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조짐. (1)
박승준 교수가 수술 얘기를 하며 슬쩍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지 교수, 내가 요즘 정신없이 지내느라 주변을 신경 쓰지 못했네. 혹시 내가 그동안 눈 밖에 날 수 있는 일을 했을까? 뭐든 좋으니까 아는 것 있으면 말해봐.”
지동훈 교수의 눈에 반가움이 서렸다.
“어디든 우리 과는 똑같지 않습니까? 특별히 그럴 일도 없었고요.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한 가지?”
“특실 환자나 6인실 환자나 다르게 대하지 않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예전 병원에서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편합니다. 이제는 환자가 VIP라고 특별히 신경 안 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다야?”
“수술 스케줄 바뀐 일이 마음에 걸리지만 실수에 불과했고 이 문제도 그냥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겁니다. 수술 많이 하시고 최선을 다하셨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완곡한 표현이었다. 핵심을 짚긴 했지만 어쩌면 지동훈 교수도 기존 교수들이 환자 차별 방지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일로 눈 밖에 난다? 아니야. 결국 텃세 아니면 견제일 가능성이 더 높아.’
박승준 교수가 눈빛을 굳혔다.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라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 교수는 어떻게 생각해?”
“선생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호의를 가질 부분이 없습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설득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동안 해온 것처럼 날 믿고 지켜봐 줘. 우리에게 해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만 일어나지.”
그만 일어나자는 말에 지동훈 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입장이 곤란할 때면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다른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7월이 시작되며 텀이 바뀌었다.
신임 교수들과 부족한 1년차 때문에 한 달 늦었다.
이혁원과 강병옥이 오고 나종진과 송진우가 위장관 파트 근무를 시작했다. 언제나 변함없는 일상의 바쁜 나날이었다. 눈 떴다 감았는데 어느 새 한 주가 지났다.
새로운 주 월요일.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이제야 1년차 백일 당직 종료 턱을 내기로 했다. 그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였다. 아귀처럼 삼겹살을 해치우는 후배들을 보며 펠로우 모두 입맛만 다셨다. 격려와 고마움을 전하면서도 미안한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1년차들에게 신경을 바짝 써야 했다. 현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면 인원이 적은 1년차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교수들과 상의를 거쳐 업무 분담을 다시 했다.
“혁원아, 이준영 선생님 파트는 1, 4년차가 맡고 넌 하윤호 선생님 파트, 병옥이가 내 파트를 맡으면 돼. 수술실과 응급실 당직이 1년차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조정하고 신임 교수님들 환자 드레싱은 2년차가 하기로 결정했다. 하윤호 선생님 환자 드레싱을 병옥이가 하면 되겠지?”
“스케줄 짜기 복잡하겠는데요. 드레싱을 2년차에게 시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지만 불만이 있을 것 같습니다.”
“1년차 죽일 일 있어? 누가 그런 소리를 할 것 같은데?”
이혁원이 어색한 기침을 터뜨렸다.
“불만 있으면 내게 직접 말하라고 해.”
사실 2년차 드레싱 문제는 김지훈이 제안했다. 1년차 업무를 줄여주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지만 강병옥을 떠올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 외의 잡다한 일까지 처리한 김지훈이 술 한잔 못하고 연구실로 향했다. 이번 주에 내원할 외래 환자와 수술 예약을 점검하다 말고 턱을 매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다음 주에 하윤호 교수 수술이 또 잡혔다.
그것도 세 건이다.
‘라파로 하나에 미니콜레 두 개? 무슨 놈의 수술이 세 건이나 잡혔어? 내가 안 도와주면 환자에게 문제 생길 수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마무리 소리 나오면 확 들이받아? 자기 말대로 손이 풀리면 달라질까? 고민이다. 쯧! 다음 주는 내 수술까지 쉴 시간도 없겠네.’
오래 생각해야 기분만 망가진다.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가슴은 여전히 답답했다. 세상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면 힘든 일이 없을 것이다.
문득 강병옥이 또 떠올랐다.
후배라고 무작정 감싸거나 반대로 색안경 끼고 볼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께름칙한 느낌이 든다는 것은 분명한 경고였다. 단적으로 같은 년차인 송진우에게서 받는 신뢰감을 느낄 수 없었다,
‘딱히 꼬집어 말할 큰 문제가 없는데 이유가 뭘까? 어떤 면을 중점적으로 보아야 할까? 드레싱을 하게 한 것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고민이 깊어졌다.
확실히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툭하면 하윤호 교수에 대한 생각까지 겹쳐 이마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말 즐거운 일이 생겼다.
간만에 손일석과 주말 약속이 잡혔다.
군 생활 열심히 한 결과 공수에서 나와 꿈에 그리던 수도 통합 병원에서 근무한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고경희와 데이트는 자주 하는 것 같았지만 서로 시간이 안 맞아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됐다. 게다가 신현수와 이경석까지 함께 하기로 했다.
그것도 남자들만!
만세!
‘자식, 군인들이 아픈 데가 많을 리가 없는데 수술은 하고 사나? 손 근질거린다고 정형외과 기웃거리고 있는 거 아냐?’
토요일 일과가 끝나자마자 바로 퇴근을 했다.
곧 있을 강렬한 위장 자극에 대비해 몸 관리에 들어갔다. 술자리 최대 적은 배 속을 가득 채운 밥과 피로다. 이것은 진리다. 일단 고경아와 맛있게 점심을 먹고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내리 잤다.
개운하다.
계획대로 슬슬 배고픔이 느껴진다.
손일석과 파이팅 한 번 할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고경아의 눈빛에 담긴 고요한 삐짐을 모른 척하고 집을 나섰다. 잘 다녀오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한여름 더위가 스윽 물러났다.
왠지 서늘하다.
“여어! 김 교수, 잘 지내셨나?”
“손 대위, 오늘은 왠지 의사처럼 보인다. 사복이라 그런가? 수통(국군 수도 통합 병원) 가더니 머리도 많이 길렀네.”
“어허! 왜 이러시나? 내 잠시 군인의 길을 걷고 있지만 뼛속까지 의사인 사람이야. 군인의 탈을 쓴 의사! 그렇게 안 보이시나?”
“술 좀 작작 먹어. 전에 전화 한 거 기억 나?”
“전화 했었어? 이놈의 인기는 식지를 않네. 워낙 여기저기서 전화 해대고 찾는 사람이 많아서 잠시 신경 못 썼다. 미안하다. 외로워하지 마라. 우리가 그깟 전화 한 통에 흔들릴 사이는 아니잖아. 영원한 나의 친구, 김지훈, 안 그래?”
변함없는 손일석이었다.
“일석아. 나 너한테 손위 사람이다. 똑바로 하자.”
“충성!”
웃고 떠드는 사이 냉철한 금테 안경과 약간은 마르고 까무잡잡한 얼굴이 보였다. 근 일 년 반 만에 네 명이 모두 모였다. 호들갑에 가까운 인사가 오고갔다.
삼겹살이 노릇노릇 익어가고 술잔에 이슬이 맺혔다.
신현수까지 잔을 홀짝 비웠다.
“오우! 신현수, 소주를 원 샷으로? 많이 늦었지만 아메리카는 잘 다녀오셨나? 그쪽 하스피탈 분위기는 굿이야? 배드야?”
한 잔씩 또 비웠다.
“뭐? 현수도 혈관 수술을 들어간다고? 설마 날 속이는 건 아니겠지? 경석이 형, 이 자식들 말이 정녕 사실입니까?”
이경석이 무언의 웃음으로 대신했다.
한동안 가슴을 치며 벌컥벌컥 잔을 비운 손일석이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이건 배신이야. 배신. 이 자식들이 아주 내가 없는 틈을 타서 수작을 부리고 있네. 좋아. 내가 지금은 양보한다만 딱 복귀할 때까지다. 그 이후에도 넘보면 강호에 피바람 부는 거야. 누구 피가 한강을 적실지 굳이 내 입으로 말 안 해도 알겠지?”
차가운 목소리다.
“우린 전임인데 펠로우 피가 흐르겠지.”
신현수가 말 한마디로 급소를 찔렀다.
더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다.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 정도로 당황할 손일석이 아니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신현수를 째려보며 여유롭게 대처했다.
“미국 워터가 한국하고는 많이 다른가 보네. 변했어. 우리 현수가 많이 변했어. 현수야, 하오문하자. 하오문. 좋다. 좋아. 지훈아, 그치? 내 말이 맞지?”
성대모사까지 훌륭했다.
세 번째 술잔이 즐거운 웃음 속으로 사라졌다.
“현수는 팔자 폈네. 각이 딱 나와. 탄탄대로다. 경석이 형, 상명하복이 생명인 군대에서도 계급장 떼고 붙는 경우가 있는데 뭘 그렇게 고민해요? 부교수면 펠로우를 마음대로 해도 되나?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죠.”
손일석의 독무대다.
“작년에 했던 대로 하세요. 아! 역시 내가 없으니까 중심이 안 잡히네. 이런 일은 우리 김 교수님을 피해 가지 않는데 어떤 문제가 있으십니까?”
“손일석 정보력이 빵점이네. 하오문주 맞아?”
네 번째 술잔은 약간 썼다.
“흐음! 강적이네 강적. 냅다 질러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이 말이지? 지훈이 네가 퍼스트 계속 서주면 손이 좋아질까? 불가능하다고 봐. 연수가 아니라 여행을 다녀왔네.”
“당장은 뾰족한 해결할 방법이 없어.”
“답답하겠다. 왜 잊을 만하면 그런 인간들이 나타나지? 하긴 내 주위에도 고문관 하나 있다. 말은 안통하고 일은 개판에 남들한테 피해만 안 줘도 다행인데 계급까지 높아요. 제길! 그 인간이 의사라 더 문제야.”
“계급장 떼고 붙는다며?”
“지금 내 상황이 너하고 비슷해. 그런 거 있잖아.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결정적인 문제는 맞는데 증거가 없다고 할까? 현재 내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도 없고 하필이면 손 비빌 일까지 생겼어. 에휴! 내 팔자야. 어쨌든 욱해서 들이받지 말고 정말 신중하게 대처해라. 그런 사고 터지면 진짜 옷 벗어야 할 수도 있어. 펠로우는 잘라도 전임은 병원 마음대로 자르지 못한다는 거 알지?”
손 비벼야 할 일이 뭘까?
무심코 지나쳤다.
“알았어. 갑갑한 얘기 그만하고 오늘 밤을 불태우자. 우리 4인방이 한자리에 모인 게 얼마만인데 인상 쓰면서 술 먹을 수는 없잖아?”
“오케이!”
“참! 그 말을 못했네. 요번에 우리 셋이 후복막을 침범한 재발 대장암 환자 수술을 멋지게 해 냈어. 얼마나 뿌듯하던지 최고의 수술 팀이 이런 거구나 했다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자초지종을 들은 손일석이 불타올랐다.
“으아아아! 이 자식들이 가도 가도 너무 갔네. 감히 날 빼놓고 최고의 수술 팀을 운운해? 정의의 장풍을 한 대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래? 그런 일은 네버(never), 절대, 결단코 있을 수 없어. 내가 있어야 최고의 수술 팀 완성이야. 그게 진리야.”
손일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중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힘을 쓰려는 찰나 이경석이 툭 뒤통수를 쳤다.
“일석아, 너 감히 형한테 한 소리 아니지? 장풍을 어디다 날릴 건데”
깨갱! 꼬리 마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2차 가시죠. 두 놈만 죽이겠습니다. 마침 제 손도 두 개네요.”
2차는 이모네 골뱅이다.
얼굴이 붉게 물든 신현수가 당연하다는 듯 터벅터벅 뒤를 따랐다. 한때 소주는 쳐다보지도 않던 놈이 말없이 2차까지 함께 하는 모습에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훈아,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데 신현수 저 자식 너무 변한 거 아니야?”
이번에는 김지훈과 이경석의 손이 동시에 손일석의 뒷통수에 작렬했다.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지르던 손일석이 이어진 말에 고개를 발딱 치켜들며 기분 좋게 웃었다.
“이 모습이 바로 신현수야. 인마.”
신현수가 비틀거리며 실실 웃었다.
“이 자식이 무장해제까지? 지훈아, 나 감동했다. 정말 기분 좋다. 오늘 같은 날은 박스로 마셔도 안취하겠다. 경석이 형, 안 그래요?”
“그럼. 오늘이야 말로 카르페 디엠이다.”
오늘은 술을 부르는 날인가 보다.
“아유! 우리 교수님들 오셨어요?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일석이네. 일석이. 어떻게 지냈어? 군대 생활은 힘들지 않아? 아이고! 이럴 때가 아니네. 잠깐만 기다려요. 여보, 골뱅이 특대로 하나 삶아요.”
주인아주머니의 호들갑에 손일석이 붕 떴다.
“이모, 우리 오늘 허리 띠 풉니다. 레이더망까지 완전히 꺼진 날이니까 술과 안주 팍팍 깔아 주세요. 대동맥 박리? 내가 오늘 니들 껍데기까지 탈탈 벗겨 주마.”
말할 수 없는 즐거움 속에 분노의 술잔이 오고갔다.
술병이 하나둘 쌓여갔다.
오늘의 주인공인 손일석을 모르는 와이프는 없다. 술 마시는 도중에 가슴 서늘한 전화를 받거나 귀가 시간이 상당히 늦어도 눈 화살 맞을 일이 없다는 말이다.
가뜩이나 즐거운 자리다.
세 명의 유부남이 해방감을 만끽했다.
신현수의 눈에 술이 찰랑찰랑 차오르며 꼿꼿했던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경석은 정신 줄 놓은 것처럼 달렸다. 가장 술이 강한 김지훈도 눈가로 몰려드는 술기운을 이기기 힘들었다.
손일석은 군대에서 체력까지 키운 모양이었다.
모두가 한계까지 몰리고서야 이모네 골뱅이 집에서 일어났다. 이슬을 너무 많이 마셨다. 이러다 요정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김지훈, 신현수, 혈관 넘보면 친구고 뭐고 죽는다. 아! 신기동 선생님 총기가 흐려지셨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안 돼!”
태반은 혀가 꼬여 알아들을 수 없었고 나머지 반은 김지훈과 신현수의 귓등으로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