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71화 (671/1,329)

2화. 교수로서. (2)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송재덕 교수는 안심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게 다야? 내 그럴 줄 알았다. 이제 펠로우 2년차다. 2년차. 뭐가 됐든 간에 하윤호는 윗사람이야. 혼자 해결하기 힘들다는 생각 안 들어? 아끼는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뭐 하는 거야? 안 되겠다. 안 되겠어. 지훈이 부르자. 지훈이.”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김지훈을 호출했다.

(지훈아, 빨리 내려 와라. 현수하고 경석이도 불러. 이 교수와 함께 있다.)

급한 성격 탓이 아니었다.

자식이라고 부를 정도로 제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송재덕 교수다. 김지훈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신현수와 이경석까지 부른 것은 그만큼 사안을 엄중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후다닥!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김지훈이 문을 열었다.

헉헉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선생님, 부르셨습니까?”

“이 교수가 옆에 있다고 하니까 숨도 안 쉬고 달려왔니? 나쁜 놈. 다들 앉아. 즐거운 얘기 아니니까 바로 얘기하고 끝내자. 지훈아, 하 교수 때문에 문제없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 교수한테 다 들었다.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 이대로 갈 수 있겠니? 네가 가장 자주 보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니까 생각한 게 있을 거 아냐? 다 말해. 다. 우리가 괜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윤호 교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과 판단을 떠나 너무도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혹스러웠다.

솔직히 불만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교수로서 자격이 되는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신현수나 이경석과 나눈 말도 있었다. 하지만 말 몇 마디로 당장 해결책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워낙 무뚝뚝하다지만 지금까지 별 말이 없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걱정을 하면서도 미니콜레를 배우라는 말까지 했다. 그 탓에 또 한 번 깊게 생각했다.

‘지금 불만을 말씀드려야 공연히 걱정만 끼치겠지. 어차피 올해 내내 얼굴 봐야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까지는 해보고 그 다음에 말씀드려도 늦지 않아.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으면 돼.’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묵묵히 김지훈을 보았다.

무슨 말을 하든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선생님, 우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환자에게도 문제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환자?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앞으로도 하윤호 교수님 수술 때 계속 퍼스트를 설 생각입니다. 물론 후배들도 잘하겠지만 우리 파트인 이상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시간이 지나도 문제가 지속된다면 그때 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기동 교수가 힐끗 눈길을 주었다.

“정말 그럴 수 있겠어?”

“예. 맡겨주십시오. 절대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경석 선생, 신현수 선생과도 충분히 논의하겠습니다.”

“너희들 후배 문제는 더 급할 수 있어.”

누굴 말하는 것일까?

수술 스케줄 사건 이후로 별다른 일이 없었지만 문제점이 보이는 전공의는 단 한 명이었다.

‘병옥이를 말씀하시는구나. 병옥이 역시 우리가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후배다.’

“항상 신경 쓰고 있습니다.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또박 또박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수술 실력만큼 김지훈도 변하고 있었다.

눈가를 찡그리며 김지훈을 보던 송재덕 교수가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며 특유의 웃음을 터뜨렸다. 이준영 교수의 입가도 살짝 흔들렸다.

“우리 지훈이가 교수구나. 교수. 그래. 이 과장, 신 교수, 우리 지훈이, 경석이, 현수 판단을 믿자. 괜찮을 것 같다. 우리가 자식 농사는 잘 지은 모양이다. 허허! 잘 지었어. 준영아, 이럴 땐 웃으라고 했잖아. 경석아, 현수야,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치?”

“예, 선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너털웃음이 터졌다.

이혁민 교수가 일어나 펠로우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내도 너희들을 믿고 당분간은 기다려 보마. 대신 감당하기 힘든 문제까지 안고 가면 안 된다. 너희들이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명확하게 알고 지켜야 한다. 과장으로서 내리는 오더니까 잊지 마라. 알겠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준영 교수는 말없이 김지훈만 보았다.

시름도 걱정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흐뭇하고 대견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윤호 교수는 김지훈을 한층 성숙하게 만들고 있었다.

휴게실을 나오던 김지훈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김지훈, 니 석사 논문 빨리 준비해라. 벌써 7월이다. 학사로 전임되면 창피해서 병원 못 다닌다. 내도 빨간 볼펜 좀 써보자. 아! 신현수 니도 마찬가지다.”

이 와중에도 이혁민 교수는 자신의 일을 잊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이경석이 씨익 웃었다.

“난 선생님들의 저런 여유가 참 좋아. 지훈아, 현수야, 하윤호 선생님 문제 말고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씀일 거야.”

“형, 그렇긴 한데 석사 논문 거의 다 썼다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냥 라파로 담낭 절제술에 대해서 쓸 걸.”

가장 속상할 김지훈마저 웃었다.

신현수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동안 실력만 쌓은 게 아니었어.’

친구이자 인생 최대의 라이벌인 김지훈이 어엿한 교수로 보였다. 경쟁할 거리가 또 생겼다. 지금처럼 건강한 경쟁이 지속된다면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 시간 박승준 교수가 하윤호 교수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휴게실에서 우연히 들은 말 때문에 진지하게 상의할 사람이 필요할 텐데 지동훈 교수가 보이지 않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가늘어진 눈으로 박승준 교수를 보던 하윤호 교수가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눈치를 보니까 좋은 일은 아니네. 어쨌든 시간 상 이번 수술하고 연관이 있겠지?’

“미니콜레를 버벅거리면서 할 때는 잘나도 펠로우다 싶었는데 어제 수술은 정말 의외라는 말밖에 안 나옵니다. 세 명이 함께 수술한 덕이 크겠지만 꼴새를 보니까 앞으로도 버거운 수술은 그런 식으로 할 모양입니다.”

“그것도 실력이야. 혼자 하기 힘들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어?”

왠지 자신을 빗댄 것 같은 말투에 하윤호 교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는 각오하고 들어온 병원이었다.

‘나도 당신처럼 자리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런 꼴을 감수하고 사는 거야.’

“다들 자기 욕심이 있는데 끝까지 그러지는 못하겠죠. 어제 수술도 이경석 실적으로 잡힐 텐데 김지훈에겐 결국 손해 아닙니까? 신현수야 그런 생각 안 하고 살아도 되는 인생이고요.”

박승준 교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불평이나 하자고 만든 자리가 아니었다.

일부 교수들의 의중까지 알았다.

김지훈의 실력을 본 이상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은 하윤호 교수였다. 실력이 엇비슷해도 문제가 될 판인데 경쟁 자체가 힘들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빙빙 돌리긴 하지만 그간의 행동과 말을 생각해보면 분명 대책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떻게든 이용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먼저 듣고 유리한 것만 취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윤호 교수는 지동훈 교수처럼 평생 곁에 둘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빌미를 제공하거나 꼬투리를 잡힌다면 두고두고 골치 아플 것이다.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각자 할 일 하면서 두고 보는 수밖에 더 있겠어?”

“저번에 말씀하신 것도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죠.”

“있으면 벌써 말했겠지. 나도 당황스러워.”

하윤호 교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아직도 날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질 않네.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가장 먼저 나가겠지만 당신도 과장되기 힘들 거야. 김지훈은 나이 때문에 열외라고 쳐도 신현수나 이경석이 만만해 보여? 당장 내년이면 전임이고 조 교수 되는 것도 시간문제야.’

“솔직히 까놓고 생각해 보죠. 이혁민 선생님 뒤로 신기동 선생님이 계십니다. 지금이야 관심도 없다고 하지만 세상이 그렇습니까? 일단 과장되면 당연히 연임 욕심이 나고 결국 꽉 붙잡고 안 놓겠죠. 앞으로 최소 십 년은 과장 될 엄두조차 못 낼 겁니다.”

“십 년?”

박승준 교수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기동 교수의 존재는 처음부터 찝찝했다.

이혁민 교수와 연배가 같아 과장을 한다고 해도 단임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일로 하윤호 교수의 말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신기동 교수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어. 정말 십 년이나 걸린다면 어차피 그게 그건데 병원을 옮길 이유가 없었어. 올 때는 자신이 있었는데 점점 어렵다고 느껴지다니. 제길! 그래서 하윤호 네 생각이 뭐야?’

“그래서 좋은 방법이라도 있다는 거야?”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선생님과 지동훈 교수 그리고 제가 한 마음으로 뭉쳐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박승준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파벌 때문에 병원까지 옮겼는데 결국 파벌이 아니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최소한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의사들을 확고하게 장악하지 않으면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 질 것이다.

“그 다음에는?”

“펠로우부터 잡아야죠. 신현수는 이사장 아들이니까 큰 득이 되거나 거꾸로 우리가 들러리에 불과해질 수도 있습니다.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지만 김지훈과 이경석은 다르죠. 확실하게 잡으면 단단한 발판이 될 겁니다.”

“펠로우들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

“하성원 원장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어느 병원이든 원장은 연임이 관례니까 4년은 하실 테고 그 다음 원장님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실 겁니다. 그럼 펠로우들 목을 최소 6년은 잡고 흔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근과 채찍이 동시에 주어진다면 무엇을 선택할 지는 빤한 거 아닙니까?”

박승준 교수가 피식 웃었다.

자신도 하성원 원장과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면 당장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현실성이었다. 즉, 실현이 가능한지가 관건이었다.

“원장 일로 바쁘신 분이 펠로우들 문제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겠어?”

하윤호 교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울리지 않는 여유까지 보였다.

“이건 좀 조심스러운 얘긴데 분기마다 정기 모임이 있으십니다. 우리 병원에서 목소리 크다는 분들도 많고 다른 병원 분들까지 상당수 참석하는 자리죠. 의외로 모임 안에서 의논된 일들이 실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한 힘과 영향력이 있으니까요.”

뭘 어쩌자는 말일까?

“나도 모르는 모임인데 그런 자리에 펠로우들이 어떻게 끼어들어? 당장 나나 지 교수를 받아준다는 보장도 없잖아?”

“제게 한 약속만 잊지 않으시면 선생님과 지 교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펠로우들이요? 어려서부터 키우면 배신은 꿈도 못 꾸는 법이고 남들보다 항상 한 발 앞서 나가는데 누가 싫다고 하겠습니까? 그게 바로 라인이 가진 진짜 힘 아닙니까?”

뜻밖일 정도로 많은 정보를 가진 하윤호 교수였다. 하성원 원장도 무시 못하는 집안의 힘일지도 몰랐다. 박승준 교수에게는 불리할 것이 없는 말이었다.

하윤호 교수만 챙겨 준다면 원하는 바를 이룰 확률이 상당히 높아질 것이다. 김지훈이 가진 의외의 실력과 강단에 놀랐지만 대하기 나름이었다.

“좋아. 하 교수 말이 틀린 건 아냐. 그런데 하 교수에게 정말 그런 힘이 있어?”

“9월 쯤 모임이 열립니다. 그때 인사드릴 수 있도록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제 부탁을 깔끔하게 해결해 주시면 연말 혹은 연초 모임에 펠로우들과 함께 참석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박승준 교수가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치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확실한 실력과 약간의 운 그리고 집념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능력이 아니었다.

하윤호 교수가 이를 웅변하고 있었다.

“하 교수가 정말 원하는 건 뭐야?”

“저요? 전 다른 욕심 없습니다. 먹고 사는 건 지장이 없으니까 잘 붙어 있다가 대학 병원 과장 소리까지만 들으면 됩니다. 명예라는 것이 꼭 병원에만 있는 건 아니지만 저도 명색이 의사니까요.”

“김지훈이 어느 정도까지 해 주길 바라?”

“뭐, 선생님과 이경석 정도의 관계면 좋겠지만 제 수술만 착실하게 들어와 줘도 불만은 없습니다. 입막음이야 우리 셋이 같이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수술 실력이 문제였다.

하윤호는 자신의 손을 잘 알고 있었고 2년 동안의 연수는 명예를 위한 허울일 뿐이었다.

박승준 교수가 눈가를 좁힌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고민이 많을 것이다.

“어이쿠! 벌써 퇴근 시간이네요. 전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선생님, 9월에 있을 모임에 지 교수와 함께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목소리에 여유가 실려 있었다.

가장 불리하고 위태로웠던 하윤호 교수가 도리어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물론 박승준 교수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이었다.

박승준 교수가 고민에 잠겼다.

전화만 하면 당장 달려와 함께 고민해 줄 지동훈 교수를 찾지 않았다. 파벌, 라인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했던 사람은 둘이 아니라 한 명뿐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가 보자. 손해 볼 일이 없잖아.’

이제야 지동훈 교수를 찾았다.

연락을 받고 진료실로 향하던 지동훈 교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느긋한 표정으로 퇴근을 하던 하윤호 교수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또 무슨 말을 한 거지?’

아무리 좋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해도 동료를 보며 이렇게 불안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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