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또 하나의 이정표. (2)
불현듯 이미 퇴근했을 윤서연 생각이 났다.
‘서연이도 경아 씨랑 똑같을까?’
“의국에 있는데 왜? 집에 안 가?”
“지금 집에 갈 상황이 아니야. 의국에서 뭐해?”
“이준영 선생님하고 신기동 선생님 휴가 가시잖아. 산더미 같은 차트하고 싸우고 있지. 주말인데 퇴근도 안 하고 웬 전화야? 무슨 일 있어?”
“이따 보고 빨리 외래로 내려와.”
툭 전화가 끊어졌다.
목소리로 봐서 나쁜 일은 아니었다.
갑자기 궁금증이 폭발해 후다닥 외래로 내려갔다.
문을 열자 입 쫙 찢어진 신현수가 지동훈 교수와 함께 손짓을 했다. 최근에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표현력 빵점에 가까운 신현수가 이렇게 웃다니 뭔가 대단한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훈아. 드디어 잡았다.”
“뭘 잡아?”
“조기 위암 라파로!”
마침내 신현수가 이빨을 드러냈다.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마음의 평안이 저 멀리 사라졌다.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차트와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위 중간 부위에 발생한 조기 위암으로 위치까지 완벽했다. 기술적인 면만 담보할 수 있다면 실패보다 성공 확률이 훨씬 높았다.
“언제 하는 거야?”
“다음 주 금요일. 주말이 겹쳐서 빨리 준비해야 돼.”
왠지 심하게 부럽다.
입안이 바짝 마를 정도로 부럽다.
나직한 숨을 길게 내쉬던 김지훈이 갸웃거렸다.
지동훈 교수가 바로 눈앞에 있다.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동안 복강경 준비를 함께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하윤호 교수와 충돌한 이후 얼굴도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위장관 파트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수술 팀을 어떻게 구성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수술 팀은······.”
김지훈이 지동훈 교수를 보며 얼버무리자 신현수가 씨익 웃었다. 걱정 말라는 얼굴이었다.
“지훈아, 준비한 대로 퍼스트 서줘. 지동훈 선생님, 죄송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세컨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준비한 사람들이 따로 있는데 당연하지. 같이 수술하는 것만 해도 큰 행운이야. 이경석 선생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이네.”
신현수의 말에 가슴이 떨리고 지동훈 교수의 말에 평안이 다시 찾아왔다. 문득 펠로우들과 같은 이유로 표정이 안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지 않다면 신현수가 세컨을 부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굳이 하윤호 교수에 대해 먼저 물어보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짐작이 맞았다.
“김지훈 선생, 하윤호 교수 때문에 걱정이 많지? 나도 더 이상 두고 보기 힘들어. 함께 해결해 나가자.”
‘확실히 박승준 선생님과도 다른 분이야.’
하필이면 주말 당직이다.
그 시간을 빼면 5일밖에 안 남았다.
처음 시도하는 수술이기에 시간이 빠듯했다.
월요일부터 단단히 준비하기로 했다.
“그럼 나도 월요일부터는 우리 펠로우 선생들과 머리를 맞대는 건가? 은근히 떨리네. 오래 간만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데 생각보다 좋다.”
지동훈 교수의 말에 마음이 넉넉해졌다.
잠시 동안만.
“현수야, 너 용돈 얼마 받아?”
생뚱맞은 말에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나 카드 써.”
우와! 심하게 부럽다.
“좋겠다. 우리 월급이 얼마나 되지?”
“월급이 얼마인지도 몰라? 너도 문제다. 네가 나보다 많이 받는 건 확실해. 정확한 액수가 궁금하면 원무과에 물어 봐.”
아! 펠로우 2년차에 전임 강사 대우다.
정말 궁금했지만 알면 속 쓰릴 지도 몰랐다.
아서라. 말자.
남자는 평생 밭을 갈아야 하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토요일 밤, 칼바람이 불었다.
나종진, 송진우, 강병옥, 변종수의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겼다. 일요일에도 김지훈의 일복은 이어졌다.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 환자까지 파악하느라 꽤 시간을 잡아먹었다.
수술이 이어졌다.
고생한 보람을 달라는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나종진에게 빤뻬리(복막염)를 송진우에게는 아뻬를 주었다. 두 수술 모두 강병옥을 세컨으로 세웠다. 불만이 있더라도 선배와 동기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수술하는지 보고 느끼기를 바랐다.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못해 부족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손에 전공의만이 아니라 수술에 임하는 모든 의사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가 있었다.
“강병옥, 수술 시간이나 기술적인 면에만 집중하지 마. 송진우, 넌 자신감을 더 가져도 돼.”
수술 전에 한 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쉰내가 팍팍 나는 파김치가 되고서야 월요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5주 만에 도는 주말 당직이라 그런지 전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간만에 조각 잠을 청했다.
외래 환자 보고 잠깐 자고 점심 재빨리 먹고 자고 오후에도 틈틈이 눈을 붙인 덕에 피로를 조금은 풀었다. 띵한 머리에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시계를 보니 어느새 3시였다.
‘오늘은 외래 환자 본 것 말고는 한 게 없네. 예전에는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회진 빨리 돌고 라파로 준비하면 9시나 돼야 퇴근하겠지?’
폭풍 뒤에 고요를 두고 볼 세상이 아니었다.
강병옥이 컨설트 용지를 들고 달려왔다.
만성 신부전 환자의 혈관 수술 의뢰였다.
가급적 빨리 시행해 달라는 요청에 곧바로 환자를 진찰했다. 수술을 연기할 이유가 없는데다 환자도 다급해 보여 즉시 수술하기로 결정했다.
없던 힘이 생길 상황이었다.
“병옥아, 신현수 선생한테 수술 있다고 연락해.”
숱하게 퍼스트를 섰고 경험도 제법 쌓인 수술이었지만 신기동 교수 없이 처음 하는 혈관 수술이었다. 은근히 긴장되면서 한편으로는 가슴이 설렜다.
찬물에 머리까지 감고 책을 펼쳤다.
오후 5시.
신현수, 강병옥과 함께 수술 준비를 했다.
환자의 손목을 소독하고 천을 덮는 순간 강한 긴장감에 숨을 몰아쉬었다. 국소 마취 하에 1시간 언저리면 끝나지만 환자에게 메이저 못지않은 영향을 주는 수술이기 때문이었다.
흥분이 가시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리도카인(국소 마취제)으로 꼼꼼하게 마취를 하고 피부를 절개했다. 심장 박동을 따라 벌떡이는 동맥과 검붉게 보이는 정맥을 노출시켰다. 단 1밀리미터의 실수가 수술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깊게 각인시켰다.
“루뻬(수술용 돋보기).”
숨소리만이 나직하게 들리는 가운데 조용히 수술이 진행됐다. 김지훈과 신현수의 시선이 단 한 시도 수술 부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두 개의 손이 호흡을 맞추고 강병옥은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 속에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러나 자만이란 놈은 그림자도 비치지 못했다.
강병옥이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 시간 병동에 올라온 교수 세 명이 CT 한 장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술에 관해서는 항상 자신감을 보였던 박승준 교수마저 눈가를 좁히며 얼굴을 펴지 못했다.
“지 교수, 수술은 가능하겠지?”
지동훈 교수가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하윤호 교수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자신에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시간이 흘러서야 답을 했다.
“간 전이가 발생했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길! 누가 보면 지동훈이 간담도인 줄 알겠네.’
“이거 정말 어려운 케이스네요. 대장 절제도 쉽지 않겠지만 간 절제도 만만치 않겠습니다. 이 수술 성공하면 저번 직장암 환자까지 내과 교수들 눈이 확 달라지겠는데요?”
하윤호 교수의 말에 박승준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수술을 성공했을 때 따라오는 것은 성취감과 보람만이 아니다. 인정과 찬사는 곧 명예고 이는 성공과 출세의 발판이었다.
‘좋은 기회야. 문제는 간 절제인데.’
“지 교수, 역시 간 절제가 관건이겠지?”
“그거야 선생님과 지 교수가 도와주면 제가······.”
지동훈 교수가 재빨리 말을 가로 막았다.
‘자기 실력을 알고 나서야지 도대체 이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사고나 치지 마.’
더 이상 체면 따위를 고려할 때가 아니었다.
“확실하게 절제하려면 경험이 많아야 합니다. 이준영 선생님은 휴가 가셨으니까 김지훈 선생에게 부탁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경험도 결코 적지 않고 실력은 선생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준영 선생님은 휴가 중이시고 김지훈이라.”
무언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기는 했지만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하윤호 교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내가 얼마나 치욕을 당했는지 알면서 이러면 안 되지. 이 환자는 나한테도 기회야. 지 교수, 너까지 왜 이래? 아무리 전공이 달라도 다 일반외과 의산데 셋이 함께 하면 간 절제 하나 못하겠어?’
“선생님, 김지훈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안 그런 척해도 자기 때문에 수술을 성공했다고 할지도······.”
‘겉과 속이 정말 다른 인간이네.’
“하 교수, 간 절제 실패하면 환자까지 놓칠 수 있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박승준 선생님이 집도의라고 해도 이 환자는 경우가 달라.”
지동훈의 교수의 말에 하윤호 교수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번 수술에서 간 절제는 대장 절제의 부수적인 과정이 아니다. 별개의 암 수술과 다름이 없었다. 당연히 환자에게 누가 어떤 수술을 하는지 알려야 한다. 만에 하나 수술 후 책임 소재를 엄격하게 가려야 한다면 절대 피할 수 없는 경우였다.
꿀 먹은 벙어리다.
한동안 나직한 대화가 오고갔다.
그 때 수술을 마친 김지훈이 병동을 올라왔다.
박승준 교수가 눈빛을 굳히며 손짓을 했다.
‘하윤호에게는 절대 맡길 수 없는 수술이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쳐다보기도 싫은 사람을 옆에 두고 왜 자꾸 부를까?
CT를 앞에 두고 있는 것을 보니 환자와 관련된 일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경석은 보이지 않았고 엉뚱하게도 하윤호 교수가 옆에 서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지훈 선생, 수술 있었던 모양이구나. 거의 매일 수술하는 것 같네. 그건 그렇고 혹시 금요일 오전에 외래 진료 스케줄 조정할 수 있을까?”
박승준 교수의 말에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요일 오전에는 시간이 안 되는데 왜 그러십니까?”
“대장암 환잔데 간에 전이가 됐어. 상당히 어려운 케이스이긴 하지만 다행히 대장과 간만 절제하면 예후가 괜찮을 것 같아. 그래서 간 절제를 부탁하려고 했는데 무슨 일 있어?”
어이쿠! 하필이면.
원격 전이가 된 대장암 수술은 직장암 수술 이상으로 대단히 어려운 수술이다. 간 절제기에 지동훈 교수와 함께 수술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쉬움이 확 느껴질 정도로 귀가 솔깃한 말이었지만 몸은 하나다.
“그날 신현수 선생이 조기 위암을 라파로로 합니다. 제가 퍼스트를 서야 해서 시간이 안 맞을 것 같습니다.”
“조기 위암을 라파로로?”
박승준 교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지동훈 교수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수술을 성공해도 신현수 수술이 더 눈에 뜨일 텐데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제길! 되는 일이 없네. 간 절제는 또 어떻게 하지?’
하윤호 교수의 눈이 반짝였다.
‘이준영 선생님은 휴가고 김지훈 저 자식도 안 되면 나밖에 없네. 책임이야 아무리 뭐라고 해도 결국 김지훈 말대로 집도의가 지는 거지, 뭐 있겠어?’
김지훈 입장에서는 솔직히 아쉽기만 했다.
복강경 수술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지만 간 절제는 그 이상이었다. 자주 벌어지는 수술도 아니기에 저절로 CT에 눈이 갔다.
‘좌측 간을 침범했네. 혈관 쪽에 가까워서 상당히 주의해야 하지만 충분히 절제할 수 있겠어. 정말 아쉽다. 설마 하윤호 교수에게 맡기진 않겠지? 차라리 직접 하시는 편이 훨씬 좋을 겁니다.’
제각각 다른 생각을 하며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때 지동훈 교수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방법이 있다는 얼굴이었다.
“김지훈 선생, 라파로 주요 과정이 세 시간 정도면 끝날까? 조기 위암인데 가능하지 않겠어?”
“첫 시도라 확실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신현수 선생 실력을 생각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순조롭게 진행돼야 하겠죠.”
“어차피 대장 절제를 먼저 해야 하니까 예정대로 진행 되면 라파로 끝난 후 간 절제가 가능하지 않을까? 김지훈 선생이 맡아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슨 뜻인지 모두 다 알아들었다.
신현수가 주요 과정을 끝낼 때쯤이면 대장 절제도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일 것이다. 김지훈이 양해만 한다면 바로 이어서 간 절제를 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지동훈 교수의 전폭적인 신뢰에도 불구하고 김지훈이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고민되네.’
연이어 수술하는 일이야 매일 벌어지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퍼스트라고 해도 복강경을 이용한 조기 위암 수술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적잖이 긴장하고 집중해야 하는데 간 절제 역시 상당한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해야 한다. 잇따라 하기에는 무리한 일일 수 있었다.
물론 수술 욕심도 한몫했다.
박승준 교수가 다소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다른 방법이 없네. 그나마 실력은 믿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후우! 펠로우가 도움을 요청해도 부족할 판에 도리어 내가 도와 달라고 해야 하다니 답답하네.’
“그러면 될 것 같은데 김지훈 선생 생각은 어때? 꼭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박승준 교수마저 같은 생각이었다.
이경석을 생각하면 생각지도 못한 신뢰였다.
고민을 거듭하던 김지훈의 눈에 하윤호 교수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모든 걸 떠나 하윤호 교수가 간을 절제하는 사태만은 기필코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인간이 건드리면 100퍼센트 문제가 생긴다.’
“수술을 미룰 수는 없습니까?”
“암 환자들 마음이 어떤지 잘 알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결국 두 수술 모두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어쩔 수가 없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조건이 하나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라니?”
수술을 두고 조건 달 일이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