선생님 수술 준비도 같이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나 위장관 파트에요. 우선순위가 있지 않겠습니까?”
잠시 어색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내 퇴근도 잊고 수술 준비에 몰입했다.
일반외과에서 처음으로 시도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의미가 담긴 수술이었다. 복강경 수술 적용이 확대되는 이상 세부 전공이 무엇이든 배워야 할 수술이었다.
언제 말이 퍼졌는지 박순용을 비롯해 나종진, 송진우, 강병옥과 1년차인 변종수까지 보였다. 10시가 넘어서야 바글대던 연구실이 한산해졌다.
‘후우! 드디어 라파로로 위암을 절제한단 말이지?’
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잠시도 손을 가만 두지 못했다. 위암 수술은 담낭 절제와 달리 퍼스트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수술이야.’
다음 날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신현수의 긴장이 눈에 보였다.
시간만 나면 불러댔다. 어시스트를 서야 하는 고경아를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마취를 맡은 윤서연까지 수술 방 내 준비실에 모여 기구를 앞에 두고 상의했다.
처음 보는 모습에 다소 놀랐지만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첫 복강경 수술을 앞두었을 때 김지훈도 똑같았을 것이다. 그보다 더한 반응을 보여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교수들의 은근한 응원이 이어졌다.
“신현수, 너무 긴장하지 마라. 그동안 준비한 게 있는데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거다.”
“그럼그럼. 현수 실력에 지훈이하고 지 교수까지 함께 하는데 실패하는 게 이상한 거야. 마음 푹 놓고 준비한 대로만 하면 된다. 지훈아, 경석아, 내 말이 맞지? 그치? 대장하자. 대장.”
펠로우들의 적극적인 준비와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숙지하는 지동훈 교수까지 수술 성공을 위해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전공의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라는 시간은 정말 짧았다.
후배들의 철저함 덕분에 더욱 바빴다.
정규 수술에 혈관 수술까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다소 늦은 오후 회진을 막 마치기 직전에 이혁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선생님, 응급실에 빤뻬리 환자 한 명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일과를 1초 남긴 시간이었다.
“오늘 누구 당직이야?”
“하윤호 교수님입니다.”
김지훈이 총알처럼 사라졌다.
전공의들 역시 누가 당직인지 따져보지도 못하고 모두들 응급실로 내달렸다. 곧바로 수술이 이어졌다. 단 몇 분 차이로 환자의 운이 갈렸다.
오늘도 환자 한 명 보지 못한 채 하루를 마친 하윤호 교수가 응급실에 들렸다. 차트를 확인하다 말고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간호사, 시간이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내가 당직인데 이 환자가 왜 김지훈 선생 앞으로 입원했지?”
“일이 있어서 응급실 내려오셨다가 환자 보시고 급하다고 바로 수술 들어가셨어요.”
간호사가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했다.
하윤호 교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가뜩이나 없는 환자가 휴가 후 씨가 마르다시피 줄었는데 응급 환자까지 빼앗긴 꼴이었다. 간간히 있던 컨설트마저 나오지 않아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김지훈 이 자식은 왜 자기 당직도 아닌데 설쳐? 실적 너무 안 나오면 문제 커지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원장님에겐 뭐라고 하지?’
슬슬 초조함을 넘어 불안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김지훈도 편한 건 아니었다.
“아휴! 이러다 지훈 씨가 먼저 말라 죽겠어요. 밥은 먹고 수술하든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혈관까지 도대체 오늘 수술 몇 개 한지 기억이나 해요?”
“내일부터 밥은 먹을게요.”
“내가 못 살아. 하윤호 그 사람은 왜 그 모양이에요? 교수면 교수다워야지. 하여튼 앞으로 밥 굶으면서 수술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요.”
사정 빤히 아는 고경아가 식사 내내 잔소리를 해댔다. 하마터면 체할 뻔했지만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말은 묵묵히 들어야 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식사 말미에 내민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은 피요 살이자 고경아의 마음이었다.
수요일 오후, 김지훈이 간 전이가 동반된 대장암 환자를 찾았다. 우연한 일인지 특실에 입원해 있었다. 넓고 조용한 병실 안이 난으로 가득했다.
‘박승준 선생님 환자는 특실에 잘도 입원하네. 모든 환자가 이렇게 치료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도 못할 정도로 돈이 들겠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바람일 뿐이었다.
환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67세 남자 환자 정승옥.
후덕한 인상에 제법 살집이 있었다. 간 전이까지 발생했는데 심각한 체중 감소나 전신 쇠약 등이 동반되지 않아 상당히 의외였지만 천만다행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일반외과 김지훈입니다.”
“아! 김지훈 교수님이시군요. 제 수술을 담당하신다고 박 교수에게 말씀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한 말투에 말기 암 환자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침착했다. 암 덩어리를 절제하면 그나마 좋은 예후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을 이미 들었겠지만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김지훈을 본 보호자의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환자의 병은 중한데 집도의는 너무 젊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태연하게 넘길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일단 진찰부터 하겠습니다.”
복부 진찰을 하고 필요한 사항을 일일이 물으며 하나하나 점검했다. 가장 중요한 수술 설명이 남았다.
“환자 분도 충분히 수술 방법과 위험성에 대해 아시고 동의하셔야 합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CT를 함께 보시면서 설명을 들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승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CT를 비롯해 모든 검사 결과를 준비하고 설명하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박승준 교수였다. 그 뒤에 보기 싫은 얼굴이 또 따라붙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인상부터 썼겠지만 지금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박승준 교수가 인사를 하자 정승옥이 입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김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체적인 상황과 치료에 대해서는 이미 들으셨을 겁니다. 저는 간 절제에 대해서만 설명 드리겠습니다.”
김지훈이 힐끗 박승준 교수를 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대장 절제가 확실하게 완료돼야만 좌측 간을 모두 절제할 수 있다. 만에 하나 대장 절제가 불가하다면 수술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전이된 암이 혈관에 가까이 인접해 있어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별문제가 없다면 간 절제 소요 시간은 3시간 전후로 예상된다.
“수술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설명하는 내내 김지훈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모든 수술이 마찬가지지만 대장과 간을 동시에 절제한다. 때문에 수술 후 합병증 발생은 물론 상대적으로 사망률까지 높다. 단, 간 절제 후 우측 간이 충분히 남아있기 때문에 이로 인한 기능 저하는 우려할 필요가 없다.
정승옥이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사망률을 언급할 때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돈이 많든 적든 환자는 환자이기 때문이다.
“김지훈 교수님, 잘 들었습니다. 수술 받기로 한 이상 교수님만 믿겠습니다. 박 교수, 잘 부탁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윤호 교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얼굴에 철판 깐 것이 틀림없었다.
“차관님, 의사는 환자들에게 최악의 경우까지 모두 설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종의 의무이기도 하고요. 듣기 힘든 말이 있으셨겠지만 관행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관님?
아마도 전직 차관이었던 모양이었다.
병실에 널린 난을 생각하면 지금도 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어떤 사이인지 모르지만 하윤호 교수가 얼굴을 들이민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 교수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 고마워.”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저도 수술에 참여하고 싶은데 가까운 분 수술은 안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라면 원칙이라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말도 뻔뻔하게 잘한다.
검은 뿔테로 가려진 퉁퉁한 얼굴에 맺힌 미소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더 이상 자리 지켜봐야 기분만 나빠질 것 같았다. 설명은 충분히 했다. 전직 차관이라고 해서 자리를 더 지킬 이유도 없었다.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나왔다.
강병옥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일반 병실 환자와 특실 환자를 대하는 모습이 하나도 다르지 않으시네. 왜 이제야 보이는 걸까?’
“병옥아, 수술 전 검사 확실하게 챙겨. 환자 분은 급하겠지만 의사는 급하면 안 된다.”
목소리에 담긴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김지훈이 부리나케 연구실로 향했다.
신현수와 수술 테이프를 한차례 본 후 간 절제에 관한 책을 펼쳤다. 대장암이 가장 잘 전이되는 장기가 간이다. 특별히 주의할 점이 있는지 세세하게 찾아보았다.
신현수가 스윽 고개를 들이밀었다.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이 자식이 설마 간담도까지 넘보나?’
서둘러 말을 돌렸다.
“다행이 간만 잘 절제하면 되겠다. 현수야, 라파로는 세 시간이면 자르고 봉합까지 가능하겠지?”
“처음 하는 수술인데 세 시간 안에 가능하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신현수가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는데 안 되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야?”
“하긴 천하의 김지훈이 퍼스트를 서는데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뻣뻣한 나무토막 같던 놈이 점점 대나무가 되고 있었다. 이러다 하오문 문도가 되는 것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하윤호 교수는 어때?”
“맨날 똑같지, 뭐. 어떻게 특실 환자 옆에서 떨어지질 않는지 몰라. 응급실은 내가 맡을 테니까 생각날 때마다 원무과에 얘기해야 한다.”
의국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신현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인 신동철 이사장의 말까지 떠올랐다.
- 송재덕 원장님과 이혁민 과장님께 대충 말은 들었다. 그런데 하윤호 교수 뒷배가 생각보다 대단해. 하성원 원장만이 아니었어. 어쨌든 내년 2월이 돼야 결론을 낼 수 있으니까 현수 너도 잘 지켜봐. 이사회에서 인사관리를 하나 의사들이 하나 문제가 끊이질 않는구나. -
잠시 샛길로 샜던 김지훈과 신현수가 늦은 퇴근을 했다. 앞으로 있을 수술을 생각하며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간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고경아가 복강경 수술 테이프를 보고 있었다.
눈에 잔뜩 힘을 준채 어느 과정에 어떤 기구가 필요한지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역시 당당한 일반외과 수술 팀의 한 명이었다.
‘수술 잘될 수밖에 없겠다. 어이구! 부부가 쌍으로 신현수를 위해 시간을 바치다니 이거 손해 보는 것 같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멋져 보이면서 섹시했다.
피곤이 밀려나며 가슴이 후끈 달아올랐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이 움직였다.
찰싹 소리와 함께 손등이 화끈거렸다.
“어머! 어딜 만져요? 준비 다하고 기다릴 때는 들어오자마자 쓰러지면서 이런 날 신호주면 뭐해요?”
새침을 떠는 모습에 늑대가 뛰쳐나왔다. 티격태격 격렬한 실랑이 끝에 강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한참 후 집에 들어온 고경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보일러 돌렸어? 집이 왜 이렇게 더워?”
“응? 좀 덥지? 습기 제거하려고 틀었어.”
“근데 어제보다 습기가 더 찬 것 같네.”
김지훈이 조용히 창문 열고 선풍기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