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마음먹기 나름. (1)
한 잔의 술이 돌았다.
“우리 신임 교수들하고 펠로우들이 같이 있으니까 보기 좋네. 아! 이제는 신임도 아니지. 자네가 김지훈 선생이지?”
“예. 김지훈입니다.”
“그래. 말 많이 듣고 있어. 우리 하 교수가 볼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사람 관계라는 게 처음에는 서먹하지만 시간 지나면 좋아지기 마련이야. 그때까지는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서로를 잘 아는 게 먼저야.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를 수밖에 없잖아. 무슨 소리인지 알지?”
“예. 선생님.”
하성원 원장이 술을 권했다.
“한 잔 마셔. 이렇게 보니까 일반 외과가 이제 틀이 딱 잡혀가는 것 같네. 내 지론이 어느 과든 제대로 뭉쳐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실력 있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대우받고 누구보다도 빨리 발전할 수 있는 거지.”
박승준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원장님, 우리끼리 있는 자리입니다. 심각한 얘기는 다음에 하시죠.”
하성원 원장이 손을 저었다.
“이럴 때 말고 네가 언제 자네들을 볼 수 있겠어? 어려워하지 말고 커피 한 잔 할 겸 원장실에 자주 놀러와. 내 자네들 중간 평가 보니까 아주 흡족해서 하는 말이야. 전에도 말했지만 스스로 탄탄한 실력을 가져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지 않겠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처럼만 해. 그러면 별 문제 없어. 김지훈 선생 그리고 자네가······.”
“이경석입니다.”
“그래. 이경석 선생. 하여튼 자네들도 내년에 전임돼야 하잖아? 이젠 인사관리가 엄격해진데다 각 과에 배치된 펠로우들이 많아서 예전처럼 쉽지가 않아. 교수들 중 일부가 찬성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도 아니고 말이야.”
이경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야. 펠로우는 전임과 상당히 달라. 누구 한 명 반대하거나 결격 사유가 있다면 안 된다는 말이지. 자네들이야 실력이 있다고 들었으니까 원만하게 지내기만 하면 걱정할 일이 없겠지?”
하성원 원장이 스윽 김지훈에게 눈길을 주다 말고 갑자기 손뼉을 쳤다.
“어이쿠! 시간을 너무 뺏었네. 박 교수, 우리 펠로우들 전임 문제없도록 해야 돼. 지 교수하고 하 교수 의견도 무척 중요하니까 미리미리 다른 말 나오지 않도록 분위기 잘 이끌어. 펠로우 선생들 정말 아까운 사람들이야. 김지훈 선생,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것 말고도 중요한 요인이 많아. 내 말 잘 기억해. 다 자네한테 득이 되는 일이야.”
하성원 원장이 나가자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몇 마디 들었을 뿐이었다.
이준영 교수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다면 피가 되고 살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찜찜했다.
몇몇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제대로 뭉쳐라.
엄격해진 인사관리와 단 한 명의 반대라도.
실력 이외에 중요한 요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순수하게 펠로우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순조롭게 전임이 돼 병원 생활을 하려면 신임 교수들에게 잘 보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내가 너무 확대해석하는 건가?’
“김지훈 선생, 뭐해? 술 한 잔 하자.”
박승준 교수가 목소리를 높이며 술잔을 내밀었다.
친근한 미소를 보였지만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원장님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야.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사람 관계잖아. 마음에 안 드는 면이 있다고 해도 따르다 보면 언젠가는 득이 되는 게 세상이잖아.”
말이 묘하다.
가장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지동훈 교수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술잔만 기울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순간 술 마실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건 줄 서라는 말이야. 라인? 파벌? 안 돼. 성급한 판단이라도 그런 일은 무조건 막아야 해. 오늘 들은 말들 잊어먹기 전에 현수하고 얘기해 봐야겠다.’
무작정 일이 있다고 일어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눈치채지 못하게 술잔을 만지작거리다 전화 온 척을 했다.
“선생님, 잠깐 전화 받고 오겠습니다.”
급히 신현수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응급실이었다.
(현수야. 할 말이 있어. 지금 병원으로 갈 테니까 만약 나 찾는 전화 오면 네가 불렀다고 해야 한다. 알았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 헤모뻬리(혈복막) 떠서 바로 수술 들어가야 돼.)
(그래? 더 잘됐다. 나도 수술실로 갈게.)
박승준 교수에게 양해 아닌 양해를 구했다.
무슨 소리냐며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지동훈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정말 좋지 않았다.
김지훈이 이경석에게 눈길을 주었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잘됐다는 얼굴이었다.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지동훈 선생님도 우리가 중간에 나와서 기분 나쁘다는 걸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은 나오지 않게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현수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경석은 술 냄새 때문에 휴게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술실에 들어간 김에 참관을 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신현수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눈에 보일 정도로 열정적이네. 이 모습이 진짜일까? 아니면 냉철한 신현수가 진짜일까? 별 게 다 헷갈리네.’
수술이 끝난 후 펠로우 세 명이 또 머리를 맞댔다.
실력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그 외의 일로 이렇게 자주 모이는 것도 피곤했다. 하지만 결코 등한시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많은 말들이 오고갔다.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라인을 만들 조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훈아,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라인이라는 것이 한 번 만들어지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는 걸 넌 이미 처절하게 경험했잖아. 그 전에 대책을 세워야지.”
자리를 만든 김지훈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일반외과를 통째로 흔들어 버릴 수 있는 문제였다. 이경석이 답답한 목소리로 재촉했지만 정말 신중해야 했다.
“답답하네. 뭐하고 말 좀 해봐.”
때론 상대방 입장에 서 보는 것도 필요했다.
“형, 혹시 다른 사람 눈에 우리도 일종의 파벌과 라인을 만든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그랬으면 벌써 말이 나왔지.”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교수님들은 물론 우리도 원칙대로 행동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신임 교수님들을 억지로 배제한다면 거꾸로 우리가 파벌을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어요.”
“원칙을 지키면 된다?”
“그렇죠. 환자와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면 진심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반대라면 옷 벗을 각오하고 싸워야죠. 하성원 원장님이 뒤에 있으니까 그 정도 각오는 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신현수가 눈빛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이 네 말이 맞아. 조짐일 수도 있지만 이제 처음 나온 말을 두고 들쑤시는 것도 좋은 대처는 아니야. 냉정하게 보고 판단하자. 만일 문제가 생기면 창피한 일이지만 이사장님께도 말씀 드릴게.”
아버지가 아니라 이사장이었다.
그만큼 사안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한동안 대화가 이어졌지만 김지훈이 제시한 의견 이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금경태의 일로 너무 민감해 혹시 오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은 교수들에게 말하기도 이르다는 결론까지 내렸다.
신현수가 이경석을 보았다.
“형, 지동훈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별 소리 없었다. 나올 때 기분 나쁜 표정은 짓더라.”
“누구한테요?”
이경석과 김지훈이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지동훈 교수를 가장 잘 아는 신현수의 물음이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눈길이 누구를 향해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상황을 생각해 보면 애초에 라인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지훈아, 다른 교수는 몰라도 지동훈 선생님에 대한 판단은 정말 신중했으면 좋겠어.”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며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에 와 사람 어렵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진짜 옷 벗으면 가만 안 둔다. 경석이 형도 마찬가지에요.”
지금 신현수가 협박을?
심각한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박승준 교수의 웃음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지동훈 교수는 술자리 이후 도리어 말이 없었다. 찝찝한 날이 지나가는 가운데 하윤호 교수의 수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미안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퍼스트를 서 달라고 했다.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며 대처 방안을 강구했는데도 말이 안 나왔다. 홀로 연구실에 앉아 고민에 잠겼던 김지훈이 갑자기 손뼉을 딱딱 쳤다.
결론을 내렸다.
라인이라는 말까지 나온 마당이었다. 미적거리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환자를 위해 퍼스트를 선다는 생각은 맞을지 몰라도 최선의 답이 아니었다.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생각할 때가 아니야. 수술 중 문제가 되는 부분은 확실하게 지적하자. 이번에도 마무리를 내게 맡긴다면 명확하게 거부해야 돼. 실력이 없다면 스스로 그만 두는 것이 맞아.’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윤호 교수의 반응에 따라서는 수술 도중 나와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이혁원이 있다. 뒤를 받쳐 준다면 최소한 환자에게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혁원아,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줬으면 좋겠다. 만약 후배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그땐 공론화 시켜서라도 옷 벗게 하는 수밖에 없겠지.’
전임 강사와 시간 강사와의 싸움이다.
명백한 잘못이 없는 한 누가 더 피해를 볼지는 분명했지만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환자만이 아니라 일반 외과 구성원을 위해서라도 나서야 할 때였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일이 최고다.
‘오늘 스승님이 담낭농증을 라파로로 하시는 날이구나. 잘됐다. 치프한테 눈총 받더라도 퍼스트 서면서 미진한 부분을 배워야겠다.’
수술 준비를 마쳤다.
역시 4년차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세컨을 자청했던 이혁원이 뭐라고 중얼거리며 써드 자리에 섰다. 후배들 때문에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이럴 때는 모른 척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참관을 들어온 송진우만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진우도 들어왔는데 병옥이 이 자식은 뭐하고 있는 거야?’
이준영 교수가 들어왔다.
힐끗 김지훈을 보고는 조용히 집도의 자리를 가리켰다. 담낭염이 아니고 담낭농증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을 잘 해냈다고 해도 일천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었다.
솔직히 의외였다.
‘이 수술은 스승님이 하시는 걸 봐야 하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후우! 떨리네.’
“뭐해? 안 할 거야?”
스승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났다.
얼마 전 앞으로 담낭농증과 담도 담석증 수술을 모두 하라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을 책임지는 것이다. 환자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가르칠 부분이 남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가슴이 먹먹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술이 시작됐다.
제자는 집도하고 스승은 말없이 퍼스트를 섰다.
어느 틈엔가 전공의 때로 돌아갔다. 은근한 긴장과 함께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평생 가르침을 구해야 할 스승 앞에서 수술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스승은 말이 없었다.
결코 쉽지 않은 수술이다. 그런데 수술 팀의 긴장 속에서 편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스스로를 책임지는 김지훈과 제자를 신뢰하는 이준영 교수의 힘이었다.
3시간 30분 만에 수술이 끝났다.
전보다 상당한 시간을 단축했다.
이준영 교수가 조용히 김지훈을 보았다.
‘이제는 지적할 사항이 거의 없네. 잘했다. 하윤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지금보다 편할 때가 없는 것이 세상이야. 네 생각과 결심대로 잘 헤쳐나가길 바란다.’
교수들도 하윤호 교수 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결정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당장은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미안한 감정이 이준영 교수의 눈가를 스쳤다.
“수고했어. 잘했다.”
스승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할 것 같았다.
김지훈은 한 마리 고래였다.
공연히 어깨가 으쓱해진 김지훈이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환자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오래간만에 스승과 수술을 했기 때문일까?
지난 기억이 마구 떠올랐다.
새카맣게 탔어도 언제나 즐거움으로 남아있었다.
‘스승님과 수술할 때는 퍼스트를 서기만 해도 즐거운데 하윤호 교수는 정말 갑갑하네. 가만, 퍼스트? 집도의?’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번뜩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