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64화 (664/1,329)

9화. 펠로우의 힘. Ⅰ (1)

이경석과 눈인사를 하고 발판 위에 올라섰다.

‘입장이 곤란하다고 참관을 안 할 사람이 아니지. 역시 경석이 형이야.’

문득 옛일이 떠올랐다.

인턴 때 이경석을 처음 보았다. 상상하기 어려운 이유로 인턴을 여러 번 때려 쳤다는 말에 겁도 먹었었다. 술 한잔하며 친해졌지만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지난 세 달 동안 불평불만 없이 퍼스트를 섰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결코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도 무시하지 않기를 바랐다.

핵심적인 과정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막 암이 발생한 부분을 박리하기 시작했다. 골반 내에 위치한데다 후면 부에 직접 전이까지 동반돼 결코 쉽지 않은 부분이었다.

“지 교수, 타이 들어오고 이혁원, 아래쪽으로 접근해서 시야 확보해.”

침착한 목소리였다.

좁은 부위를 다루고 있어 참관하는 위치에서는 손을 볼 수 없다. 퍼스트를 서는 지동훈 교수나 이혁원도 거의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그 정도로 시야가 나쁜 부위다.

‘어떻게 진행하실까?’

직접적으로 보지 못해도 어시스트들의 움직임을 통해 수술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는 알 수 있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타이만으로도 상당한 압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뭔가 달라 보였다.

‘생각보다 어려워 보이질 않네. 공간 확보가 수월한가? 골반 속이 넓어봐야 거기가 거긴데.’

골반 크기가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수술하는 입장에서 보면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이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직장이 박리됐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던 김지훈의 눈이 반짝였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지동훈 교수의 손이 골반 속으로 들어올 때마다 박승준 교수는 이혁원과 함께 최대한 시야를 확보하고 있었다. 마치 집도의가 바뀐 것처럼 퍼스트에게 필요한 공간을 모두 내주었다.

이번 수술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아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수술을 그렇게 해왔다.

스승과 교수들은 물론 김지훈 역시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몸에 밴 행동일 뿐이었다. 오늘따라 그 모습이 유난히도 눈에 박혔다. 같은 신임 교수지만 하윤호 교수와는 비교조차 하기 힘든 실력 때문일지도 몰랐다.

째깍! 째깍!

1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직장 박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만큼 어려운 수술이기에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곧 다음 수술을 시작해야 한다.

환자 얼굴을 떠올리며 수술을 생각하던 김지훈이 갑자기 콧등을 찡그렸다.

중요한 것을 간과했다.

금경태에게도 배운 것이 있는데 하물며 다른 교수들에게 배울 것이 없을까?

당장 박승준 교수만 해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워도 한 부분에서 지나치게 막히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박승준 교수는 조금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손이 급해지지도 않았다. 도리어 지동훈 교수와 이혁원에게 침착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집도의가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다.

‘다들 힘들어 하지만 눈은 편해 보이네.’

가급적이면 스테이플 사용까지 볼 수 있길 바랐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곧 마취가 시작된다는 나종진의 노티까지 받은 마당이었다.

수술실에서 나와 손을 소독하고 수술용 덧 가운을 입는 내내 김지훈이 입을 열지 않았다. 수술실에 들어와서는 환자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집도의 자리에 선 후에야 힐끗 시계를 보았다.

막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개복하는 이상 2시간 정도 걸린다. 마취과야 번갈아 가며 식사하겠지만 수술 팀은 밥 먹기 글렀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고려할 사항도 아니었다. 환자를 위한 일이라면 하루 종일 굶을 용의도 있었다.

결정을 내렸다.

“마취과. 평소보다 1시간 정도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감안해 주세요.”

마취과 전공의와 간호사는 물론 수술 팀까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특별한 문제라도 있습니까?”

“미니콜레 시도할 예정입니다.”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하윤호 교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분명히 차이는 있겠지만 수술 전에 마취과에게 미리 고지하지 않은 점은 명백한 실수다. 이럴 땐 일반외과 마취를 주관하는 김진호 교수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전공의 때 배운 윤활유!

“나종진 선생, 수술 끝나고 마취과에 맥주 한 박스 올려 보내. 마취과, 부탁합니다.”

김지훈이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고는 조용히 절개할 부위를 바라보았다. 맥주 한 박스라는 말이 마취과 기분만 여유롭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하윤호 교수가 어떻게 수술하는지 정확하게 보지 못했다. 보았단 한들 큰 도움이 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미니콜레 후 환자가 보인 상대적으로 빠른 회복과 난이도를 비교할 수 없는 직장암 수술을 보며 망설임 없이 결정할 수 있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부분의 암도 제거하는데 절개창이 작은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어. 경제적인 문제로 라파로를 할 수 없는 환자에겐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제길! 말로만 환자 위했네. 이럴 줄 알았으면 불평하지 말고 잘 봐둘 걸.’

시야가 좁아지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집도의와 수술 팀 모두에게 전과 다른 방법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단단히 각오하고 시작할 일이었다.

‘나종진, 송진우, 변종수, 부탁한다.’

훅 숨을 내뱉은 김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메스!”

무영등 불빛에 번쩍이는 메스 날이 오늘따라 유난히 날카롭게 보였다. 미니라는 단어 하나가 주는 어려움은 집도를 해봐야 보다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절개할 부분의 시작과 끝을 표시했다.

7센티미터가 채 안 됐다.

비대한 환자 아뻬를 할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하윤호 교수가 수술할 때보다 더 작아 보이는 절개창에 나종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퍼스트의 불안함이 고스란히 다가왔다.

‘너무 작나? 더 열까? 아니야. 어차피 양쪽에서 잡아당기면 늘어날 테니까 일단 진행해 보고 결정하자.’

단번에 피부를 절개했다.

“보비(전기 소작기)!”

치이익! 치이익!

강한 열에 노란 지방층이 녹아내리며 선홍색 근육이 드러났다. 남자 환자답게 근육이 두툼하고 강해 보였다.

평소처럼 절개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리트랙터로 당기는 것만으로도 피부나 지방층은 쉽게 늘어난다. 반면 근육은 근이완제를 투여하고, 강한 힘으로 당겨도 얼마 늘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두꺼운 두께 때문에 복막에 가까워질수록 절개창이 점점 더 작아지는 효과까지 유발한다.

시야가 좁아지는 주요한 이유였다.

즉, 피부에서 7이 보인다면 근육을 지나며 6이 되고 복막까지 열면 5만 보이는 식이다.

이 부분은 미리 염두에 뒀다.

평소보다 근육을 더욱 길게 절개했다.

효과가 있기를 바라며 다음 과정을 진행했다.

복막까지 열었다.

송진우가 변종수에게 눈짓을 하며 리트랙터를 걸었다.

절개창이 작다는 생각 때문인지 말도 하기 전에 ‘끙’소리까지 내며 힘을 썼다.

피부와 근육과 복막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래도 좁긴 마찬가지네.’

벌겋게 부어오른 담낭 일부분이 보였다.

주변 조직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리트랙터 위치를 이리저리 바꿨다.

미니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담낭 전체와 인접한 간.

담낭관과 동맥이 위치한 부위.

반드시 확인해야 할 구조물조차 쉽게 볼 수 없었다.

“진우야, 종수야, 조금 더 끌어봐.”

끙! 끙!

용쓰는 소리가 들렸다.

무영등 초점을 맞추고 눈에 잔뜩 힘을 주고서야 주변 장기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갑갑했다.

벌써부터 어깨가 뻐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본격적인 수술 시작이다.

담낭부터 잡고 박리해야 한다.

손을 가져가다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한 손만으로도 담낭이 모두 가려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작은 절개창에 두 손을 넣은 하윤호 교수가 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 수술이 그렇게 거칠고 위험해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긴장감이 확 다가왔다.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조심스럽게 한 손을 넣어 담낭을 눌렀다.

간과 붙은 부분이 드러났다.

“켈리! 종진아, 보비 들어와.”

살살 박리를 시작했다.

담낭 벽이 간에서 떨어져 나오며 슬금슬금 피가 비쳤다.

따르륵! 따가각!

“타이!”

절개창에 인접한 가장 윗부분이기에 어느 정도 시야가 유지됐고 손을 놀릴 공간도 확보할 수 있었다.

나종진이 어렵지 않게 타이를 했다.

박리가 진행될수록 수술 부위가 점점 깊어졌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출혈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한 손으로 덜렁거리는 담낭을 밀어내고 남은 손으로 출혈 부위를 잡았다.

“타이!”

손을 넣던 나종진이 멈칫거렸다.

타이할 부분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몸을 비틀며 손을 최대한 복벽에 밀착시켰다.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절반 정도 박리가 진행됐다.

시야가 확연히 좁아졌다.

어떤 방법을 취해도 시야는 좋아지지 않았다.

손을 넣으면 손끝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당연히 모든 과정이 어렵고 위험해졌다.

‘후우! 직장암 수술할 때하고 비슷한 것 같네. 담낭을 떼면서 이게 무슨 난리지? 이제라도 더 열까?’

덜컥 겁이 났지만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실력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하윤호 교수도 하는 수술이었다. 긴장으로 슬슬 가빠지는 호흡을 조절하며 더욱 신중하게 손을 움직였다.

실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일냈다.

하윤호 교수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뚝!

마치 혈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기구를 조작하는 순간 시뻘건 피가 줄줄 흘렀다.

담낭 동맥의 분지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켈리! 켈리!”

출혈 부분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피는 계속 흘러나와 주변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야 확보가 어려운 탓에 마음과는 달리 손은 급하게 움직였다.

따르륵! 따가각!

간신히 출혈 부위를 잡았다. 타이하는 나종진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종진이 온갖 인상을 쓰며 타이를 했다.

수술 모자가 땀으로 흥건했다.

‘이 상태에서는 누가 해도 어려울 수밖에 없겠어. 박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모든 기구를 빼고 조심스럽게 수술 부위를 살폈다.

거칠고 난잡해 보여 다시 손을 대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심난했다. 김지훈의 눈에는 하윤호 교수의 수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계속 진행해도 되는 걸까?

“종진아, 힘들겠지?”

“예. 담낭을 제거한다고 해도 결국 하윤호 교수님 때처럼 마무리하는 시간만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때는 선생님이 타이하셨으니까 망정이지 저는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는 생각만 듭니다.”

나종진이 자신감을 잃었다. 리트랙터를 얼마나 세게 끌었는지 손진우와 변종수의 손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수술 팀 모두 힘든 상황이었다.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다른 수단을 찾아야 했지만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처럼 복벽을 더 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이면 어떤 의미도 없어. 다른 병원에서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미니콜레를 한다는 거지?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일까?’

이미 1시가 넘었다.

통상적으로 개복했으면 이미 담낭을 거의 다 제거했을 시간이었고 고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연히 시간만 끌었다는 생각에 환자에게 미안했고 가슴은 답답해졌다.

그 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진호 교수였다.

4시간 넘게 이어지는 직장암 수술에 잠시 휴식을 취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거의 다 끝났나? 어? 아직 담낭도 못 뗀 거야? 김지훈 선생, 라파로로 해도 지금쯤이면 끝나기 직전일 텐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왜 라파로보다 더······.”

김지훈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라파로?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윤호 교수의 손을 보며 선입견에 빠졌다. 미니콜레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스승의 말을 듣고도 말이다.

순간 빛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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