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제자리로. (2)
김지훈이 의국을 찾았다.
이혁원, 나종진과 마주 앉았다.
“혁원아, 종진아, 병옥이가 잘 알아들었겠지?”
“선생님께 벌써 세 번째 지적을 받았습니다. 사안은 달라도 말씀하신 이유는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알아들었을 겁니다.”
“혼내진 않았어?”
“화가 나긴 나는데 이번 일만큼은 스스로 느껴야 하는 일 아닐까요? 솔직히 하윤호 교수님 문제가 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식! 너도 욱하는 성질이 있다고 들었는데 다들 잘못 본 모양이다. 그래. 병옥이보다 하윤호가 더 문제지.’
“그랬으면 좋겠네. 혁원아, 미안한 일이 하나 있다.”
“미안한 일이라니요?”
“앞으로 하윤호 교수 수술 절대 안 들어가기로 했다.”
이혁원이 흠칫 놀랐다.
‘지금 하윤호 교수라고 하셨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니 정말 제대로 붙으신 모양이네. 어쩐지 의국까지 찾아와 사과를 할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다 했어.’
“왜 놀라? 힘들 것 같아서 그래?”
“절대 아닙니다. 교수님이 아니라 그냥 교수라고 하셔서···. 그건 그렇고 당연히 그러셔야죠. 애초부터 선생님이 퍼스트를 선 게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마무리하겠습니다.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기회?”
“실력 팍팍 늘 기회요.”
누구 닮았는지 상당히 긍정적이다.
나종진도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엉망인 수술을 마무리하다 보면 그 자체로도 실력이 늘 것이다. 대신 욕은 욕대로 먹고 속은 시커메질 정도로 많이 썩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 앞으로 하윤호 교수 앞으로 응급 수술 잡히면 어떤 수술이든 나한테도 노티해. 내가 없으면 신현수 선생이나 이경석 선생님한테 노티하고 문제 생기면 바로 말해. 어쨌든 너희들은 전공의고 하윤호 교수도 교수다.”
후배들에게 위안을 얻었지만 다소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일과를 마쳤다.
무척 피곤한 하루였다.
이혁원이 슬며시 김지훈의 눈치를 보았다.
상당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오늘 오프시죠? 저하고 종진이도 오프입니다. 진우도 오프네요. 기분도 꿀꿀한데 맥주 한잔 어떠십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간단하게 한잔하고 푹 자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김지훈이 입술을 쑥 내밀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까마득하게 높은 산 하나를 넘어야 한다.
“잠깐 기다려 봐.”
고경아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말했다.
(하윤호 교수님 문제가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닌데 10시까지 들어와요.)
(경아 씨,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맥주집 가는 시간에다 집에 가는 시간까지 하면······.)
(10시 반.)
딱 그 말 한마디였다.
이럴 땐 반항해야 봐야 시간만 단축된다.
내리라고 있는 게 바로 꼬리다.
깨갱! 깨갱!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의 목소리에 힘이 팍 실렸다.
“혁원아, 바로 집합.”
송진우가 불타는 고구마로 변하며 땅을 쳤다. 술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자리였다. 순간 몰려오는 후회에 몸부림을 쳤다.
왜 당직을 일부러 바꿔줬을까?
그래도 입은 웃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지만 강병옥이 오프 갔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지금도 소중한 동료였기 때문이었다.
“진우야, 환자 잘 봐라.”
김지훈이 답답함을 훌훌 털어냈다.
강병옥이 마음에 걸렸지만 자숙하고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남은 사람은 즐길 때 즐겨야 다음 날 살아갈 힘을 얻는 법이다.
한 잔 두 잔 맥주가 사라졌다.
이혁원이 열변을 토하고 나종진은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그동안 한두 사람이 스트레스 받은 것이 아니었다. 이참에 안주 삼아 시원하게 쏟아내도 좋을 것이다.
“선생님, 진우 그 자식이 당직을 바꿔준 것 같습니다. 에휴! 진우 때문이라도 이번에는 정신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비 온 뒤에 땅 굳는다잖아. 병옥이를 믿자. 하윤호는 내가 기필코 말려···. 아니다. 마시자.”
어느새 11시다!
술자리가 으레 그렇듯 오늘도 늦었다.
후배들이 사준 길거리 표 장미 한 다발을 들고서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렸다. 하마터면 토할 뻔 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늦었는데 살 수 있을까?
다음 날 신현수, 이경석과 함께 대책을 상의했다.
“나 참! 병옥이한테 책임을 전가했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교수라고 부를 수도 없네.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거 아냐?”
신현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석이 형, 수술 중에 벌어진 일이 문제 제기할 수 있는 이유가 될까요? 지훈이 덕분이긴 하지만 하윤호 교수도 어떻게든 해결했겠죠.”
“배 활짝 열면 누가 해결 못하겠어?”
“그게 문제죠. 결국 책임 전가만 남는데 말만 했지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잖아요. 흥분해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라고 하면 대부분 수긍할 겁니다. 결국 결정적인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이대로 지나가서는 안 되는데 답답하네요.”
모두들 심각한 안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결론을 내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현실적인 제약이 뒤따르더라도 하윤호 교수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명확했다.
“현수야, 어쨌든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미안하지만 아버님께 말씀드렸으면 좋겠다. 병원 행정이나 인사 관리 문제는 우리가 잘 모르니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알았어. 당장 하윤호 교수를 자를 방법은 없지만 내년 2월에 인사 위원회가 열린다니까 미리 준비하자. 아버님은 이미 어느 정도 알고 계시고 이사님들께도 최대한 말씀을 드릴 게. 인사 위원회가 독립적이라지만 경영진 의견을 무시하지는 못할 거야.”
역시 이사장 아들이다.
“경석이 형, 과장님과 교수님들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언제가 좋을까요?”
“현수 네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러네. 휴가는 마음 편하게 가셔야 하지 않겠어? 이리저리 말 나올 수도 있는데 이왕이면 4년차 손 놓은 다음에 자리를 갖자. 현수야, 박승준 선생님은 그렇다고 쳐도 지동훈 교수님은 어떻게 하지? 이 상황을 말해도 될까?”
“신중해야 할 것 같아요. 형 말대로 하면 한 달 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두고 보면서 결정하죠. 아마 하윤호 교수가 벌써 말했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겠죠.”
하윤호 교수에 대한 불신이 신임 교수 전체로 번졌다. 다들 지동훈 교수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신현수조차 일말의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모두들 얼굴을 펴지 못했다.
같은 과 교수의 옷을 벗겨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는 자체로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력은 물론 인성과 품성 모두 바닥인 하윤호 교수가 직위를 유지한다면 일반외과를 흙탕물 아니 똥통으로 만들 것이다.
“지훈아, 어쨌든 네가 고생이 많다. 수술 안 들어간다고 해도 하윤호 교수에게 오는 환자를 막을 수도 없고 문제네. 좋은 방법 없을까?”
김지훈이 얼굴을 굳혔다.
“말려 죽일 겁니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흠칫 놀랐다.
“말려 죽인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의사가 환자 없으면 말라 죽는 거 아닙니까? 환자한테 최대한 집중해서 하윤호에게는 진료 받을 생각조차 안 나게 노력할 생각이에요. 현수야, 이왕 아버님께 말씀드리는데 원무과에도 가급적이면 나나 이준영 선생님께 접수시켜 달라고 말 좀 해줘. 경석이 형, 내과 펠로우들에게 슬쩍 알려주세요. 하윤호가 어떤 인간인지 알면 분명 컨설트도 쉽게 나오지 않을 겁니다.”
이 정도로 독한 김지훈이 아니었다.
다들 다소 놀란 눈치였다.
김지훈이 크게 기지개를 폈다.
“현수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얼굴 펴자. 우리만이 아니라 과 전체를 위한 일이잖아. 제 2의 금경태를 볼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준영 선생님께는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어. 우리가 모르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파트 주임교수시잖아.”
잠시 고민하던 신현수와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혁민 교수만큼 신중하고 속이 깊은 이준영 교수야말로 가장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김지훈의 스승이니 당연히 먼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맞았다.
“지훈아, 병옥이 집도는 언제까지 금지야?”
“우리 중 한 명이라도 병옥이가 변했다고 인정하면 그때 주기로 하죠. 하윤호는 당분간 수술 줄 생각 자체를 못하겠지만 박승준 선생님이 문제네요.”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잖아. 기분 정말 안 좋지만 병옥이에 관한 일만은 독하게 마음먹자. 가장 기대 했던 놈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음 날 이준영 교수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다.
꾹 다문 입술과 누군가를 쏘아 보는 것 같은 눈빛.
살짝 떨리는 두 주먹까지.
이준영 교수의 분노가 보였다.
그런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지훈아, 네 마음은 알지만 실력 부족과 책임 전가 정도로는 징계 사유가 되기 힘들어. 만일 무리하게 징계를 요구한다면 나만이 아니라 너까지 위원회에 참석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 그건 네 앞날에 조금도 도움이 되질 않아.’
현실의 눈은 이상과 다르다.
지금까지 동료 의사의 징계를 요구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중앙 의료원 원장의 조카라는 점만이 아니라 같은 교수라는 사실 자체가 징계를 요구한 사람에게 또 다른 피해를 안겨줄 수 있다.
내부 고발? 혹은 배신자?
누군가는 그런 시각을 갖기 마련이다. 어쩌면 동료의 징계를 주도했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평생 김지훈을 뒤따라 다닐 수도 있었다. 전후사정을 모르거나 어설프게 알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이준영 교수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답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신현수와 대화를 하며 현실의 벽이 얼마나 두터운지 느꼈다. 스승이라면 방법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 탓이기도 했다.
“스승님, 정말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겁니까? 혹시 징계위원회를 열 방법은 없는 겁니까?”
“교수 해임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스스로 나가지 않는 한 이사장님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으로 하윤호 수술 안 들어가겠다고?”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예.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후배들에게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문제는 네게 맡길 테니 하윤호는 내게 맡겨.”
“스승님!”
단 한마디였지만 강한 반발이었다.
스승에게 모든 문제를 미룰 수 없다는 각오였다.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쉬며 창가에 섰다.
‘이제는 혼자서도 충분히 이겨내겠구나. 지훈아, 너도 알겠지만 세상은 단순하지 않아. 하윤호 따위 때문에 네가 피해를 보면 안 돼. 길어야 육 개월이다. 긴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짧은 시간이야.’
김지훈의 들썩이는 어깨가 보이는 것 같았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성격이지만 혈기왕성한 나이다. 명예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전공의였다면 따끔한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지훈은 이제 어엿한 교수다.
“내 동의 없이는 함부로 행동하지 마. 앞으로 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 지 함께 상의하자.”
허락이나 오더(order)가 아니다.
동의와 상의다.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인정받는다는 기쁨보다 무거움이 앞섰다.
스승이기에 더 분노하고 더 힘들 것이란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김지훈, 자신은 생각하지도 못한 많은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묵묵히 지켜보고 있지만 한 번 움직이면 태풍처럼 몰아칠 스승이었다. 제자로서 무조건 믿고 따를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스승이었다.
하윤호 교수는 반드시 스스로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
문득 그간 하윤호 교수 환자가 적은 이유 중 하나가 스승의 입김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뭔데?”
“컨설트를 막아 주십시오.”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씰룩였다.
‘환자와 수술을 최대한 막고 싶다?’
“하윤호는 내게 맡기라고 했잖아.”
어떤 말보다도 강한 동의였다.
그날 오후 이준영 교수가 하윤호 교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한마디를 던졌다. 김지훈이 눈앞에 있는 자리였다.
“하 교수, 당신 교수야. 똑바로 해.”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답 대신 단호한 눈빛만 던졌다.
김지훈의 표정은 서늘했다.
섬뜩한 느낌에 하윤호 교수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쓰다듬던 하윤호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지훈, 너 이 새끼 설마 어제 일을 말한 거야?’
두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았다.
김지훈에 대한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알 길이 없었다.
휴가 직전에는 가능한 한 진료나 수술을 휴가 후로 조절하는 것이 원칙이다. 며칠 동안 아무 일 없이 시간만 죽이던 하윤호 교수가 휴가를 갔다.
이런 원칙은 잘도 지켰다.
한 주 동안 입원하고 수술한 환자 리스트를 보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원장 직을 수행하는 송재덕 교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수들이 이번 주도 바쁘게 살았다. 이경석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단 한 명만 예외였다.
‘휴가 핑계로 환자를 거의 안 봤네. 월급 받기 창피하지도 않은가?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네.’
월급?
통장으로 자동 이체가 시행된 후 한 번도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게다가 수술마다 소정의 수당이 붙는다. 응급 수술은 당연히 액수가 조금 더 많다.
‘통장 보자고 하면 눈총 맞겠지? 무리하게 덤비는 것 보다는 용돈 인상이 최선이야. 최소한 물가만큼은 올라야지 일 년 반 동안 동결이 말이 돼?’
김지훈의 관심이 급격하게 용돈으로 옮겨졌다.
비자금 정도는 있어야 유부남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역시 자기 자신의 문제가 가장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