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배울 것은 배우자. (1)
목소리까지 슬쩍 높아졌다.
“예? 다른 병원에서 수술받는데요?”
이경석이 씨익 웃었다.
“다음 주 금요일에 수술하기로 했고 입원은 월요일에 할 거야. 환자 컨디션도 괜찮고 긍정적이라 다행인데 그래서 더 부담이 된다.”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깜짝 놀랐네. 잘될 거예요. 우리 셋이 착실하게 준비하고 손 충분히 풀면 되잖아요. 형, 재발이라 신경 써야 할 문제가 많을 텐데 월요일이면 좀 빡빡하지 않겠어요?”
“나도 일찍 입원했는데 경제적으로 힘들어 보이네. 6인실이 없어서 병실도 간신히 예약했어.”
이런 말을 들으면 항상 입이 쓰다. 하루라도 빨리 퇴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이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살짝 무거워진 분위기에 김지훈이 손뼉을 쳤다.
“그럼 구체적으로 수술 계획을 짜야 하는데 언제 할까요?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다음 주 초?”
“환자 상태 다시 파악해야 하니까 월요일 밤에 하자. 현수 넌 어때?”
“어차피 월요일에 당직 서야 하는데 저야 좋죠.”
당직이라는 말에 ‘헉’소리가 터졌다.
신현수 당직이 월요일이라면?
금요일이 바로 김지훈의 당직이다.
김지훈의 얼굴이 허옇게 떴다.
“어후! 금 토 일 내리 당직인 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월요일은 힘들고 화요일에 하죠. 현수야, 미안하다.”
지금도 툭하면 폭풍처럼 환자를 몰고 다니는 김지훈이다. 동료로서 그 마음이 어떨지 이해할 수밖에 없다. 단, 날짜 바꾸는 일에도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신현수가 슬그머니 딴청을 부리며 말했다.
“주말에 확실히 연락해라.”
김지훈의 눈이 쫙 찢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내 수술을 뺏으려는 거야?’
전공의도 모자라 라이벌의 눈치까지 봐야 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3일 내리 당직은 확실히 무리다. 일단 살고 볼 일이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피 곤죽이 될 수도 있었고, 고경아의 가자미눈도 고려해야 했다.
좋게 생각할 일이었다.
“현수 네가 날 도와준다니 정말 고맙다.”
뭔가 찜찜했지만.
그래도 카르페 디엠!
환장할 정도로 미치겠다.
웬수가 따로 없다.
금 토 일, 사흘 간 쉬지 않고 환자가 몰려왔다.
주말에는 응급실과 수술실을 번갈아 오가며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간만에 서는 주말 당직이라 그런지 온몸이 피곤으로 아우성을 쳤다.
그럼 뭐할까?
4년차 막바지를 달리고 있는 박순용의 눈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연인 것처럼 항상 당직을 함께 서는 이혁원과 나종진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신현수?
전공의들이 수술하기에 조금이라도 어려워 보이면 마치 유령처럼 수술실에 나타났다. 조용히 장갑을 끼며 보내는 냉정하고 차가운 눈빛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그뿐인가?
송진우와 강병옥까지 시야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월요일 아침.
신현수의 응급실 보고가 어느 날보다도 길게 이어졌다. 송재덕 교수는 물론 스승까지 고생했다고 등을 두드려 줄 정도였다.
“역시 김지훈이야. 김지훈. 음! 오늘 푹 쉬어라. 푹 쉬어. 현수 너는 당직도 아닌데 환자 파악 확실히 했구나. 수술 좀 했니? 잘했다. 잘했어. 그래야 실력이 는다. 실력이. 우리 경석이는 어디 갔나?”
“김지훈, 신현수. 수고했어.”
어떤 말로도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급기야 수북하게 쌓인 차트를 보는 순간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아무도 없었으면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렸을 것이다.
신환이 한두 명이 아닌데.
모두 다 수술한 환자인데.
주구장창 퍼스트만 섰다.
단 한 건도 집도를 하지 못했다.
‘내가 이러려고 당직을 섰나?’
자괴감이 들 지경이었다.
입이 귀에 걸린 신현수와 전공의들이 이렇게 미울 줄은 몰랐다. 다신 내 당직 날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외치며 아직도 쌩쌩하게 살아 있는 주먹을 힘차게 날리고 싶었다.
마음으로만.
‘너희들 수술 보며 배운 게 많았다. 이젠 자신 있다고 느꼈던 수술에도 부족한 점만이 아니라 내가 못 봤던 면까지 있었네. 고맙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당직 교수는 난데 수술은 왜 너희들이 다 해?’
“한 번만 봐준다.”
“뭘 봐줘?”
신기동 교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김지훈이 원한 가득한 마음에서 벗어났다. 얼마 가지 않았다.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며 혈관 수술에 대해 묻는 신현수를 보는 순간 가슴이 또 끓어올랐다.
‘다 가져가라. 이 자식아.’
그렇게 한 주의 끝과 또 한 주의 시작이 지나갔다.
대장암 재발 환자가 예정대로 입원했다.
화요일 저녁, 전공의들이 참석한 가운데 심도 있는 토론을 이어갔다. 열띤 분위기였다. 할 일이 밀려있는 강병옥과 송진우도 끝까지 자리를 했다.
웬수들과 누리는 즐거움은 여기까지다.
펠로우들만 남자 분위기가 묘해졌다.
신현수가 물 한 모금 마시며 조용히 물었다.
“박승준 선생님은 뭐래요?”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는데 눈치가 좋진 않아. 지금까지 일해온 방식이 있잖아.”
“혹시 수술 함께 하자는 말은 해 보셨어요? 우리끼리 먼저 상의했지만 형 입장을 생각하면 그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했지. 대답을 안 하시더라.”
“설마 기분 나빠하는 건 아니죠?”
“그렇지 않기를 바라야지.”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술은 위아래를 따지거나 허락 받고 할 일이 아닌데. 우리가 예의를 갖추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잖아.’
박승준 교수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속이 어떻든 가타부타 흔쾌히 대답하는 것이 맞았다. 지난 세 달 동안 이경석이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더욱 그래야 했다.
이미 결정 난 문제를 두고 보이는 이경석과 신현수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밀하게 따지면 물어볼 이유조차 없는 일이었다.
“형, 마음 쓰지 마세요. 우린 지금 당연한 일을 하는 거예요. 펠로우도 교수고 교수가 자기 환자 수술하는데 뭐가 문제에요? 설령 박승준 선생님이 기분 나빠해도 형이 미안해 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훈아, 어찌됐든 내 윗사람이잖아.”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다.
솔직히 김지훈도 하윤호 교수와의 관계 때문에 신경 쓰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은 일이고 환자 치료에 대한 결정은 의사 개인의 고유 권한이었다.
한편으로는 이경석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 모를 일이었다.
“형, 원칙대로 생각합시다. 서운할지는 몰라도 서로에게 미안한 일은 절대 아니에요. 막말로 형 환자를 박승준 선생님이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형 책임이라고요.”
“흥분하지 마. 너 어제부터 왜 이래?”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진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과민한 반응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평소와 전혀 다른 행동을 하니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경석이 아니라 박승준 교수의 태도가 문제였다.
“일반외과 의사로서 아픈 환자 수술하는 겁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눈치 보며 수술할지 말지 결정하는 거 아니잖아요. 송재덕 선생님은 완전히 다른 말씀을 하셨죠?”
“우리만 보면 맨날 웃는 분이잖아. 너하고 현수까지 함께 한다고 하니까 유난히 더 반색을 하시더라.”
“바로 그거에요. 신뢰! 우리를 믿기 때문에 웃으시는 거 아니에요? 다른 생각하지 맙시다. 만일 이번 수술 때문에 관계가 틀어진다면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합니다. 형은 절대 아니에요.”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 저도 지훈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특히 일반외과 교수가 아픈 환자 수술한다는 말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네요. 그만 고민하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경석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졌다.
“자식들! 나이는 내가 훨씬 많은데 생각은 너희들이 더 깊은 것 같다. 그래. 다른 고민하지 말고 수술하자.”
일반외과 의사로서 가야할 길을 가는 것뿐이다. 펠로우 1년차 때도 당연하게 여겼던 일이었다. 앙금처럼 남아있던 마지막 불편함이 사라졌다.
펠로우들의 발걸음이 힘찼다.
‘자! 이제 하나는 해결됐고 내 문제만 남은 건가? 원칙대로 하자. 단점 없는 사람 없으니까 감정적으로 보지 말자. 최대한 객관적으로. 최대한.’
김지훈이 자꾸 쳐지는 어깨를 활짝 폈다.
수요일 아침이 밝았다.
“김지훈 선생, 스케줄 별거 없던데 오늘 부탁해. 나랑 인연이 있네.”
거머리처럼 집요한 구석이 있는 건지 혼자 할 자신이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스승의 말도 있었지만 입 안에 쓴맛이 확 감돌았다.
하윤호 교수의 수술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온갖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김지훈 선생, 이 환자 미리 봤나? 환자 파악은 기본이잖아. 수술만 잘하면 뭐해? 환자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염증이 심하니까 미니콜레도 주의해서 해야 할 것 같아.”
첫말부터 께름칙한 정도가 아니었다.
수술 전 마음 단단히 먹었다.
오직 환자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라파로로 해도 됩니다만 각자 판단이 다르겠죠. 수술은 물론 마무리까지 잘하고 스승님 말씀대로 배울 것이 있길 바랍니다.’
“환자는 이미 봤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죠.”
‘선입견을 지우고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배우자.’
두렵고 갑갑한 수술이 시작됐다.
메스를 대는 순간 우상복부에 깊숙한 절개선이 생겼다. 언뜻 상당히 과감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복벽이 열리자 불안감이 다가왔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예전의 수술과 손이 그대로 재현됐다.
하윤호 교수의 손에 수술 부위가 보이지 않았다.
절개창이 작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거친 손에 뻘건 피가 뚝뚝 묻어났다.
퍼스트를 서는데도 집도 이상의 긴장이 확 치솟았다.
시야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동맥과 담낭 관을 잡을 때는 섬뜩할 정도였다. 이러다 사고가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조바심마저 느껴졌다.
“나종진, 변종수, 내 시야까지 안 나온다. 제대로 끌어. 김지훈 선생, 타이하자.”
몸을 최대한 기울이고서야 타이를 할 수 있었다.
타이한 부위를 거즈로 닦자 순식간에 뻘건 피로 물들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깡이 센 의사라고 해도 지혈부터 할 텐데 하윤호 교수는 개의치 않았다.
배를 연지 불과 30분도 되지 않아 담낭이 제거됐다. 경이로울 정도로 빨랐지만 결코 빠른 손이 아니었다. 지금도 담낭을 제거한 부위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김지훈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잠시 수술 부위를 본 하윤호 교수가 몇 군데 지혈을 하고는 대뜸 장갑을 벗었다. 목에 걸린 마스크 위로 환히 드러난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김지훈 선생, 난 보호자에게 설명해야 하니까 마무리 부탁해. 남은 출혈 확실히 잡아주고. 수고했어. 덕분에 빨리 잘 끝났다.”
이 지경인데 또 마무리를 맡긴다?
각오를 했는데도 가슴이 부글거렸다.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집도의의 책임을 어디까지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만일 전공의가 퍼스트를 선다면 그때도 마무리를 맡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나종진이 한숨까지 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만일 우리가 퍼스트를 서야 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솔직히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만 해도 불안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종진아. 일단 마무리하자. 집중해.”
눈을 부릅떴다.
집도할 때보다 더 불안했다.
삐끗하면 재수술이라는 생각에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담낭이 붙어있었던 부위부터 시작해 동맥을 잡은 부위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타이를 하는 나종진의 손에 여유를 주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필수적인 일인 시야 확보마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흥건해진 후에야 출혈을 모두 잡을 수 있었다.
미리 예상하고 들어온 탓인지 전보다는 빨리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축된 시간 속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피부 봉합을 할 때쯤 하윤호 교수가 들어왔다.
“역시 김지훈 선생답다. 전보다 훨씬 더 깔끔하게 마무리했네. 보호자에게는 충분히 설명했으니까 따로 만날 필요는 없어. 휴게실에 있을 테니까 다음 환자 준비되면 연락 줘.”
지금까지 설명을 했다는 말일까?
보호자에 관한 일만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하윤호 교수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수술실을 나갔다. 조금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간신히 진정시킨 가슴이 또 다시 끓어올랐다.
입도 열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김지훈의 눈치를 본 나종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후우! 이걸 참아야 하나? 도저히 못 참겠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확 치밀어 올랐다.
두 주먹에 불끈불끈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