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펠로우의 힘. Ⅱ (2)
예상은 했지만 소장으로 보이는 구조물이 너무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조그만 더 깊게 절개했거나 위치가 달랐으면 분명 손상을 주었을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았다.
“너무 심하게 붙었네. 혁원아,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리트랙터 걸지 마.”
무영등 초점을 맞추고 작은 틈 사이를 신중하게 살피건 이경석이 눈가를 찌푸렸다.
“김지훈 선생, 이쪽에서는 박리하기 힘들 것 같은데 그쪽에서는 어때?”
환자의 우측에 서는 집도의에겐 좌측 부분이, 반대편에 선 퍼스트에겐 우측 배 속이 잘 보일 수밖에 없다. 복막을 들어 올린 김지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박리할 공간이 보이긴 하는데 만만치 않겠어요. 이렇게 심하게 들러붙는 경우는 처음 보네요.”
“김지훈 선생이 그쪽에서 먼저 박리해.”
“알겠습니다. 간호사, 켈리 주세요.”
조심스럽게 기구를 받은 김지훈이 복막에 들러붙은 소장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 때 누군가 수술실 문을 조용히 열었다.
지동훈 교수가 조용히 신현수 옆에 섰다.
누군가를 찾는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찡그리다 이내 수술대로 눈을 돌렸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손을 움직였다.
소장의 일부가 복막을 따라 단단히 붙어있었다.
마치 접착제를 이용해 일부러 붙인 것처럼 바늘 끝조차 들어갈 틈이 없었다.
켈리로는 위험했다.
“너무 심하네요.”
끝 부분이 훨씬 작고 가는 모스키토를 사용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힘을 과하게 주면 소장이 찢어진다.
심한 경우 소장에 구멍이 날 수도 있다.
마치 간을 자를 때처럼 조금씩 조직 사이를 벌려 간신히 복막과 소장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약간의 여유를 얻었다.
기구 사용이 용이해졌을 뿐 어려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10여 분이 훨씬 지나서야 한쪽 손 일부를 넣을 수 있었고 다시 그만큼의 시간을 소모한 끝에야 복막에 붙은 소장을 떼어냈다.
이제 복막의 삼분의 일 정도 열었을 뿐이었다.
“후우!”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확실한 공간이 확보되자 이경석이 바로 손을 이어갔다.
“보비! 타이!”
위험하지 않은 흉 조직은 망설이지 않고 보비로 잘라냈다. 혈관이 있는 부분만 타이를 해가며 공간을 확보하고 복막을 열었다.
가운데에서 위쪽으로 명치 부분까지 열었다. 이제 암이 발생한 부위와 근접한 배꼽 아래 부분만 남았다. 손을 넣어 복막 안쪽을 확인하던 이경석이 눈가를 찌푸렸다.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소장이 들러붙은 곳이 또 있었다.
누구도 이렇게 심한 흉을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선생님이 박리하는 게 안전하겠습니다.”
무난하게 진행되던 수술이 다시 어려워졌다.
이경석이 한참을 씨름한 끝에 복막을 모두 열었다.
여기까지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제야 이혁원과 강병옥이 리트랙터를 걸었다.
복벽을 당기는 순간 모두들 말을 잃었다.
이경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우! 예상은 했지만 너무 심하네.”
복막에서 떼어낸 소장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장과 남은 소장이 말 그대로 한 덩어리였다. 전이가 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암이 발생한 부위에 접근하려면 일일이 다 풀어주어야 했다.
“모스키토! 켈리! 타이! 보비!”
쉬지 않고 대장과 소장을 분리했다.
너무 단단하게 붙은 부분은 손상을 피할 수가 없었다. 구멍이 난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부분은 봉합까지 해야 했다. 이런 부분의 조직은 의외로 약하기 때문에 수처를 하는 이경석이나 타이를 하는 김지훈이나 조금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모자가 축축하게 젖을 무렵에야 모두 분리해냈다.
재발 이외에 원격 전이까지 발생했을까?
다행히 그런 부분은 보이지 않았고 암 발생 부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암이 발생한 상행 결장을 자르고 에스 결장과 평행 결장을 연결한 부분이었다.
암은 물론 주변 조직까지 돌처럼 딱딱했다. 비대해진 임파선이 포함된 장간막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정확한 해부학적 구조를 파악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수술 전 세운 계획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원론적으로만 맞을 뿐이었다.
그동안 공연히 경험을 쌓은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배를 열면서 이미 짐작했던 일이기도 했다. 복막을 열 때부터 전해진 묵직한 저항감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다시 수술 계획을 잡아야 했다.
이미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기에 주어진 여유는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최종 결정을 해야 하는 이경석이 말없이 암 발생 부위를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김지훈은 물론 신현수와 지동훈 교수도 생각에 잠겼다.
“김지훈 선생,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일단 해부학적인 구조부터 명확하게 파악하고 자를 위치를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계획한 대로 종양 제거를 하부에서 시작하는 건 상당히 위험해 보입니다.”
“그렇지? 평행 결장 쪽을 먼저 자르고 상부 쪽부터 박리해서 들어내는 것이 확실할 것 같다. 신현수 선생,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겠지?”
신현수가 복부 CT를 다시 확인했다.
“사진하고 비교해 볼 때 지금 결정한 대로 진행하는 것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펠로우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모든 수술은 공통의 원칙을 따라 진행한다. 재발한 위암이든 대장암이든 원칙만 지킨다면 실패할 위험을 충분히 줄일 수 있다.
이를 확실하게 숙지한 적절한 판단이었다.
“지동훈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동훈 교수가 눈을 깜빡였다.
의견을 물을 줄은 몰랐다.
스스로 판단하기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단 하나의 위험 요소라도 줄이기 위한 물음일 것이다. 외과 의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품성 중 하나였다.
“나도 이 상황에서는 똑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경험이 많은 외과 의사도 동의를 했다.
더 이상 주저하거나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 선생, 진행하자. 켈리.”
아직도 서로 들러붙어 있는 장간막부터 확실하게 정리했다. 평행 결장과 에스 결장으로 가는 장간막을 확인하고 그 속에 숨은 동맥을 찾았다.
“평행 결장부터 자릅시다. 동맥 잡습니다.”
따르륵!
굵은 동맥을 이중으로 묶었다.
혈류를 공급 받던 부분의 대장 색깔이 변했다.
잘라야 할 부위가 정해졌다.
이미 일차 수술을 했던 부분이기에 대장 주변을 박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김지훈과 이경석은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가 인정하는 펠로우이자 수제자다.
서로에 대한 신뢰는 끈끈하고 확실했다.
빠르다.
과감하다.
정확하다.
두 개의 손이 서로를 믿고 어울리자 웬만한 어려움은 장애가 되질 않았다. 각자 복막을 열 때와는 사뭇 달랐다.
어느새 평행 결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장겸자.”
따르륵! 따가각!
평행 결장을 잘랐다.
이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해야 한다.
잘린 면을 깨끗하게 처리하고 암이 발생한 부분을 향해 박리를 시작했다.
주변 조직이 점점 단단해졌다.
암이 퍼진 것인지 염증 때문인지 확실하게 구분해야 했다. 이경석이 수시로 의견을 물었다. 염증이나 부종으로 보인다며 계속 진행하자던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더 이상은 염증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후복막을 제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경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재발한 자리에서 7센티미터 이상 떨어진 부위였다. 하부 박리까지 고려하면 무려 10센티미터에 달하는 후복막을 박리 제거해야 했다.
가뜩이나 마른 환자였다.
후복막에 지그시 손을 가져가자 벌떡벌떡 뛰고 있는 복부 대동맥이 만져졌다. 대장과 소장 그리고 콩팥으로 이어지는 동맥이 나오는 자리였다. 복부 CT에서는 중요 동맥과 떨어진 부분에서 전이 소견이 보였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었다.
‘지훈아, 믿는다.’
‘형, 걱정 말고 갑시다.’
이경석과 김지훈이 눈빛을 교환했다.
뒤섞인 긴장과 불안 사이로 믿음과 자신이 자리했다. 이경석이 손을 내밀다 말고 눈가에 힘을 주었다. 고경아가 말도 하기 전에 필요한 기구를 정확하게 건네며 강한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고 간호사, 제수씨, 고마워요.’
‘선생님, 충분히 하실 수 있어요.’
신현수, 이혁원, 지동훈 교수의 눈빛도 다르지 않았다. 바로 옆에 서 있어 볼 수 없지만 강병옥도 그럴 것이다. 치솟는 긴장과 반대로 불안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경석이 자신 있게 수술 부위를 잡았다.
“후복막 박리 들어갑니다. 이혁원 선생, 집중해서 시야 확보해 주고 후복막 박리 끝날 때까지 출혈에도 바짝 신경 써야 돼. 시작합시다.”
잘린 평행 결장을 한쪽으로 밀고 조심스럽게 후복막 일부를 절개했다. 확실히 다른 부분보다 출혈량이 많았다. 조그만 상처를 따라 맺힌 새빨간 피가 거즈를 제법 적셨다.
“보비! 타이!”
전기 소작기로 지지고 가는 실로 묶었다.
지방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른 환자는 대부분의 경우 상대적으로 수술하기 용이하다. 그러나 이번 수술은 결코 쉽지 않았다.
너무 말라 박리할 부분과 복부 대동맥이 생각보다 가깝게 붙어있는 양상이었다. 심장 박동을 따라 수술 부위가 불쑥 불쑥 움직일 정도였다.
날카로운 기구를 사용할 때마다 이경석이 좀처럼 진행하지 못했다. 타이를 하는 김지훈도 마찬가지였다. 자칫 실을 끊어 먹거나 아니면 실에 묶인 조직을 뜯어낼 판이었다.
신중의 신중을 기해야 했다.
‘오상익 선생님 수술할 때 주변 구조를 확실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예상하기 힘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네. 마른 환자의 문제점을 반드시 기억해 놓자.’
다행히 다른 문제는 없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김지훈과 이경석의 경험은 어려움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콩팥 동맥이 나오는 부분이 보였다.
이경석이 주춤거렸다.
사소한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가슴이 떨릴 정도였지만 혈관 수술 역시 생각 이상의 경험을 가진 김지훈이었다.
“선생님, 이 부분은 과감하게 박리하시고 여기만 주의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퍼스트로서 집도의를 안심시킬 수 있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때론 살짝 신호를 주며 과도한 움직임을 막았다. 김지훈의 경험과 실력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콩팥 동맥을 덮고 있는 후복막을 박리했다. 고비를 넘긴 이경석이 마취과 간호사를 보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달라는 소리였다.
“김지훈 선생,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되겠지?”
“예. 계속 진행하시죠.”
어느 한 부분도 방심할 수 없었다.
켈리를 수없이 움직였다.
툭하면 타이를 해야 할 정도의 출혈이 발생했다.
실력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한 차이가 나긴 하지만 사실 이경석이 아니라 송재덕 교수가 와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힘들긴 해도 이 정도면 무난한 진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경석 또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수술 팀의 집중도가 떨어질 때였다. 더구나 남은 과정은 지금보다 더 어렵고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적절한 주의를 줄 필요가 있는 시점이었다.
“이혁원 선생, 아직 한참 남았어. 힘들어도 시야 확보에 집중해야 한다. 이 부분 중요한 거 알지?”
이경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지훈이 손을 확 집어넣으며 소리쳤다.
“간호사, 거즈. 이혁원, 강병옥, 움직이지 마.”
이경석이 눈을 부릅뜨며 흠칫 놀랐다.
피다!
후복막이 빠르게 물들어갔다.
생각보다 굵은 혈관이 터졌다.
이경석은 물론 김지훈도 위험 구조물을 생각하지 못했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부주의한 손길도 아니었다.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출혈 부위를 압박하던 김지훈이 손을 뗐다.
여전히 출혈량은 줄지 않았다.
혈관을 잡으려던 이경석이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 거즈로 압박을 가했다. 김지훈도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훈 선생, 설마 상장간막 동맥은 아니겠지?”
이번 수술의 후복막 박리 중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은 상장간막 동맥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상장간막 동맥은 대장과 소장에 혈류를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혈관이기에 절대 손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수술 전에 충분히 숙지했다.
이경석이나 김지훈도 지금쯤 상장간막 동맥이 나올 것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고 이경석의 실수도 없었다.
출혈이 만만치 않았다.
설마 상장간막 동맥이?
일순 강한 불안감이 감돌았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준 채 수술 부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상익 교수의 수술을 상기하며 주변 구조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상장간막 동맥이면 출혈을 감당할 수 없고 위치도 맞지 않아. 조금 더 밑에 있어야 해. 그렇다면 척추 쪽으로 나가는 동맥 분지일 가능성이 높아. 내 판단이 맞는다면 묶어도 상관없어.’
“아닌 것 같습니다.”
“확실해?”
이경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척추 쪽 근육으로 주행하는 동맥 분지일 가능성이 높아요. 교차 혈류가 충분해 묶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혈관이니까 이 부분을 수처해서 출혈이 멈춘다면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김지훈이 출혈 부위와 조금은 떨어진 부분을 가리켰다.
사람에 따라 혈관 주행은 조금씩 다 다르다.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에 근거한 말이어야 했다. 약간은 우려하는 이경석의 눈빛에 김지훈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경험 차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설령 출혈 원인이 아니라고 해도 제가 가리킨 부분에는 위험 구조물이 없습니다. 안심하고 수처하시면 됩니다.”
당장 출혈을 잡아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입술을 꽉 문 이경석이 눈빛을 굳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지훈이를 못 믿으면 이 수술은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어. 잘못된 판단을 할 지훈이가 아니잖아.’
“수처 주세요.”
이경석이 과감하게 김지훈이 가리킨 곳을 깊게 떴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타이를 했다. 염증과 부종이 발생한 조직이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쉽게 찢어질 것이다.
만일 그때 동맥이 함께 손상을 받는다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묶어도 지장 없는 혈관이라는 말이 끊어져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모든 감각을 동원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로지 실에서 전해지는 감각에만 집중했다.
조직 속으로 파고드는 실에서 저항감이 느껴졌다
‘조금 더 조여야 돼.’
결코 말이나 글로는 알 수 없는, 오직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감각이었다.
“컷!”
출혈 부위를 조심스럽게 닦고 강한 압박을 유지했다.
일 분이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거즈를 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