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펠로우의 힘. Ⅲ (1)
출혈이 잡혔다.
정확한 판단이었다.
대장과 소장의 색깔도 변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나직한 안도의 한숨 소리가 터졌다. 그런데 타이한 부분을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동맥 손상을 준 이유가 있어야 했다.
“선생님, 이런 상황이 벌어질 부분이 아닌데 이상하네요. CT에서 보이는 것보다 혈관 쪽에 더 가깝게 전이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나도 그게 걱정이야.”
안색이 어두워진 이경석이 조심스럽게 박리해야 할 후복막을 확인했다. 켈리와 모스키토로 여기저기를 벌려 보았다. 답답한 신음 소리가 터졌다.
대동맥과의 간격은 더 좁아졌고 거의 돌처럼 느껴질 정도로 딱딱했다. 불과 1-2 센티미터 상부 쪽과 비교해도 확연하게 다를 정도였다.
직접 전이로 인한 영향일 가능성이 높았다.
복부 CT에서 보이는 것보다 최소 2-3센티미터는 더 상부 쪽이었다. 암의 크기를 생각할 때 이런 부분이 최소한 5센티미터에 육박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대동맥에 손상을 줄지 모르는 일이었다.
너무 위험했다.
절제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여기서 수술을 중단하고 인공항문을 만드는 것이다. 의사에게는 안전하고 책임져야 할 일도 없다. 대신 암 덩어리가 남는다. 환자에게는 시한부 선고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마지막 날만 기다려야 할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성공하면 예후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좋다. 반면 실패하면 환자에게는 치명적인 결과가 유발되고 집도의는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의료 사고나 과실과는 무관하지만 삶과 죽음의 차이는 그만큼 크고 무겁기 때문이다.
이경석이 김지훈을 보았다.
심각한 안색이었지만 수술 부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포기보다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포기하는 것이 합당한 결정일까?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지훈이는 가능할 지도 몰라. 가능하다면, 방법이 있다면 시도하는 게 맞겠지.’
“김지훈 선생, 절제가 가능할까?”
김지훈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수술 부위를 꼼꼼히 확인하며 점점 심각해졌다. 의사로서 기본적인 판단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환자를 위해서 방법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야 했다.
이경석이 다시 물었다.
“가능하겠어?”
“반반입니다. 이런 확률로는 박리할 수가 없습니다. 현수야, 암 위치는 정확히 여기고 지금 내가 만지는 부분부터 상당히 딱딱해. 너는 어떻게 생각해?”
김지훈의 설명을 들으며 수술 부위를 뚫어지게 보던 신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해. 무리하다 대동맥 손상이 발생하면 감당할 수가 없어. 이경석 선생님, 안타깝지만 인공항문 만들고 끝내죠.”
참관을 하던 지동훈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집도한다고 해도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린 채 움직이지를 않았다.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경석 선생님, 절제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가 굉장히 크겠죠? 확실하죠?”
“당연한 일이지만 현수 말대로 어쩔 수 없잖아.”
“그럼…….”
그때 수술실 조용히 열렸다.
송재덕 교수와 박승준 교수가 들어섰다.
다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김지훈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수술 부위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가끔 이런 일이 있었지만 볼 때마다 예외적일 정도로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대동맥이 길게 찢어지지만 않으면 봉합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어요.”
“바늘 같은 구멍만 나도 피가 분수처럼 솟구칠 텐데 봉합할 수 있겠어?”
“오상익 선생님 수술할 때 보니까 대동맥 밑 부분을 박리하는 것도 후복막 박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박리할 부분 위쪽 대동맥에 혈관 겸자를 걸어 놓으면 손상에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요?”
* 혈관 겸자 : 날이 서지 않아 혈관을 눌러 잡을 수 있는 집게.
“출혈이 발생하면 즉시 혈관 겸자로 혈류 차단하고 해결하자는 말이야?”
“예. 다만 대동맥을 차단하고 봉합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밖에 없다고 생각해야 되겠죠? 그렇다고 해도 결국 박리가 문제인데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간 절제했을 때를 생각하면 할 수 있어. 경석이 형, 과도하게 긴장만 하지 않으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자신감을 갖고 진행합시다.”
이제야 고개를 든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수술실이 교수들로 가득했다.
송재덕 교수가 김지훈과 이경석을 보았다.
“심각하네. 지훈아, 정말 가능하겠어? 경석아, 신중하고 확실하게 결정해야 한다. 결과를 의심하거나 마음이 불안하면 할 수 있는 수술도 못하는 법이야.”
“선생님, 지훈이가 말한 방법이 가능하겠습니까?”
“집도의가 결정할 일이야. 경석아, 넌 그럴 능력이 있다. 네 자신의 판단을 믿어.”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에 더없는 신뢰가 실려 있었다. 이런 말투는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수술의 어려움과 위험성 그리고 김지훈과 이경석에 대한 신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박승준 교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펠로우에게 맡기고 지켜볼 상황이 아닌데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혹시 나를 염두에 두시는 건가?’
바람과는 달리 이경석이 김지훈을 보았다.
할 수 있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해야 한다.
단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경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스로 생각해 볼 때 누가 이 부분을 집도해야 하는지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대동맥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퍼스트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내가 퍼스트를 설 수 있을까? 가능하다고 해도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의사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이건 창피한 일도 자존심 상하는 일도 아니다.’
마음을 굳혔다.
“김지훈 선생, 이 부분 집도 맡아줘. 신현수 선생, 빨리 손 닦고 들어와.”
“예? 저도요?”
“퍼스트 부탁해. 거의 매일 혈관 수술 들어가잖아. 나보다 훨씬 안전하게 수술할 수 있을 거야. 강병옥 선생, 잠시 나가서 쉬고 있어.”
박승준 교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경석이 얼굴을 굳히며 써드 자리에 섰다.
‘지훈아, 부탁한다.’
수술 중 일부 과정이라고 해도 집도의를 바꾸는 것은 결코 흔치 않은 일이다. 송재덕 교수를 비롯해 모두들 묘한 표정을 지으며 제각각 다른 생각에 잠겼다.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환자에 대한 책임 문제를 떠나 외과 의사로서의 자존심을 접을 만큼 동료들을 신뢰한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가장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예의를 찾거나 물러설 상황이 아니었다.
“대동맥 주변과 암 박리까지만 맡겠습니다.”
이경석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집도의 자리에 섰다. 곧 신현수가 퍼스트 자리에 들어서자 현재 상황과 계획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미 12시가 넘었다,
아직 암 덩어리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무거운 부담과 긴장이 다가왔지만 펠로우 세 명이 한 환자를 앞에 두고 있다. 혈관에 인접한 암도 절제해 봤고 대동맥에 혈관 겸자를 거는 과정도 보았다. 자신과 동료의 실력을 믿으면 결코 불가능한 수술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켈리!”
혈관 겸자를 걸 부분의 대동맥 박리가 시작됐다.
노인의 혈관은 딱딱하다.
탄력이 없기에 더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켈리를 가져가는 순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눈으로 본 것과 실제 경험이 있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벌떡벌떡 뛰는 대동맥을 따라 김지훈의 심장도 뛰었다.
‘암이 침범한 부위도 아닌데 정말 만만치 않네.’
기구에 과도한 힘이 가해지지 않도록 박리 내내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켈리 끝이 복부 대동맥 아래 부분 깊숙한 곳까지 도달했다.
신현수가 조심스럽게 시야를 확보했다.
옆으로 밀린 대동맥이 더욱 강하게 뛰었다.
“타이! 보비!”
어느 과정 하나 쉽지 않았지만 3개월 동안 많은 수술을 함께 했다. 신현수의 손은 완전히 풀린 상태였고 송재덕 교수의 말처럼 궁합이 맞았다.
과감하고 섬세한 손이 어울렸다.
마침내 대동맥 주변이 모두 박리됐다.
커다란 혈관 겸자를 걸었다.
이제야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암 덩어리와 후복막 제거는 아직도 멀었다.
박리할 부위를 확인하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전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암이 침범한 경계도 확실하지 않았다.
온갖 문제가 예상됐다. 보다 안전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때 문득 암 수술 원칙과 함께 신현수와 함께 했던 수술이 떠올랐다.
벌거벗은 나뭇가지처럼 드러난 혈관들!
“현수야, 암 박리가 아니라 아예 대동맥을 따라 후복막을 모두 박리하자. 그게 더 쉽겠어.”
“대동맥을 따라서?”
“그게 도리어 위험도가 낮을 것 같아. 암과 인접한 후복막 조직이 상당히 딱딱하고 어디까지 침범했는지 육안으로는 구분하기 정말 힘든 상황이잖아.”
신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복부 대동맥이다.
위험도가 낮아질 지도 모르지만 난이도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어쩌면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혈관 수술 경험이라고 해야 손목과 팔에 국한된 일이었다.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도 내심 떨렸지만 최선의 선택이었다.
“암과의 간격이 단 1밀리미터라도 더 멀어진다면 출혈이나 조직 손상에 대처하기 더 쉬울 거야. 암이 침범한 부위를 건드리면 출혈을 제어하기가 더 힘들 것 같아.”
자신할 수 있는 부분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일반외과 의사들에게 대동맥이란 수술은커녕 볼 기회조차 거의 없는 구조물이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의 판단을 믿는다고 하지만 모든 수술에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술 팀의 불안이 주변으로 퍼졌다.
송재덕 교수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김지훈, 네 판단이 이 상황에서는 가장 적절해. 나 같아도 그 방법을 택할 거야. 좋아.’
“현수야, 굵으나 가느나 혈관이고 눈에 잘 보이는 구조물은 피하기가 쉬운 법이다. 신기동 교수한테 배운 대로만 해. 그럼 된다. 자신을 가져.”
송재덕 교수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신현수는 물론 수술 팀의 눈에 서렸던 불안 사이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섞였다. 미약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힘을 얻었다.
김지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현수야, 시작하자. 이경석 선생님, 시작합니다.”
혈관 겸자가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고경아와 함께 필요한 기구를 준비했다.
담당 분야가 달랐지만 일반외과 주임 간호사답게 단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
김지훈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성공과 실패에 따라 많은 의미가 걸린 수술이기도 했다.
박승준 교수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경석, 역시 가장 어려운 부분에서는 빠지는구나. 그런데 내가 빤히 보고 있는 걸 알면서 김지훈에게 수술을 넘겨? 김지훈 수준이 이 정도였어? 이 수술을 해내면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신현수 이상으로 신경 써야 하나?’
‘생각대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정말 강하네. 이경석 선생도 다시 봐야겠어. 자신감이나 자존심이 아니라 환자에게 가장 유리한 방법을 택한단 말이지? 무사히 진행돼야 할 텐데 상당히 어려운 과정이라 걱정이네.’
지동훈 교수가 힐끗 송재덕 교수를 보았다.
신뢰와 걱정과 긴장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누구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우린 할 수 있어.’
“켈리!”
강한 확신이 실린 목소리였다.
불과 5센티미터 남짓이다.
무척 짧은 길이지만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김지훈이 대동맥과 연결된 후복막을 잡았다.
드디어 이번 수술에 있어서 가장 어렵고 위험한 과정이 시작됐다. 성패가 달린 핵심적인 과정이다.
신현수의 얼굴이 강한 긴장으로 물들었다.
후복막에서 상당한 저항이 느껴졌다.
뭉툭한 켈리로는 조직을 벌릴 수 없었다.
“모스키토!”
생각보다 더 질기고 단단했다.
암이 퍼지진 않았지만 그로인한 염증이 심한 탓이다.
끝이 뾰족한 모스키토로도 벌리기 힘들었다.
한참만에야 약간의 틈을 확보했다.
빨간 피가 스멀스멀 새나왔다.
대동맥과 바로 맞붙은 후복막에서 나오는 피다.
출혈 조직을 대동맥에 바짝 붙여 잡았다. 수없이 해온 동작이지만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타이!”
모스키토와 조직 사이의 틈은 거의 없다.
탄력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딱딱했다.
손이 흔들리면 매듭을 따라 조직이 찢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보비(전기 소작기)로 지질 수는 없다.
어떤 타이든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조심스럽게 실을 건 신현수가 타이를 했다.
신중함을 넘어 집도의 이상의 긴장을 보였다.
“컷!”
조그만 실매듭이 대동맥 위에 만들어졌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조직과 함께 떨어져 나올 것처럼 위태로웠다. 박리를 진행하는 동안 또 다른 장애가 될 것이다.
김지훈과 신현수의 긴장이 증폭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