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펠로우의 힘. Ⅰ (2)
복강경으로 하던 개복을 하던 목적은 결국 담낭을 제거하는 것이다. 절개창의 크기가 절대적인 요인이라면 복강경은 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가장 긴 기구를 이용해 최대한 배 밖에서 조작하면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할 때만 손을 쓴다면 위험도도 한결 감소할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이런 바보가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매주 라파로를 하면서 어떻게 응용할 생각을 못했을까? 바보가 따로 없네.’
어쨌든 희망이 보이며 불끈 힘이 났다.
“김진호 선생님, 감사합니다. 간호사. 기구 가장 긴 걸로 모두 바꿔주세요. 다시 시작합시다.”
김진호 교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켈리부터 보비 팁(tip)까지 모든 수술 기구를 가장 긴 것으로 준비했다. 통상 사용하는 기구가 아니라 어딘지 어색해 보였지만 지금은 최상의 선택이었다.
복강경 수술 때는 더 긴 기구에 조작 범위까지 제한된다. 이 정도 쯤은 상당히 쉽게 조작할 수 있었다. 수술 방법도 복강경 수술을 응용하면 된다.
따르륵!
롱켈리로 간을 싸고 있는 막 일부를 잡았다.
“진우야, 리트랙터 세게 끌지 않아도 되니까 남은 손으로 간을 위쪽으로 당겨. 종수 너는 세게 끌어야 한다.”
시야는 여전히 좁았지만 필요한 공간을 확보했다.
복강경 때와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담낭 벽을 박리했다. 집도의의 어려움은 거의 사라졌다. 반면 나종진은 다소나마 상황이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다.
“타이!”
나종진의 손이 배 속 깊숙이 들어갔다.
타이할 부분이 최대한 보일 수 있도록 조취를 취했지만 나종진 자신의 손에 가려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어렵다.
타이 몇 번으로 나종진의 이마가 흠뻑 젖었다.
‘침착하게 지금처럼만 해.’
어렵지 않게 담낭 동맥과 담낭관을 잡았다.
가장 깊숙한 곳이다.
가장 위험한 구조물이다.
퍼스트에겐 최악의 난이도를 가진 타이였다.
혹시 실수할까 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스승을 비롯해 모든 교수들은 항상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집도의가 수술 팀에게 가져야 할 신뢰다.
시야를 최대한 확보해 주고는 믿고 기다렸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잘린 동맥과 담낭 관을 확실하게 묶었다.
간과 붙어있는 마지막 부분을 박리하고 담낭을 끄집어냈다. 중간에 고전했던 부분을 제외하고는 깔끔했다. 어렵지 않게 마지막 마무리를 했다.
작은 절개창 덕분에 피부 봉합까지 빠르게 끝났다.
애초보다 1-2센티미터 늘어나 8-9센티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리트랙터로 힘차게 복벽을 끌어당긴 탓에 피부가 늘어난 것이다.
배를 여는 수술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됐든 개복치고는 상당히 작았다.
“종진아, 힘들었지?”
“타이가 점점 어려워지네요. 그래도 선생님보다 훨씬 편하고 쉽게 한 것 같습니다.”
“내가 그렇게 힘들어 보였어?”
나종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송진우의 얼굴은 왜 또 붉어질까?
시계를 보니 두 시 반이 훌쩍 넘었다.
평소처럼 열었을 때보다, 이미 실력 없다고 판단한 하윤호 교수보다 4-50분 이상 오래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시도한 방법이기에 만족할 수 있었다.
마취 시간까지 길어지고 스스로 자초한 고생이지만 그만큼 환자에게 득이 되기를 바랐다.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지 기대 반 불안 반이기는 했다.
그 때 뜻밖의 얼굴이 보였다.
수술실에서 가장 보기 힘든 하윤호 교수였다.
대충 걸친 마스크 위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최근에는 김지훈의 수술을 참관한 적이 없으니 일부러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직장암 환자 수술을 보러 들어왔다가 들렸을 것이다.
스윽 시계부터 쳐다보았다.
“어? 미니콜레로 했네. 언제 시작했어?”
“12정도에 시작했습니다.”
“김지훈 선생, 보기보다 힘들지? 3-40분 안에 담낭 제거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아. 처음이니까 시간이야 당연히 오래 걸릴 수밖에 없고. 내 수술 열심히 보고 반복해서 하다보면 금방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럼 그렇지. 너도 펠로우의 한계를 보이는구나. 미니콜레가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그동안 수술 때문에 이리저리 신경 쓰였는데 이렇게 되면 할 말이 좀 생기는 건가?’
득의의 미소다.
“몇 번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닌데 김지훈 선생 실력은 알아줘야겠어. 확실히 눈썰미가 있네. 이왕 시작한 김에 다음에도 내 수술 꼭 들어와. 그러면 지금보다는 쉽게 할 수 있을 거야.”
하필이며 이때 미니콜레를 했을까?
하윤호 교수를 통해 미니콜레라는 수술 방법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을 뿐 도움받은 것은 없다. 굳이 찾는다면 인내심을 기를 수는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잘됐네. 라파로 같이 하는 대신 미니콜레를 가르쳐 주면 나나 김지훈 선생에게 서로 득이 되잖아. 좋다. 그렇게 하자.”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꼴값을 떨어요. 지금 다른 사람 가르치고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요.’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실력 없는 윗사람이 이렇게 갑갑할 줄은 몰랐다. 말이라도 겸손하게 하면 모를까 누가 보면 꽤나 수술 잘하는 줄 알 것이다.
솔직히 뻔뻔하게 느껴졌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모르는 건지 알고도 무시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대해야 할지 점점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교수로서 실력을 갖출 수 있을까? 이 상태가 지속되면 병원에 남아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일단 내일 수술부터 잘 끝내고 상의해야 되겠다.’
김지훈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하윤호 교수가 실실 웃으며 수술실을 나갔다. 직장암 수술과 미니콜레가 동시에 끝나 수술 방 복도가 부산해졌다.
모든 환자가 무사히 마취에서 깨어났다.
김지훈이 병실로 올라가 환자를 보는 동안 박승준 교수도 신임 교수들과 특실에 있었다. 많은 대화가 오고 가는지 병실에서 나왔을 때까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좋은 일인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그나저나 미니콜레로 하기를 잘 했어. 다음번에는 더 확실하게 할 수 있도록 고민 많이 해야겠다.’
뒷목이 이상스럽게 뻐근했지만 오늘도 한가한 날이 아니었다. 내일 있을 대장암 환자 수술을 최종 점검하기로 했다. 부지런히 일과를 마치고 연구실로 향했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들어왔다.
“형, 수술 잘됐죠? 특별한 말은 없었어요?”
“너도 중간까지 봤잖아. 언제 봐도 깔끔하고 간결해. 송재덕 선생님 방식하고 섞을 수만 있으면 정말 완벽할 것 같다.”
그건 김지훈이나 신현수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제 말은 그게 아니잖아요.”
“에이! 뭐 특별하게 나눌 말이 있는 일이야? 그건 그렇고 너 오늘 오후에 미니콜레 했다며? 잘한 것 같긴 한데 느낌이 별로 좋지는 않다.”
“왜요?”
“네가 더 잘 알잖아. 빌미가 될 수도 있겠어. 현수야, 그런 생각 안 들어?”
“걱정할 일이 아닌데 솔직히 걱정되고 하윤호 선생님이 어떻게 반응할지 신경도 쓰이네요. 지훈아, 어렵진 않았어? 네가 인정할 정도의 의미가 있으면 위장관도 적용할 수 있는 수술이 있을 것 같은데 해 보니까 어때?”
갑자기 화제가 바뀌었다.
지난 3개월 동안 하윤호 교수는 점점 주변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이경석과 신현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 모인 이유는 그게 아니다.
대가는 이미 피눈물 나게 치렀다.
“그 문제는 일단 내일 수술 상의부터…….”
그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동훈 교수였다.
“선생님, 웬일이십니까?”
“늦은 시간에 미안해. 할 얘기가 있어서 들렸어.”
의아한 일이었다.
3개월 동안 친해졌다고 해도 조금은 데면데면한 면이 남아 있었다. 파트가 다른데다 평소 조용한 교수였는데 무슨 일인지 최근 들어 더욱 말이 적어진 탓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지동훈 교수가 한동안 머뭇거리다 이경석을 보았다.
눈가에 근심이 스쳤다.
‘지금이라도 셋이 모여서 솔직하게 말하면 분위기를 충분히 풀 수 있을 텐데 난감하네.’
“이경석 선생, 오늘 수술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내가 대신 말하기는 뭐하지만 박승준 선생님이 이경석 선생을 못 믿어서가 아닙니다. 힘든 수술을 앞두면 오랫동안 손을 맞췄던 사람을 찾기 마련이죠. 일반외과 의사들이 그렇잖아요?”
교수가 펠로우에게 존댓말을?
‘어? 커피 타임 때도 그랬나? 왜 기억이 안 나지?’
직위를 떠나 비슷한 나이이기에 존중하는 모양이었다. 이경석도 어색해 하지 않았다. 문득 3개월이나 지났는데 이경석과 지동훈 교수의 관계가 어떤지 이제 알았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말씀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훨씬 환자에게도 유리할 겁니다.”
“오늘 수술실에 들어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동안 파트가 다르다는 핑계로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봤는데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김지훈 선생, 신현수 선생, 오늘 일로 혹시 오해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풀었으면 좋겠어. 펠로우라고 다른 생각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박승준 선생님과 함께 일한 세월만 십 년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줬으면 해.”
조용한 목소리였다.
눈빛은 진지하기만 했다.
지금이 지동훈 교수의 본모습일까?
이경석은 입을 다문 채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김지훈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이다. 지동훈 교수의 진솔함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미 오고 간 말이 있다. 서로의 마음속에 앙금이 남으면 지동훈 교수의 말은 무의미했다.
오해라고 해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때론 돌직구가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다.
어쩌면 하윤호 교수 때문일지도 몰랐다.
‘형, 본인이 직접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김지훈의 눈짓에도 이경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사자기에 입장이 곤란할 것이다. 신현수 역시 지동훈 교수를 보며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형이 못하면 나라도.’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해가 있다면 당사자가 직접 설명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현수가 흠칫 놀라며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이 소리 소문 없이 변해 있었다.
‘예전에는 분명히 가장 먼저 이해하고 넘어갔을 텐데 이젠 아예 대놓고 얘기하네. 박승준 선생님에게도 그러더니 지훈이가 확실히 달라졌어. 신뢰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럴까? 아니면 교수가 됐기 때문에?’
지동훈 교수의 눈가에 곤란함이 스쳤다.
‘역시 김지훈 선생이 그냥 넘어가질 않네. 하윤호 때문에라도 우리에 대한 감정이 좋지만은 않을 거야. 나나 박승준 선생님이나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똑같아 보이겠지. 후우! 앞으로가 정말 문제야. 하성원 원장님은 하윤호를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 걸까?’
“김지훈 선생 말이 맞아. 그런데 박승준 선생님은 의외로 자기 마음을 쉽게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야. 행동으로 보여주는 타입이랄까? 수술 욕심까지 많으셔서 얼핏 보면 오해하기 십상일 수도 있어. 이제 세 달밖에 안 됐으니까 우리 조금 더 신중하게 서로를 알아갔으면 좋겠어.”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애써 핑계를 대는 것 같지도 않았고 지동훈 교수가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일부러 찾아온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한 가지 의문을 풀고 싶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더 심각한 얘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신중해야 했다.
신임 교수들 간의 친분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면 자칫 역효과를 낼 수도 있었다. 반면 지동훈 교수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언제 또 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지금이 첫 번째 기회일 수도 있었다. 거꾸로 김지훈이 자신이 문제를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때 문득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난 지금 교수로서 지동훈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곪아 터지기 전에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야.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현수나 경석이 형과 미리 상의 좀 할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결정을 내렸다.
하윤호 교수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은 간담도 파트에 국한된 일이지만 언제 일파만파로 퍼져 나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김에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럼 당연하지. 무슨 얘긴데?”
다시 한 번 고민했다.
진지한 지동훈 교수의 얼굴을 보며 결정했다.
‘말을 해도 될 것 같다. 어차피 지금 문제가 될 말이라면 나중에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어.’
“하윤호 교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또 깜짝 놀랐다.
지동훈 교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나?”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만 수술 때문에 당황스럽습니다. 공교로운 일인지 모르지만 동시에 근무를 시작하셨고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이 필요하기도 해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속에 담긴 의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신중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말인지 대충 짐작은 해. 하지만 나도 하성원 원장님 조카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는 게 없어. 수술하는 걸 직접 본 적도 없고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
지동훈 교수로서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에둘러 말했지만 하윤호 교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굳이 하성원 원장의 조카라는 사실을 언급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코 우호적인 시각이 아니었다.
김지훈도 적나라한 말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말씀이시네.’
길게 끌 말이 아니었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말이 없자 지동훈 교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하윤호의 수술을 보며 교수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을 한지 꽤 됐다. 다만 박승준 교수의 묘한 태도와 함부로 나서기 어려운 처지에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하윤호 교수의 뒤에 누가 있는지도 생각해야 했다.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닌 이상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문득 김지훈이 어떻게 대처할 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