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신뢰는 생각 이상으로 무거운 말이다. (2)
김지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하나는 미니콜레로 하고 나머지 하나는 라파로로 하신 답니다.”
“준비는 했어?”
“하게 된다면 많이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하윤효 교수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미니콜레는 하 교수만의 수술이 아니야. 다른 병원에서도 종종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 손을 보지 말고 환자만 봐.”
분명 하윤호 교수의 실력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지금은 불만이 있어도 가급적 티를 내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름 각오한 일이었다.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앞으로 엠파이에마나 담도 담석 환자 오면 네가 먼저 봐. 다섯 건으로는 부족해.”
김지훈이 순간 가빠지려 하는 숨을 간신히 참았다.
하나둘 수술을 넘기는 스승이었다.
펠로우로서 분에 넘칠 정도로 복강경 수술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스승의 믿음과 배려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벌써 그런 때가 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송재덕 교수가 입을 삐죽였다.
“커피는 다 같이 마시는데 너희들끼리만 재미있구나. 그러면 안 된다. 안 돼. 경석이는 어디 갔나. 우리 신임 교수들은 왜 안 오니? 지훈아, 현수야, 왜 안 와? 벌써 퇴근했나?”
안 그래도 궁금한 참이었다.
이맘때면 얼굴을 보이고도 남았을 이경석이었다. 신임 교수들도 한 명만 빼고는 퇴근할 시간이 아니었다.
그 때 조용히 문이 열렸다.
이경석이 문밖에 선 채 김지훈과 신현수에게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얼굴이 좋지 않았다.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지훈아, 현수야. 나 좀 보자.”
이경석이 굳은 얼굴을 풀지 못하고 연구실로 향했다.
‘왜 이러시지? 무슨 일 있나?’
신현수도 의아한 표정만 지었다.
연구실에 도착해서도 이경석은 한숨만 쉬며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기조차 난감했다.
“지훈아. 현수야.”
“형, 왜 그래요?”
“후우! 박승준 선생님이 직장암 환자 수술 지동훈 선생님과 들어가신다고 하시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내가 실력이 없는 거야 아니면 신뢰를 받지 못하는 거야? 과민하게 반응하는 건지 몰라도 기분이 너무 안 좋다.”
한숨만 거푸 내쉬었다.
“형은 안 들어간단 말이에요?”
“지동훈 선생님과 호흡이 가장 잘 맞고, 만만치 않은 수술이라며 이해해 달라고만 하시네.”
김지훈은 물론 신현수도 눈가를 찌푸렸다.
이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도 자신의 한계를 느끼면 신기동 교수 혹은 이혁민 교수와 함께 수술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제 아무리 잘난 전공의라도 당연히 세컨을 서야 한다.
절대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다. 도리어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일반외과 의사들이 함께 수술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였다. 너무도 드물기에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경석이 전공의가 아닌 펠로우라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다른 파트도 아닌 대장 항문 전공에 송재덕 교수마저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는 펠로우였다.
그뿐인가?
김지훈도 부러워 할 정도로 대장암 수술을 많이 했다. 설혹 지동훈 교수와 호흡이 가장 잘 맞았다고 해도 예전일이다. 이경석과는 지난 세 달 간 모든 수술을 함께 했다. 그 시간이면 전공의도 적응할 수 있다.
어떤 면을 생각해도 퍼스트를 설 자격이 넘치고도 남았다. 아니, 이경석이 집도한다고 해도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경석이 신음 소리처럼 답답한 소리를 내뱉었다.
자괴감일까?
아니다.
신뢰를 주고받지 못했다는 실망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존심 문제였다.
김지훈도 자존심이 상했다.
어렵고 힘든 케이스라고 다른 교수와 수술할 생각이었으면 지난 세 달 간 이경석과 함께 수술할 이유가 없었다. 교수들 모두 인정하는 이경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김지훈이나 신현수에 대한 시각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후! 나도 기분이 정말 안 좋네. 송재덕 선생님도 당연히 형하고 수술하는 것으로 알고 계시잖아요. 이건 자존심까지 걸린 문제 아닌가? 현수야. 어떻게 생각해?”
김지훈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입장 바꿔서 지훈이 너라면 누구하고 수술할 것 같아?”
박승준 교수와의 관계를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던 신현수가 도리어 제동을 걸었다.
“나? 당연히 경석이 형하고 수술하겠지. 이건 알고 모르고가 아니라 세 달 동안 손을 맞춘 사람에 대한 믿음과 예의야. 물론 실력이 따라주질 않으면 박승준 선생님 결정이 맞아.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
“세 달이라는 시간이 충분했을까?”
“현수야. 전공의 텀 바뀌는 시간이 3개월이다. 그렇게 따지면 퍼스트를 세울 수나 있겠어? 수술 난이도는 전공의들이 더 심하게 느낄 수밖에 없잖아? 다 떠나서 1년차들 수술은 어떻게 줘?”
신현수가 눈가를 좁히며 입을 열지 않았다.
가장 차분하고 냉정하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경석은 괴로워만 했고 가장 답답해하는 사람은 김지훈이었다.
“막말로 너 1년 만에 왔잖아. 온지 얼마 안 돼서 같이 수술한 놈들은 뭐냐? 우리 위암 환자 응급으로 위까지 잘랐어. 네가 친구라고 해도 믿지 않으면 그렇게 못했다. 이건 신뢰 문제고 자존심 문제야.”
“흥분 가라앉혀. 경석이 형. 어떻게 생각해요?”
“모르겠다. 새로 오셔서 불편해 하실까봐 나름대로 신경 많이 썼고 손도 잘 맞았어. 정말 만족하고 살았는데 박승준 전생님은 안 그러신 모양이다.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뭐.”
신현수가 무거운 안색으로 콧등을 찡그렸다.
‘VIP 환자라 그런 걸까?’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박승준 교수의 속을 알 길이 없다.
그 때 김지훈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의외일 정도로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가 형 탓이에요? 신현수, 너는 주의하라는 말까지 했으면서 뭘 그렇게 따지고 있어? 다른 생각 할 거 없어. 형 실력을 보여주면 간단한 일이야. 경석이 형, 대장암 재발 환자 얘기 했어요?”
“얘기할 기분 아니다.”
“그럼 됐네. 형이 수술해요. 진짜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거나 실력을 못 믿는 게 아니라면 형이 수술한다고 해서 문제될 일이 없잖아요. 도리어 수술 잘 되면 수고했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 말도 없었다.
김지훈이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어휴! 정말 왜들 이래? 환장하겠네.”
신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훈아,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흥분해? 평소에는 도리어 네가 가장 침착하게 해결책을 제시했잖아.”
“내가? 그랬다면 이유는 하나 뿐이야.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뭐야? 스승님들께서 우리를 믿어 주셨기 때문이야. 신뢰 문제라고. 신뢰. 집도도 아니고 퍼스트로서도 못 믿는다면 나도 따를 생각이 없어.”
“신뢰?”
조용히 김지훈을 보던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게 문제겠지?”
이경석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허탈한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결심을 했다는 얼굴이었다.
‘스승님께서 날 믿어 주셨기에 여기까지 왔어. 지훈이가 지나치게 흥분했지만 신뢰에 관한 문제라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놈이니까 당연한 반응이겠지. 날 그만큼 믿는다는 거야? 김지훈, 고맙다.’
“그만하자.”
“뭘 그만해요?”
“지훈아, 대장암 환자 나랑 같이 수술하자. 네 말대로 박승준 선생님이 날 신뢰한다면 문제 될 일이 없을 테고 사실 눈치 보며 수술할 이유도 없잖아.”
김지훈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오케이! 이제야 경석이 형이 보이네. 현수야, 내일 환자 오면 무조건 잡아서 너도 수술 같이 들어가자. 우리 펠로우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자고.”
“나도?”
“당연하지. 최고의 써전이 되는 길은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거 잘 알잖아? 우리 한 번 해보자. 경석이 형, 만일 내가 오해했다면 박승준 선생님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드릴 테니까 뒷일은 생각하지 마세요.”
가장 부담스러운 사람은 이경석일 것이다.
김지훈이 이 와중에도 그 점을 잊지 않았다.
한참 동안 흥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던 김지훈이 숨을 돌리고서야 모두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이경석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던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형, 지훈이가 저렇게 흥분할 때도 있네요. 병옥이 때보다 더 한 것 같아요. 감정에 치우쳐서 그럴 듯한 해결책을 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죠?”
“저놈 인턴 때 악어한테도 덤빈 놈이잖아. 일석이가 한 번 욱하면 누구도 못 말린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네. 사실 지훈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 어쨌든 나도 기분 좋다. 최고의 수술 팀? 하하하!”
펠로우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퍼져 나갔다.
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귀를 후벼 팠다.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아휴! 너무 흥분했네. 그래도 결정한 대로 가자. 서로 믿지 못하는 것만큼 서러운 일도 없잖아. 그러려면 환자가 수술한다고 해야 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김칫국은 아니길 바랐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결정적인 문제 하나를 까먹었다.
펠로우 세 명이 들어가면 남은 자리는 하나다.
써드!
이혁원은 자청해서 써드를 서고도 남을 테지만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다.
‘아뻬 하나 주면 만족하려나? 그럴 수 있을까?’
이젠 후배도 점점 무서워진다. 환자와 수술이라면 두 눈을 부릅뜨는 놈이 실력까지 뛰어나면 그보다 더 무서운 후배는 없다.
“아! 춥다. 더워지려면 아직 멀었나?”
김지훈의 떨리는 목소리가 밤하늘로 사라졌다.
그 시간 지동훈 교수가 박승준 교수를 찾았다.
“이 시간에 퇴근도 안 하고 웬일이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박승준 교수가 벽에 걸린 뷰 박스를 보며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슬그머니 다가간 지동훈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직장암 환자의 복부 CT였다.
“걱정 되십니까?”
“아무리 봐도 만만치 않아. 종양 뒤에 집중적으로 분포한 혈관을 건드리면 직장을 살릴 방법이 없잖아. 스테이플 사용이 아무리 능숙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자신이 생길 때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환자야. 인공 항문 만들 수도 있다고 했을 때 환자 얼굴 봤지?”
“누구나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봤는데도 익숙해지질 않네. 지 교수도 그렇잖아. 지 교수, 이 부분에서 내가 우측으로 접근하면 타이할 공간이 나오겠어? 아니면 위쪽에서 접근하는 게 더 나을까?”
더없이 진지했다.
몇 날 며칠이고 확신이 들 때까지 수술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순간만은 환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지금 이 모습이 바로 지동훈 교수가 알고 있는 박승준 교수였다. 불과 2년 차이밖에 안 나지만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믿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해? 왜 대답이 없어?”
“우측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우측에서 시야를 먼저 확보하고 종양 경계부에서 혈관 덩어리 전면까지 박리하면 깔끔하게 나올 수 있겠어. 그러려면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마치 묻는 것 같지만 혼잣말이었고 고민이 깊어질 때의 습관이었다. 모든 신경과 정신이 오직 수술에만 쏠려 있다는 말이었다.
지동훈 교수가 눈가를 좁혔다.
수술 상의를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박승준 교수가 본래의 모습을 보이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이경석 선생 정말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손도 잘 맞고 실력도 괜찮지.”
“전 선생님과 함께 수술한 지도 오래됐고 전공도 대장이 아닌데 이런 환자는 도리어…….”
“이미 결정한 일이야.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봐. 펠로우하고 수술한 것과 지 교수하고 수술한 경우 중 어느 쪽이 환자를 더 이해시키기 쉽겠어? 난 지 교수를 더 믿고 환자는 VIP 정도가 아니라 VVIP야. 이젠 그런 점도 생각해야 할 때야. 혹시 이경석이 불평하는 것 같으면 알아서 잘 말해.”
이상스럽게 마음이 아픈 순간이었다.
환자와 수술에 집중하며 자신을 믿는다는 말에서 끝냈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고민했을 지도 몰랐다. 먼저 말하지 않아도 일부러 이경석을 찾아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VVIP? 도대체 이러시는 이유가 뭐지? 병원을 옮기고 싶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셨을 때부터였나?’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박승준 교수가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최근 두세 달 동안의 일이 아니었다.
지동훈 교수가 입을 열려다 말고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CT에서 눈도 떼지 않고 있었다. 이경석에 관한 일을 번복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의미였다. 더 이상 말을 꺼내면 역효과가 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경석 선생에게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하나? 자칫하면 모두 다 불편해 질 수도 있어. 일단 이 환자 수술이 끝나고 난 다음에 박승준 선생님과 셋이 모여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는 것이 먼저겠지?’
나름 가장 무난한 방법으로 정리를 했지만 껄끄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목 안에 가시 하나가 박힌 느낌이었다.
차라리 라인과 파벌 싸움에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던 예전 병원이 낫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때는 박승준 교수나 자신이나 그 꼴 보기 싫다며 수술에만 전념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병원을 옮긴 일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환경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다른 사람이었을까?
어느 경우든 상관없었다.
세월이 가면 누구나 변한다.
다만 방향이 틀리다면 선배든 후배든 진심으로 다가가 함께 고민하고 고쳐가야 할 것이다. 지동훈 교수에게 박승준 교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선배였다.
흥분이 가라앉으면 대부분 후회하기 마련이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출근을 하면서도, 회진을 돌며 박승준 교수와 마주쳤을 때도 이경석이 퍼스트도 서지 못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윤호 교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하고 무서운 것인지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눈곱만치도 믿을 수 없는 사람하고도 수술할 지도 모르는데 경석이 형하고 못해?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심난한 가운데 오전 수술이 끝났다.
부리나케 이경석과 신현수를 찾았다.
“현수야, 경석이 형, 환자 입원했어요?”
“입원 안 했어.”
김지훈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