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70화 (670/1,329)

2화. 교수로서. (1)

아주 중요한 것을 잊었다.

큰일 났다.

주말 집담회다.

교수들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이번 수술을 절대 그냥 넘어갈 선생님들이 아니지. 오늘은 누가 집중포화를 맞을까? 대동맥 박리 때문에 내가 맞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조금이라도 빨리 준비해야 돼. 늦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지만 공격할 군번이 아니다. 방패라도 튼튼하게 만들 일이었다. 잠깐 남는 시간을 빌어 책을 펼쳤다.

슬며시 기지개를 펴던 이혁원이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다말고 화들짝 놀랐다.

‘전공의가 이제 집담회를 떠올려? 넌 오늘 죽었다고 복창해라. 양지 바른 곳에 잘 묻어주마.’

남 걱정 할 때가 아니었다. 나름 열심히 준비를 했지만 부족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집담회를 맞이했다. 박순용은 총치프니 당연히 긴장해야 하지만 오늘 가장 조심해야 할 전공의는 이혁원이었다.

직장암과 재발한 대장암 수술을 모두 들어간 전공의!

예상 적중이다.

이혁원이 살벌하게 탔다.

하얀 재와 앙상한 뼈만 남았다.

이준영 교수도 빠지지 않았다.

“이혁원, 똑바로 하자.”

왠지 진심으로 흐뭇하다.

오늘의 땀과 눈물이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수술만 들어가면 뭐하나? 니 3년차다. 세 달 후면 치프를 해야 할 년차란 말이다. 이렇게 귀중한 기회를 놓칠 거야? 정신 안 차릴래? 이경석 선생. 어제 수술 말이야.”

마음 졸이고 있던 이경석이 깜짝 놀랐다.

김지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목을 만졌다.

점점 목을 바짝 죄어오는 집담회였다.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놈의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질 않을까?

이혁민 교수가 이경석을 정조준했다.

“수술 전에 후복막 침범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을 못했나? 대동맥 박리를 수술실에서 결정한 것은 무리 아니가?”

점점 예리해졌다.

무슨 일인지 송재덕 교수까지 가세했다.

“이경석 선생, 펠로우 선생들을 모두 데리고 들어갔는데 왜 대답을 못하니? 준비 제대로 안 했구나? 혹시 농땡이 부린 거 아니야? 앞으로 수술 어떻게 하려고 이러니. 안 된다. 안 돼. 그러면 안 된다.”

이경석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간만의 불길에 새카만 재만 남겼다.

아직도 불길과 비수는 충분했고 태워야 할 놈 역시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신현수 선생, 노인과 젊은 사람은 달라. 분명히 대동맥 경화증이 동반됐을 텐데 그런 경우 박리할 때 주의할 점이 뭐야? 타이할 때 4번 실을 사용했는데 적절한 선택이었어?”

신기동 교수는 이제야 비수를 꺼내 들었다.

던질 힘도 충분했다.

차갑고 냉정한 눈빛을 유지하던 신현수의 전신에 서서히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꿋꿋하게 버티긴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내 수술은 도대체 왜 들어오는 거야? 김지훈도 그러더니 신현수 너 정신 안 차릴래? 명찰만 달면 교수야?”

급기야 펠로우에서 전공의 수준으로 급락했다.

이준영 교수가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혈관 파트 자청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동안 뭘 배운 거야? 이론적 토대도 없이 대동맥 인접 부위를 박리해? 신현수 선생, 확실하게 하자.”

전공의 때도 쉽사리 타지 않았던 신현수였다.

이준영 교수는 전에 없이 길게 말했다.

가장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교수 두 명에게 동시에 탔으니 충격이 상당히 컸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신현수의 얼굴이 허옇게 떴다.

한 줌 재로 변해 흩날리기 직전이었다.

‘자식! 너도 별 수 없구나. 그럼 다음은 누구?’

헉!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남은 놈은 이제 단 한 명이다.

오늘은 모든 교수들이 작정한 모양이었다.

머릿속이 번쩍이는 경고등으로 시뻘게졌다.

웃을 때가 아니었다.

교수들의 눈길이 느껴지는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미 웬만한 질문은 다 나왔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최악의 난이도를 가졌을 것이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대동맥 박리를 할 때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눈을 질끈 감고 처분만 기다렸다.

‘한두 번 타는 것도 아닌데 오늘도 이 악물고 버티자. 공부 대충한 죄 달게 받을 테니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

불길과 비수가 날아들기도 전에 스스로 재가 됐다.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선 기분이었다. 삐끗하면 그대로 추락이다.

딱 한 발 헛디뎠다.

화르륵 치솟은 불길을 따라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강렬하게 두들겼다. 차가운 비수가 가슴을 찌르고 묵직한 한 마디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였다.

똑바로 하자, 확실하게 하자, 너도 집도의였다.

이것이야말로 끝 모를 태움이었다.

어라! 무슨 일이지?

갑자기 뜨겁고 서늘한 기운이 싹 사라졌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교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다른 곳으로 쏠려있었다.

“박 교수, 직장암 환자 호치키스 사용할 때 어떤 방식으로 했어? 다들 별반 차이 없겠지?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니?”

이런 천운이! 만세! 카르페 디엠!

오늘처럼 송재덕 교수가 존경스럽게 느껴지는 날은 없었다.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사정권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여유였다. 하얀 재에서 싹이 돋으며 갑자기 온몸에 생기가 넘쳤다. 물 한 바가지만 부으면 화려하게 부활할 것이다.

좋아 죽던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어느 틈엔가 직장암만이 아니라 재발 대장암 환자의 수술까지 다시 토론 주제로 올라와 있었다.

박승준 교수는 막힘이 없었다.

김지훈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지적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전부터 느낀 일이었지만 확실히 실력과 이론을 모두 겸비한 의사였다.

‘역시 박승준 선생님이시네.’

전공의는 물론 교수들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역시 사람은 어렵고 힘든 문제를 앞에 두었을 때 더욱 빛이 나는 모양이었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자리였다.

집담회를 마치고 나오던 김지훈이 오늘 표적이 됐던 신현수와 이경석을 보다말고 흠칫 놀랐다. 분명 불길을 뒤집어쓰고 비수에 찔린 후 얼음에 담가졌는데 눈은 웃고 있었다.

어라? 이혁원까지?

‘기분이 괜찮네. 그래서 지훈이가 탈 때 부러웠었나? 이런 일 또 벌어져도 좋을 것 같다.’

‘지훈아, 고맙다. 오늘 같으면 얼마든지 타도 좋다.’

‘선생님, 저도 선생님처럼 수술하고 싶습니다.’

이경석이 어깨동무를 했다.

신현수는 눈길을 주며 피식 웃었다.

이혁원은 나종진과 송진우를 보며 신나게 떠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제는 진짜 한 팀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과 몸으로 말이다.

아니면 불길에 모두 녹아 한 덩어리가 된 걸까?

“지훈아, 별일 없으면 회진 돌기 전까지 라파로 공부나 하자. 경석이 형, 형도 시간 있죠?”

“걱정하지 마. 나 시간 많다.”

신현수의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연구실로 향하는 이경석과 신현수의 뒤를 따르던 김지훈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가지가 빠졌다.

미니 콜레시스텍토미(담낭 절제술)를 했다.

하윤호 교수는 몇 번 했지만 김지훈은 처음 한 수술이었다. 절대 이를 지나칠 교수들이 아니었다. 응당 송곳 같은 질문이 난무해야 했다.

왜 아무도 언급하지 않을 걸까?

‘스승님도 말씀이 없으셨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는 말인데 뭐지? 하윤호 교수 때문인가? 어쨌든 시도해 보길 잘 했어. 충분한 가치가 있는 수술이야.’

찜찜함이 뒷덜미를 따라 붙었다. 하지만 미니콜레를 받은 환자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야 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머릿속이 복잡한 박승준 교수가 커피 한잔 하며 머리를 식힐 겸 휴게실로 향했다. 집담회를 떠올리며 별 생각 없이 문을 열다 말고 멈칫거렸다.

문틈으로 교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과장, 어제 수술 못 봤지? 봤어야 됐어. 대동맥 주변 박리할 때 숨도 제대로 못 쉬겠더라. 근데 얘들은 그냥 손이 나가는 거야. 우리가 저 나이 때는 건드리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야. 잘하더라. 정말 잘하더라.”

“저도 오늘 발표 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인공 항문만 만들고 나와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을 텐데 절제까지 해내다니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러니 다른 사람은 어떻겠어? 우리 과 자랑이다. 자랑. 내년에 전임 주고 일이 년 있다가 바로 조 교수 시켜도 되겠어. 그치? 내 말이 맞지?”

돌아서려던 박승준 교수가 전임, 조교수라는 말에 주변을 둘러보며 슬며시 귀를 가져가 댔다.

“그럴까요? 하하하.”

“말 나온 김에 과장도 빨리 시키자. 우리 은퇴 얼마 안 남았다. 줄줄이 은퇴해야 돼. 줄줄이. 누구부터 시킬까?”

“이경석이 제일 먼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이 문제네요. 김지훈이 펠로우를 1년 일찍 시작한 꼴이니까 먼저 해야 할까요?”

무뚝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과장, 지훈이는 할 사람 없을 때 시켜.”

“예? 선생님 파트인데 나중에 시켜도 되겠습니까?”

“수술해야지. 자리 맡아야 시간만 뺏겨.”

때 아닌 진지함에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박승준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농담에 가까운 소리니까 날 거론하지 않았겠지?’

어찌됐든 신현수가 이사장 아들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나가는 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다행이었다.

문득 문 밖에 서 엿듣고 있는 자신을 본 박승준 교수가 고개를 흔들며 돌아섰다.

그 때 약간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박 교수도 긴장해야 되겠네.”

가장 냉철하고 차가워 보이는 신기동 교수였다.

박승준 교수가 귀를 바짝 기울였다.

“신 교수,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과장, 연공서열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얘기했지? 지금처럼 하면 별 문제없겠지만 근무 초반에 일 열심히 안하는 사람은 없어.”

“잘하고 있잖아. 걱정할 필요 없다.”

“실력이 뛰어나기는 한데 분위기가 묘해.”

“분위기? 무슨 분위기?”

“이 과장,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들지만 내 눈이 맞는다면 지금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 수술만 잘한다고 과장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이제 3개월 지났다. 너무 성급한 거 아냐?”

“뭔가 방향이 안 좋아.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지만 펠로우들과 전공의들이 똑같은 일을 또 당할까봐 걱정돼.”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금경태까지 거론했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 교수,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어.”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환자와 관련된 잡음이······. 쯧! 어쨌든 눈 여겨 볼 사람이 여럿입니다. 위나 아래나······.”

박승준 교수 말고도 눈에 밟히는 사람이 또 있는 모양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그만 해.”

갑작스러운 말에 송재덕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교수, 무슨 소리야? 내가 요새 병원 일로 너무 바빠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신 교수, 도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거야?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잘하고 있잖아. 경석이 때문에 그래? 아니다. 절대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닐 거야. 지금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어도 이해하고 넘어갈 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겠습니다. 박 교수 일은 제가 너무 앞서 나간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였다.

박승준 교수가 이를 악물었다.

대화가 이어졌지만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자신을 보는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의 시각이 좋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응급 센터 센터장과 차기 과장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의 생각이라는 점이었다.

급히 진료실로 돌아온 박승준 교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교수들의 눈 밖에 날 일이 없었다. 사소한 일이 몇 번 있었을 뿐이었다.

실력만 가지고서는 과장이 될 수 없다는 신기동 교수의 말이 귓가에서 뱅뱅 맴돌았다.

‘여기서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란 말이야? 실력 말고 또 무엇을 원하는 거지? 설마 아부라도 떨라는 거야?’

고개를 푹 숙인 채 고민을 하던 박승준 교수가 전화기를 잡았다.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눈빛마저 변한 것 같았다.

그 시간에도 교수들의 대화는 계속됐다.

신기동 교수의 표정이 더욱 나빠졌다.

“말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상의했으면 합니다. 이준영 선생님, 하 교수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 과장,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어?”

이혁민 교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하 교수는 나도 고민이다. 가족일수록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는데 하성원 원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신 건지 알 수가 없다. 내년 초 인사이동 때 문제를 제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변할 여지가 있을까?”

“전문의 된지 몇 년인데 이제와 손이 변할 수 있겠어? 미국 연수 갔다 온 게 확실한지 확인해야 하는 거 아냐? 지훈이가 말은 안 하지만 하 교수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닐 거야.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내쫒고 싶어.”

병원에 관계된 일이라면 모든 면에서 노련한 의사들이다. 직접적으로 부딪치거나 보지 못했다고 해도 문제점을 놓칠 수는 없었다.

신기동 교수가 그간 자신이 듣고 본 일을 말했다. 이미 눈 밖에 난 탓인지 좋은 말이라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연수 경력까지 의심하고 있었다.

“이 과장. 그동안 초반이라 두고 봤지만 이건 아니야. 하성원 원장님은 분명 무리하셨고 지금이라도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해.”

“신 교수, 하 교수는 전임이다. 심각한 결격 사유나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중간에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어. 솔직히 실력이 없다는 것도 주관적인 면이 있어서 정기 인사 때 사유가 될지조차 의문이다.”

가장 신중한 이혁민 교수는 도리어 회의적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나직한 신음을 터뜨렸다.

“나도 짐작은 했는데 그 정도였어? 하긴 내가 봐도 문제다. 문제. 이 교수, 하윤호는 둘째 치고 지훈이한테 영향은 없겠니? 특별히 한 말은 없어?”

모두들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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