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조짐. (2)
눈부신 햇살에 눈을 떴다.
손일석이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고경아와 고경희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춧가루 팍팍 뿌린 뻘건 콩나물국을 내왔다. 땀 한 사발 흘리고 다시 쓰러졌다. 일요일 대낮을 그렇게 보냈다.
손일석의 복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슬슬 회복 신호가 전해졌다.
끙 소리를 내며 집을 나서 조금 이른 저녁을 함께 먹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차에 시동을 걸던 손일석이 슬그머니 고경아를 보며 눈짓을 했다.
“지훈아, 내가 간 뒤에 별일 없겠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그렇게 사는 남자 아니다. 내가 꽉 잡고 살아. 인마.”
“손 떨지 말고 말해야 신뢰가 가지. 나 봐. 경희 앞에서 얼마나 당당해? 하여튼 오늘 밤 제수 아니 형수한테 충성하고 다음에 또 보자. 어쩌면 생각보다 자주 볼 수도 있어.”
“넌 눈이 떨려. 인마. 주말마다 외박 나와?”
“위수 지역 때문에 여기까지 못 와서 그렇지 외박은 일상이야. 괜히 수통(수도 통합 병원) 간 줄 알아? 잘 있어. 또 연락할게.”
손일석이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군대 간 놈이 자주 나와 봐야 그게 그거지.’
“하윤호 문제 잘 대처해라. 수틀리면 들이 박아도 좋은데 주먹은 절대 쓰지 마. 형이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그 정도는 입으로 해결할 내공이 있잖아.”
“주먹? 애들이냐?”
김지훈이 피식 웃자 손일석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지훈아, 내가 비록 군의관이지만 육군 대위라는 걸 잊지 않고 생활하기위해 애쓰고 있어. 욕먹는 것도 싫지만 어쨌든 자리가 주는 책임이 있잖아. 계급장 달았다고 다 장교는 아니더라. 누가 뭐라고 해도 넌 진짜 교수야. 나 손일석이 보증한다.”
묘한 여운을 주는 말이었다.
‘그래. 나도 교수라는 명찰 달았다고 모두다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네 말대로 진짜 교수가 되기 위해 나도 노력할게. 자식! 항상 고맙다.’
고경희가 나왔다.
손일석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한참동안 둘 만의 대화가 오고갔다. 얘기가 잘 오고갔는지 방정맞게 손을 흔든 손일석이 시동을 걸었다.
“진짜 간다. 지훈아, 조만간 또 보자.”
배울 건 배워야 한다. 아니,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부르릉 차 소리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김지훈이 쪼르르 고경아에게 달려갔다.
“경아 씨, 우리 둘이 커피 마시러 갈까요?”
“이 밤에 무슨 커피?”
예상한 대로 말이 짧다.
“아! 남편이 데이트하자는데 왜 이러실까? 갑시다. 경희야, 일석이 없다고 울지 말고 집 잘 봐.”
김지훈이 두 손 곱게 모으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것이 바로 유부남이 반드시 갖춰야 할 기본자세다. 물론 생각보다 의외로 힘든 일이긴 하다.
커피 한 잔으로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일까?
이슬은 이슬을 부르는 모양이다.
월요일 일과가 끝날 무렵 박승준 교수가 찾아왔다.
“김지훈 선생, 잠깐 얘기 좀 하자. 우리끼리 술 한잔 했으면 하는데 혹시 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 신현수 선생 당직 날이지만 지 교수가 따로 자리를 만들 거야. 일단 네 명만 모이자.”
“네 명이요?”
“오래 간만에 갖는 자린데 지 교수하고 이경석 선생도 같이 보는 게 좋지 않겠어?”
가끔 간단하게 식사는 같이 했지만 술자리는 정말 드물었다. 지난 두 건의 수술 때문에 쌓였을지 모를 불만이나 앙금을 풀자는 말로 들렸다.
신현수가 마음에 걸렸지만 반대로 하윤호 교수가 빠졌다. 겸사겸사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낼 기회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환영할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이경석 선생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직접 말할게. 시간 있지?”
“예. 특별한 일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저녁에 보자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김지훈이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손일석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박승준 교수가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그 때문인지 교수라는 직위가 주는 책임과 의무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내일은 내일이다.
일단 당직에 집중할 때였다.
이놈의 일복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수술은 안 떴지만 응급실이 아수라장이었다. 결국 응급실로 불려나가 상황을 정리해야 했지만 그래도 손이 부족했다. 신현수까지 나와 땀을 쏟았다.
“지훈아, 네 당직 날 우리 과 환자 한 명도 없이 응급실 끌려나온 게 도대체 몇 번째인 줄 알아? 일복 터진 건 알았지만 점점 심해진다.”
“나도 이런 날은 정말 힘들다. 솔직히 쉬고 싶어. 가끔은 홍재순 선생님처럼 일복 없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다니까.”
신현수가 갑자기 웃었다.
“하윤호 교수가 부러운 건 아니지?”
생각해 보니 천만다행이었다. 최근 들어 외래 환자와 정규 수술이 아주 조금씩 눈에 안 띄게 늘고 있지만 당직 날은 정말 고요했다.
홍재순을 가볍게 제치는 휴식 복이었다.
“어휴! 말도 꺼내지 마. 한 명이라도 오면 골치 아파진다.”
부르르 어깨를 떨던 김지훈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박승준 선생님 시간이 내일 밖에 없다고 하지만 개운한 말은 아니네. 둘만 따로 부르는 이유가 있을까? 신임 교수님들 생각만 하면 머리가 복잡해져서 골치만 아프네.’
박승준 교수와 술자리를 잡았다는 말에 신현수가 턱을 괴며 묘한 소리를 냈다.
마음이 편치는 않은 모양이었다.
“지동훈 선생님께 들었어. 하윤호 교수는 안 나온다니까 어떻게 보면 다행이야. 이번 기회에 지동훈 선생님과 더 친해지면 좋겠다.”
다소 의외의 말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지동훈 교수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침착한 성격에 수술 잘한다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알았어. 하필이면 네 당직 날 술자리를 잡냐. 아무튼 분위기 봐서 하윤호 교수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야.”
“너무 대놓고 말하지는 마. 박승준 선생님은 지동훈 선생님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다르다는 거 알잖아.”
“그렇긴 해. 서로서로 믿고 살면 아무 문제없을 텐데 은근히 힘들다. 에이! 최소한 실력은 갖춰야지.”
그때 전화벨이 또 울렸다.
따르르릉!
나종진이었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응급실로 나가 손을 보탰다. 단 한 건의 수술도 없이 새벽까지 병원을 나서지 못한 날도 간만이었다. 뿌듯함만큼 피곤한 날이었다.
다음 날 복강경 수술을 두 건 했다.
갈수록 익숙해지며 수월해지는 수술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특히 한 건은 여러 문제가 겹쳐 개복과 복강경 사이에서 고민했었는데 무사히 끝나 기분이 붕 떴다.
저녁 어스름이 다가올 때쯤 약속 장소로 나갔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근사한 일식집이다.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가 이미 나와 있었다. 근래 얼굴이 조금은 어두웠던 지동훈 교수의 표정이 상당히 밝았다. 가벼운 대화와 함께 몇 잔의 술잔이 돌았다.
“서로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여러 가지 일이 많았네. 하나하나 따지면 할 말이 많겠지만 이해해 주길 바라. 김지훈 선생, 혹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이참에 터놓고 얘기해 줘. 그런 게 있나?”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경석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하윤호 교수가 없는 자리다.
자리에 없는 사람 말을 꺼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도 현재 상황을 잘 알 것이다. 큰소리 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면 이 자리를 빌리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평소 하윤호 교수님과 가장 말씀을 많이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진 않지만 그 점을 감안하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박승준 교수가 입술을 모았다.
‘확실히 보기와는 달리 펠로우 중 가장 빡빡해.’
병원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남들의 눈을 피하긴 어렵다. 하윤호 교수와 친분 관계가 깊다는 인상을 주면 줄수록 좋을 일이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과 교수라면 모르지만 적어도 같은 과 교수들에게는 특히 신경 써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사실 오늘 이 자리도 하성원 원장과 하윤호 교수의 존재를 무시하지 못하기에 만든 자리였다.
‘정말 계륵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야.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 과 교수들만 쳐다보면 인생 망칠 수도 있어. 일단 김지훈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아야 대처하기 쉽겠지.’
“병원을 옮기기 전부터 알던 사이는 아니지만 그나마 내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긴 했지.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잖아? 흐음! 어쨌든 이런 자리 만들기가 쉬운 건 아니니까 허심탄회하게 말해 봐.”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것보다는 가급적 명확하게 전하는 편이 나을 거야.’
김지훈이 얼굴을 굳혔다.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가지?”
“예. 일반 외과 의사로서 환자를 확실하게 책임졌으면 합니다. 저도 아직 말은 못했지만 당자사가 명확하게 알아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실력이 없다는 말이었다. 아래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말일 텐데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명확하게 들렸다.
박승준 교수가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경석이나 지동훈 교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도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였나?”
“솔직히 불안합니다. 전공의들에게까지 책임 문제가 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김지훈을 보던 지동훈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책임 전가까지 생각해야 할 정도였어? 심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상 이상이네. 어쩌면 김지훈 덕에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신현수가 가장 깐깐한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그 사이에 변하지 않았다면 다들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네.’
“김지훈 선생 말은 알아듣겠는데 박승준 선생님이나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알고 있습니다만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하겠습니다. 선생님들께서도 최소한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하윤호 교수와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사람은 김지훈이다. 어떻게 할지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고민해 볼게. 나머지는 뭐야?”
더 어려운 말이 남았다.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었다.
이런 자리가 흔하지 않기에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우리에게 신뢰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윤호 교수 일보다 더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그만큼 민감한 문제였다.
지동훈 교수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신뢰?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우린 펠로우 선생들을 확실하게 믿고 있어. 실력이든 뭐든 빠지는 것이 없잖아.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
‘이 문제는 길게 얘기해서는 안 돼.’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앞으로 제가 잘못 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깊게 고민하고 고치겠습니다.”
박승준 교수가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다소 갑갑하게 느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윤호 교수도 모자라 신뢰 문제까지 나온 이상 오늘 자리가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감정을 나타내서는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김지훈 선생,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깊게 생각하고 고민할게. 이경석 선생, 이번 수술 때문에 서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일하다 보면 욕심이 나고 그러다 보면 얼굴 붉힐 일도 생기는 거 아니겠어? 서운한 점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고 앞으로 잘해보자.”
이경석이 눈가를 좁히며 술잔을 비웠다.
김지훈의 말에 놀랐지만 사실이기에 못할 말은 아니었다. 내심 박승준 교수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었다. 뭉그적거려야 골만 깊어질 것이다.
무엇인가 결심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진료하고 수술했으면 합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저도 이제 대장 수술을 다시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항문 쪽 수술도 선생님께서 허락하시고 기회가 되면 같이 하고 싶습니다.”
박승준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장 수술을 하겠다고? 후우! 이건 아닌데.’
순간 얼굴이 붉어졌던 박승준 교수가 눈을 반짝였다.
‘내가 환자 전체를 관리해야 하지만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일이었어. 도리어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군. 나랑 경쟁하겠다면 해 주지. 송재덕 선생님을 믿는 모양인데 후회하게 될 거야. 그 때가 빠르면 빠를수록 통제하기 쉬워지겠지?’
생각과 달리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항문 쪽 수술 때문에 상황이 묘하긴 했지만 당연한 일을 두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조금 늦었네. 서로 도우면서 일해 나가면 그게 최고지. 이경석 선생, 우리 열심히 하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박승준 교수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혹시 어색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던 이경석과 김지훈이 웃자 지동훈 교수도 환하게 웃었다.
이경석이 직접 술 한 잔을 따랐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제 술 한 잔 받으시죠.”
“고마워. 앞으로 손톱만한 불만이라도 속에 담지 말고 바로 말해. 의사기 전에 선후배고 남자잖아?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잔이 돌았다.
분위기가 한결 좋아졌다.
술잔을 기울이던 지동훈 교수가 김지훈을 툭 쳤다.
“김지훈 선생, 원래 술 잘 마시잖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마셔? 몸이 안 좋아?”
아닌 게 아니라 김지훈 앞에 놓인 잔에 술이 찰랑찰랑 차 있었다. 술병이 비는 동안 술잔에 입만 댄 모양이었다.
‘심각한 말 한다고 한 모금도 안 마셨네.’
미안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막잔을 들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방문이 열렸다.
김지훈과 이경석은 물론 지동훈 교수도 깜짝 놀랐다.
박승준 교수가 벌떡 일어났다.
모두들 꾸벅 인사를 했다.
“원장님, 여긴 웬일이십니까?”
“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어. 지다가다 많이 듣던 목소리다 했더니 박 교수 맞네. 자네야 말로 웬일이야? 여기 생각보다 꽤 비싼 곳인데 월급 많이 받나 보네.”
“많이 받긴요. 우리 펠로우 선생들과 술 한잔 한다고 무리 좀 했습니다. 어떻게 잠깐 얼굴 보시고 가시겠습니까?”
“그럴까? 한 잔만 먹고 가자.”
하성원 원장이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