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82화 (682/1,329)

8화. 또 하나의 이정표. (1)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이 사라지자 마음이 너무 편했다.

빈자리가 가져오는 여파는 조금도 없었다. 박승준 교수의 눈치가 이상했지만 지동훈 교수는 도리어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김지훈 선생 덕에 하윤호 교수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전공의에게 책임을 미룰 정도면 하성원 원장님도 어쩔 수 없는 수준 아닙니까? 말씀 드린 것처럼 어떤 미련도 두시지 마셨으면 합니다.’

‘지 교수,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우린 아직 완전한 이 병원 사람이 아니야. 그걸 이기려면 힘이 필요해. 김지훈, 열정과 원칙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으면 난 병원을 옮기지도 않았어. 너도 예외는 아니야.’

강병옥도 휴가를 갔다.

꾸벅 인사를 하고는 눈도 마주 치지 못했다. 눈길을 피한 것일 지도 모른다. 무엇이 됐든 잠시 머리 식히며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랐다.

하윤호 교수 얼굴 볼 일 없는 한 주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각자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하루하루가 바빴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작전 잘 짠 후 고경아와 독대를 했다.

“지훈 씨, 아침 7시에 꼬박꼬박 나가면서 퇴근은 제 시간에 한 적 있어요? 밥하고 빨래는 그렇다고 쳐도 청소나 설거지는 가끔 할 수도 있잖아요? 집에 들어오면 허물 벗는 것처럼 옷하고 양말 그 자리에 그대로 벗어놓고 자기 바쁘잖아요? 어떻게 남편 얼굴보다 수술 방 식구 얼굴을 더 볼 수 있을까. 주말에 오프면 뭐해. 피곤하다면서 하루 종일 뒹굴뒹굴 거리기만 하고.”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해요? 경아 씨, 솔직히 일이 바쁘다보면······.”

찌릿! 위험하다.

“그건 미안한데 그래도 바쁜 덕에 통장에 월급 말고······.”

찌릿! 찌릿!

벌집을 건드렸다.

극도로 위험하다.

“월급 말고 뭐? 또 뭐가 있어요? 지훈 씨 월급이나 내 월급이나 크게 차이도 안나요. 나는 정말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으면서 우리 미래를 위해 단 돈 천 원이라도 더 저축하려고 하는데 용돈 올려달라는 소리가 나와요? 용돈 올려주면 뭐하려고요? 술밖에 더 마셔요?”

생각해 보니 쓸 시간도 거의 없다.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머릴 굴려가며 짰던 작전마저 고경아의 날카로운 눈빛 앞에 산산이 깨졌다.

반항해 봐야 분위기만 나빠진다.

조용히 입 다물고 기다리는 것만이 살 길이다.

왠지 눈물이 난다.

다음 날 용돈 사건 때문인지 안주머니에 든 지갑이 유난히 덜렁거렸다.

‘비자금은커녕 용돈도 그대로가 뭐냐? 살 맛 안 나네.’

입맛을 쩝쩝 다시며 무심코 지갑은 확인하는 순간 눈이 절로 커졌다. 어제 밤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돈이다.

딱 한 장이다.

파란색일까? 하얀색일까?

김지훈이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감동의 눈물일까? 허무함일까?

‘아! 그러고 보니 경아 씨 생일이 얼마 안 남았네.’

통장 뺏긴 유부남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다.

다사다난한 한 주가 지나고 어느 새 8월이 왔다.

8월 셋째 주로 잡은 휴가 날짜가 눈에서 아른거렸다.

해수욕장에 발만 담글 수 있는 때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장인어른의 호출이 이어졌다. 찍 소리 정도는 내려고 했는데 ‘예, 예, 예’ 소리만 해야 했다.

(경철이가 자네하고 꼭 같이 가고 싶다는데 어떻게 하지? 이리저리 빼던 놈이 올해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몰라. 이번에는 그냥 우리 병원 식구하고만 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매형, 친구 놈들이 개강하기 전에 놀러가자는 것도 거절했어요. 저 잘했죠? 셋째 매형한테도 말씀 드렸어요.)

손일석까지?

그래! 잘했다! 훌륭하다.

처남까지 발목을 잡다니 정말 피를 나눈 식구가 됐다. 천만다행 손일석과 함께 1박 2일 동안 의료 봉사만 하면 남은 시간은 자유였다.

‘일석이랑 같이 가는 휴가도 괜찮지. 경아 씨하고 경희가 작전 잘 짜야 할 텐데. 참! 훈철이 형도 승희 성화에 휴가 같이 간다고 했잖아? 어떻게 하지?’

의사 삼촌하고 꼭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단다. 의사 되고 싶다는 꿈을 아직도 간직하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시간이 갈수록 싱숭생숭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마음 다잡고 긴장하려 애썼다.

하윤호 교수가 단 한 명이라도 환자를 적게 보려면 누군가가 더 노력해야 한다. 당장 눈에 안 보인다고 해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말려 죽이자.’

될지 안 될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어느새 카르페 디엠을 능가하는 모토가 됐다. 휴가인 줄도 모르고 내원한 하윤호 환자를 싹 다 잡아 정성을 다해 치료했다.

“다음에 시간이 안 맞으시면 저한테 오셔도 됩니다.”

환자의 만족도는 충분한 설명만이 아니라 정성 깃든 손 역시 매우 중요하다. 소독약만 바른다고 드레싱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환자의 표정을 보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월요일 아침.

강병옥이 휴가에서 돌아왔다.

“잘 다녀왔어?”

“예, 잘 다녀왔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목소리도, 얼굴 표정도 예전과 다름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회진 돌자.”

환자 파악도 확실했다.

혼날 때 혼나더라도 일과 감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직위를 떠나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생각과 달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생각 많이 한 것 같은데 아직은 두고 봐야겠지. 그나저나 하윤호 교수도 휴가 끝이네. 보기 싫은 놈.’

생각만 하면 안 된다. 말려 죽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하는 것이 마땅했다.

“하윤호 교수 당직 날이라고 해도 일과 시간에 1초라도 걸리면 나한테 노티 해. 내가 없으면 신현수나 이경석 선생님한테 바로 연락해.”

3년차들에게 단단히 당부를 하고 외래로 향하던 김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입원 환자도 없는데 왜 올라왔을까?’

복도 한쪽에서 하윤호 교수가 박승준 교수와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 교수, 평소처럼 행동하고 앞으로는 책잡힐 일 없도록 확실하게 해. 펠로우 눈치까지 봐야 해? 나도 내 코가 석 자야. 명심해.”

“죄송합니다. 이번만 중재 좀 잘해 주십시오. 병옥이하고 저랑 어떤 사이인지 아시잖아요. 아끼는 마음에 흥분한 것 갖고 김지훈이 너무 앞서 나가네요.”

“병옥이는 괜찮아?”

“휴가라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근간에 시간 내서 오해 풀 생각입니다. 똑똑한 놈이니까 얘기하면 금방 알아들을 겁니다.”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옮기던 김지훈이 하윤호 교수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씨익 웃으며 반가운 척까지 했다.

“회진 끝났어?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이 했지?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처했어. 다시 한 번 사과할 테니까 싹 잊고 잘해보자.”

‘김지훈, 나도 여기까지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이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철저한 무시가 답이다.

‘정말 징그러운 인간이다.’

김지훈이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쳤다.

박승준 교수가 급히 손을 흔들었다.

“김지훈 선생, 나도 얘기 들었어. 틀린 말 한 것은 아니지만 오해도 있는 것 같아. 어차피 한 식구인데 얼굴 찌푸리면서 일할 수는 없잖아. 하 교수 말대로 안 좋은 일은 잊고 좋은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자.”

하윤호 교수와의 일을 정확하게 알고는 있을까?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박승준 교수의 말도 귓등으로 흘렸다. 다른 점이 무수하게 많은데도 하윤호 교수와 별반 다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감쌀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외래 환자가 있어서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김지훈이 살짝 고개만 숙이고는 냉정한 얼굴로 돌아섰다.

티가 나도 너무 났다.

박승준 교수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하윤호 교수는 이를 악물었다. 잠시 후 회진을 끝낸 지동훈 교수가 상황을 알고는 얼굴을 굳혔다.

‘이젠 내 말에 귀조차 기울이지 않으시는 걸까?’

진료실로 들어간 김지훈이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답답해 할 이유가 없었다.

하윤호 교수는 머릿속에 단단히 담고 칼을 갈며 기다려야 한다. 다시는 강병옥과 있었던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후배들에게 신경 쓰는 것이 맞았다.

아침부터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을 정면으로 마주 했다. 감명 깊게 본 영화 플래툰의 마지막 장면처럼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소리 없는 표호를 질렀다.

‘XXX! XXXXX!’

때론 거나한 욕도 필요한 모양이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일에 집중하며 강병옥에게 신경 바짝 썼다. 입보다는 행동으로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환자를 볼 때마다 더욱 정성을 쏟았다. 그들의 웃음을 보며 조금이라도 더 가슴에 와닿기를 바랐다.

하윤호 교수의 수술이 무려 세 건이나 벌어질 뻔했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재빨리 노티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수술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건만 막을 수 있었다.

결국 정규 수술로 미니콜레 하나, 응급으로 아뻬 한 개를 했다. 미니콜레를 들어간 이혁원이 3시간 만에 나와 헉헉거렸다. 아뻬를 들어간 나종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냇가에서 뛰어 노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불안했다.

“문제없었어?”

“다행히 아뻬 환자는 문제없는데 미니콜레 환자는 이삼 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환자 잘 보고 너희들 선에서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 병옥이는 어때?”

“전보다 환자에게 신경을 더 쓰는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어째 반응이 전하고는 다르네.’

김지훈이 내심 기대를 가졌다.

하윤호 교수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을 교수들이 모를 리 없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준영 교수는 도리어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 또 있었어?”

“별일 없었습니다. 시행착오 끝에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괜찮겠어?”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속마음을 쉽사리 드러내는 스승이 아니었다.

‘스승님도 점점 약해지시나? 아니면 교수가 된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실까? 설마 나이 때문은 아니시겠지?’

절대 그럴 리 없다.

지금도 스승은 음성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 모습, 그 눈빛, 그 표정 그대로였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준영 교수가 조용히 말했다.

“내년에도 같이 가는 건 힘들다고 했다.”

“선생님, 힘든 정도가 아닙니다.”

“알았다.”

선문답 같은 대화가 오고갔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이준영 교수의 말 속에는 분명 교수들의 생각까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렇게 또 한 주가 지나고 주말이 왔다.

이준영 교수가 휴가를 앞두었다.

김지훈이 쪼르르 외래로 달려갔다.

“환자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다녀오십시오. 그런데 혁원이도 오늘부터 휴가네요?”

가족끼리 휴가를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준영 교수와 이혁원의 휴가가 겹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스윽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썼다.

무지하게 격한 반응이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쑥스러워하시기는. 혁원이 그 자식도 혼자 가는 게 좋을 텐데 은근히 입이 찢어진 것 같아.’

“문제는요.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좋은 일 아닙니까?”

김지훈의 대범함에 이준영 교수도 한발 물러섰다.

“쓸데없는 말하지 말고 환자 잘 봐.”

“예. 확실하게 보겠습니다.”

스승의 환자는 당연히 제자가 봐야 한다. 이런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면 도리어 화가 날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이 하나 더 있었다.

“선생님, 제가 다음 주 휴가 가는데 이번 주에 전보다 환자를 더 많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 보셔야 할 환자가 생각보다 많으실 수 있습니다.”

휴가 직전에는 환자를 조절할 수밖에 없다.

급하지 않은 환자는 휴가 후에 치료하는 것이 안전했다. 하지만 진료를 미루다 보면 자칫 하윤호 교수에게 수술이 잡힐 위험이 있었다.

그럴 여지를 애초에 차단하겠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환자를 하윤호에게 맡길 수도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컨설트도 막아달라고 하더니 하윤호를 아예 말려 죽일 작정이구나?’

가능하다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슬쩍 말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책임져야 할 파트가 또 있다.

“김지훈, 마음 놓고 다녀와도 되지?”

“예. 선생님. 혹시 컨설트 오면 어떻게 할까요?”

“나 휴가야. 너 괜히 트레이닝 시킨 거 아니다. 신현수하고 환자 똑바로 봐.”

신기동 교수의 얼굴에 신뢰가 뚝뚝 묻어났다.

불과 일주일이지만 혈관 수술까지 도맡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일복 제대로 왕창 터진다고 해도 만세 소리가 절로 나올 상황이었다.

‘만세! 카르페 디엠! 일석아, 미안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차트를 펼쳤다.

어차피 주말 당직이기에 퇴근이 늦었다고 핀잔받을 일도 없었다. 고경아는 당연히 응급실 환자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참 차트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지훈아. 어디 있어?”

신현수는 당직도 아닌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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