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66화 (666/1,329)

10화. 펠로우의 힘. Ⅱ (1)

이 정도로 감정이 나빠졌다면 하윤호 교수와 함께 수술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스트레스일 것이다.

“김지훈 선생, 많이 힘든가?”

“개인적으로 힘들지 않다고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더 걱정이 되는 것은 환자입니다. 하윤호 선생님이 응급실 당직 설 때 불안함을 느끼는 제가 잘못된 걸까요?”

“환자 때문이라고?”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환자 문제가 가장 중요해?”

“우리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또 있습니까?”

김지훈이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도 하윤호 선생 역시 교수인데 수술까지 들어갈 이유가 있나?”

“처음에는 하윤호 선생님 말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환자 때문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퍼스트를 설 수밖에 없고요.”

지동훈 교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얼마 전 벌어졌던 일이 새삼 떠올랐다.

아뻬 순서가 바뀐 일은 얼마든지 지나칠 수 있었다. 윗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져 서로의 입장이 곤란해지면 아랫사람이 더 손해 보기 마련이다.

굳이 문제를 만들지 않은 것이 유리했다.

곧 전임이 되어야 할 펠로우라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입 다무는 것이 확실히 신상에 좋았다. 사람은 보통 그렇게 행동한다.

이를 모를 정도로 눈치 없는 김지훈도 아니었다. 그런데 강병옥을 호되게 혼냈고 그 결과 박승준 교수까지 나서야 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환자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는 행동과 말을 보면 가장 무난해 보이지만 나서야 할 때는 결코 물러나지 않을 사람이야. 김지훈 선생, 마음에 든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야.’

“김지훈 선생,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았어. 그 마음 참 좋은데 급하게 생각하지는 마. 주변 사람이 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결정을 내렸을 때 움직여. 치사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때는 나도 기꺼이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다들 깜짝 놀랐다.

오늘은 놀랄 일투성이였다.

별다른 관계가 아니라고 했지만 이 정도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김지훈이 잠깐 숨을 돌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환자는 당면한 문제고 이왕 말 나온 김에 부탁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그때까지 별 문제가 없을까요?”

“김지훈 선생이 고생해야지. 하 교수에게 그 손을 빌려줄 수 있으면 제일 좋고. 어이쿠! 말이 길어졌네. 이제 가봐야겠네. 이경석 선생, 내일 수술 잘해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오간 말은 비밀로 합시다. 그게 좋겠죠?”

지동훈 교수도 더 이상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함께 수술 문제 해결하자는 말까지는 무리겠지?’

재촉할 일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들어가십시오.”

지동훈 교수가 나가자 신현수와 이경석이 동시에 김지훈을 보았다.

“엉뚱한 일 생길까 봐 불안해서 죽는 줄 알았네. 지훈아, 그런 얘기는 우리하고 상의부터 하고 했어야지.”

“미안해요. 안 그래도 내일 수술이 끝나고 난 뒤 말하려고 했는데 지동훈 교수님 말을 듣는 순간 오늘이 기회라는 생각이 딱 들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현수야. 미안하다.”

“이게 미안해 할 문젠가? 말 잘했어. 덕분에 지동훈 선생님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됐잖아. 마음이 좀 놓인다.”

말이 나온 참이었다.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했다. 금경태를 필두로 수준 미달의 교수를 여럿 봤고 이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교수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신중함은 절대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도 그렇긴 해. 현수야. 궁금한 게 하나 있어? 전임이 되면 자동적으로 조교수까지 올라가는 건가? 중간에 심사 이런 거 없어?”

신현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하윤호 선생님 발목 잡으려고?”

김지훈이 얼굴을 굳혔다.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으면 그래야지. 이 상태로 가면 언젠가는 환자 잡을 사람이야. 그것도 모자라 후배들에게 책임을 전가할지도 몰라.”

“너는 괜찮고?”

“나? 후배 지켜주지 못하면 교수 자격이나 있을까?”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내가 교수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나? 지훈아, 그렇다고 해도 성급하면 절대 안 돼.’

“아마 심사가 있긴 있을 거야. 경우에 따라 직접 말해야 할 수도 있을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그렇게 되면 너한테 최악의 상황이야.”

“같이 옷 벗어야 하나?”

“그럴 수도 있어. 하성원 선생님이 중앙 의료원 원장님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지? 자기 조카를 그냥 두고 볼까? 체면이라는 것도 무시 못한다.”

엄포만은 아닐 것이다. 재단 이사장이라고 해도 의사들 인사 문제는 관여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 이미 체계 자체가 변한 상황이기도 했다.

“지훈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이런 문제로 심사가 벌어질지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자칫 내부 고발자 취급까지 당할 수 있어. 우리야 함께 하겠지만 다른 과 선생님들은 색안경을 낄 수도 있다는 말이야.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잖아.”

“맞아. 지금은 그런 생각 하지도 마.”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지금부터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왜 이렇게 심각해? 너무 나가지 마. 나도 몸 사릴 때는 사리는 사람이야.”

‘생각해 보니까 겁이 나긴 하네. 하윤호 교수와 맞바꾸기에는 내 인생이 아깝다. 완전히 손해잖아. 그래도······.’

잠시 입맛을 다시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형, 내가 무식하게 앞으로 돌진만 하는 놈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환자나 후배에게 문제 생기면 그땐 정말 옷 벗을 각오로 덤빌 겁니다. 실력 없는 의사가 왜 죄악인지 이제 좀 알 것 같네요. 성격이나 좋으면 몰라.”

“실력이 없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아?”

“좋은 지도 모르겠어요. 고맙다고 말은 하는데 그런 생각이 하나도 안 들거든요. 얄미운 것과 나쁜 건 다른 건가? 별게 다 헷갈리네.”

이경석이 김지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단 하나의 수술로도 마음이 안 좋은데 하윤호 교수의 모든 수술을 다 들어가고 있는 김지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지훈, 무던히도 참는 것 같지만 너 은근히 무서운 놈이야. 무서워. 어휴! 이제 그 얘기 그만하고 내 발등의 불부터 끄자.”

“그래요. 시간 많이 잡아먹었네. 빨리 시작하죠.”

펠로우 세 명이 머리를 맞대고 최종 점검을 했다.

그 시간 지동훈 교수가 박승준 교수를 만나고 있었다.

“지 교수, 내가 이경석 수술을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어? 펠로우들끼리 잘 알아서 하겠지.”

“선생님, 함께 가야 할 동료들입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시면 안 됩니다.”

“웬만한 수술이면 나도 기꺼이 도와줬어. 그렇게 심각한 환자를 두고 저 혼자 한다고 설쳐? 세 달 내내 옆에 끼고 가르친 사람이 누군데 말이야.”

“선생님 고생하신 건 잘 압니다만 각자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하셔야 합니다. 작년까지 대장 수술을 혼자 한 이경석 선생입니다. 여기서 보듬지 못하면 우리가 병원을 옮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박승준 교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제길! 동훈이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하윤호 말도 무시할 수 없잖아. 확실하게 경고를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떤 방법이 좋을까? 지금에 와서 관심을 보이고 도와준다고 해서 내 말을 잘 들을까?’

“선생님, 펠로우들을 절대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병원에 근무하는 이상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박승준 교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신현수 눈치가 이상해?”

김지훈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펠로우들 실력이 생각 이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초장에 확실히 잡아야지. 아차하면 우리 머리 꼭대기에 올라설 수도 있어.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신현수가 이사장 아들이고 누구와 더 친한지 잊지 마. 마지막까지 믿을 사람은 지 교수와 나 뿐이야.”

다른 해석이었다.

지동훈 교수가 답답함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박승준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대화를 끝냈다.

“알았어. 내일 수술은 지켜볼게.”

“잘 생각하셨습니다.”

마지못한 모습에 지동훈 교수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지금도 환하게 밝혀진 연구실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퇴근을 안 했나? 실력과 열정을 모두 갖췄어. 우리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후우!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가장 존경했던 분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꾸 변하시네. 박승준 선생님.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제가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한숨이 멈추지 않는 밤이었다.

내심 이경석과 김지훈이 수술을 잘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재발도 모자라 후복막까지 침범한 암은 오늘 시행한 직장암 이상으로 어려운 수술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도 펠로우들의 치열한 밤이 깊어갔다.

다음 날 김지훈이 서둘러 수술 방으로 향했다.

이경석이 보호자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초조한 할머니는 선생님 소리만 했고 아들 내외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모두 다 행색이 초라했다. 아들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며느리의 손은 거칠었다.

“반드시 제거해 아버님이 불편 없이 사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우리 아버님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변변치 않아 지금도 잘 모시지 못하지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의 말에 며느리가 눈가를 훔쳤다.

“조금만 신경을 썼어도 빨리 병원에 오셨을 텐데 너무 죄송해요. 많이 아프셨을 텐데 걱정 말라는 말씀만······.”

“에미야, 네 탓 아니야. 다 내가 못난 탓이야. 영감하고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뭘 보고 살았는지. 내가 멍청해서 미안하다. 선생님······.”

보호자들의 안타까움과 슬픔을 누가 알까?

이경석이 심난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보호자 중 한 분은 언제든 연락을 받을 수 있도록 수술 방 앞에서 대기하셔야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연히 기다려야죠.”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보호자는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암이 재발한 환자를 수술할 때 가장 우려되는 일은 손도 대지 못하는 경우였다. 아무리 정밀한 검사도 배를 열고 직접 보았을 때 소견과 다른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할 리가 없어. 재수 없는 생각 말자.’

이경석과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다.

앙상하게 마른 환자가 수술대 위에 누워있었다.

한평생 따가운 햇볕에 그을리고 한겨울 찬바람에 시달려 새까매진 얼굴과 불안한 눈빛에 가슴이 아팠다.

이경석이 나직한 목소리로 환자를 안심시켰다.

이혁원, 강병옥과 함께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

잠시 후 참관을 하며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기로 한 신현수까지 들어왔다. 사실 펠로우 세 명이 모두 들어갈 상황은 아니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마취가 시작됐다.

김진호 교수가 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마취를 유도했다. 고령인데다 수술 시간이 길 수밖에 없는 재수술이기 때문이었다.

수술 가운을 입고 각자 자신의 자리에 섰다.

집도의 이경석.

퍼스트 김지훈.

세컨 이혁원.

써드 강병옥.

수술실 간호사 고경아.

그리고 참관을 하는 신현수까지.

김지훈이 수술 팀을 보며 눈빛을 굳혔다.

펠로우들이 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수술 팀이었다. 언젠가는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가 함께 하는 수술 팀조차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그것이 바로 스승들이 원하는 바일 것이다.

환자의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경석이 김지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 팀과 신현수에게 눈길을 주었다.

결코 쉽지 않은 수술이었지만 반드시 해내야 했다. 수술 전 있었던 모든 일은 깨끗이 잊고 오직 수술에만 집중해야 할 때였다.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됩니까?”

“시작하셔도 됩니다.”

“메스!”

명치부터 배꼽 아래까지 복부 한가운데에 난 첫 수술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굵은 지렁이처럼 붉고 두둘두둘 솟아오른 흉을 도려냈다.

너무 말랐다.

기름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좌우 복벽을 연결하는 백색선이 바로 드러났다.

백색선을 양쪽에서 잡고 들어올렸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느낌이 다른 수술과 달랐다.

묵직한 저항감이 전해졌다.

이경석이 조심스럽게 1센티미터 정도 절개했다.

복막이 보였다.

첫 번째 수술로 인해 배 속에 비닐 막처럼 반투명의 얇은 흉 조직이 생겼을 것이다. 그로 인해 장기들이 복막에 들러붙은 것은 물론 한 덩어리로 뭉쳐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함부로 복막을 열었다가는 소장이나 대장에 손상을 줄 수 있다.

극도로 주의해야 한다.

복막을 열었다.

살짝 배 속이 보였다.

동시에 답답한 소리가 터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