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신뢰는 생각 이상으로 무거운 말이다. (1)
오늘은 무슨 날이라도 되는지 신현수의 손에도 차트와 X-ray 봉투가 들려있었다.
“혁원아, 이경석 선생님 어디 계셔?”
“집에 일이 있다고 조금 전에 퇴근하셨습니다.”
“그래? 이걸 어쩐다.”
“현수야. 뭔데 그래?”
신현수가 힐끗 눈길을 주더니 X-ray를 꺼냈다.
“상복부 복통 때문에 외래로 온 환자야. 3년 전체 대장암 수술을 받았어. 증상이 심하지 않아서 별거 아니다 싶었지만 혹시 몰라서 CT를 찍었는데 재발이야. 안 찍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또 대장암 환자다.
전공 분야가 아니라고 해도 환자는 많이 볼수록 좋다. 신현수도 착각할 정도면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할 환자였다.
차트와 복부 CT를 확인했다.
방금 전에 본 직장암 환자보다 더 험악했다.
하행 결장을 자르고 이은 부분에서 암이 재발했다. 임파선 전이도 심각했지만 결정적으로 후복막을 침범했다. 더구나 이미 한차례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소장과 남은 대장이 제자리에서 벗어나 서로 엉겨 붙은 상태였다.
“후우! 심각하다. 조금 있으면 막힐 가능성이 있어서 무조건 수술해야 하는데 이 환자도 stage III네. 재수술이라 들러붙은 장을 분리해 내는 것도 힘들겠어. 현수야. 후복막을 침범한 종양을 제거할 수 있을까?”
“그게 관건이야. 제거만 할 수 있으면 상행 결장하고 에스 결장을 이어줄 수 있으니까 수술 결과가 나쁠 것 같진 않아. 최선을 다해 수술하고 나머지는 항암 치료에 맡겨야지.”
“맞는 말이야. 그런데 경석이 형한테 보내려고?”
“응. 박승준 선생님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일단 경석이 형이 먼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요새 대장 쪽 수술 거의 못한다고 얼굴이 안 좋았잖아.”
“거의가 아니라 아예 못하는 거 아니었나? 그래도 항상 웃는 거 보면 박승준 선생님과 관계가 꽤 좋아 보여. 어쨌든 나도 신경 쓰였는데 하필이면 재발 환자냐. 어디 겁나서 수술하겠어?”
신현수가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네가 같이 들어가면 되잖아.”
“내가?”
“그래. 내가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이런 수술을 감당할 정도로 손이 풀린 건 아니야. 욕심 부렸다가는 문제만 만들 거야. 올해까지만 내 대신 네가 고생해라.”
김지훈은 물론 이혁원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자존심을 어디다 내팽개친 것일까?
누구 못지않은 수술 욕심과 그에 어울리는 실력을 가진 신현수였다. 지금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라이벌이기 때문인지 뭔가 어색하다.
김지훈이 크게 웃으며 신현수의 등을 쳤다.
“하하하! 신현수. 니가 드디어 날 인정하는구나. 경석이 형이 수술 같이 하자고 하면 기꺼이 들어가 주마.”
“일석이면 몰라도 넌 정말 안 어울린다. 고마우면 고맙다고만 해. 아까 말했지만 올해까지야.”
왜 안 통할까?
말투 때문일까?
“알았어. 인마. 고맙다. 그런데 내가 들어갈 수 있겠어? 경석이 형이 집도를 해도 박승준 선생님과 함께 수술하겠지. 그건 그렇고 이왕 고마운 김에 한 가지 더 부탁하자.”
최종 결정은 이경석의 몫이지만 수술 계획은 짜 볼 수 있다. 신현수, 이혁원과 머리를 맞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종진과 송진우도 끼어들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전공의가 보이지 않았다.
“진우야. 이경석 선생님이 수술하시면 우리보다 더 잘 알아야 하는 놈이 병옥인데 어디 갔어? 오프야?”
송진우가 머뭇거렸다.
“저···. 직장암 환자 병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혁원이 깜짝 놀랐다.
같은 대장 항문 파트를 도니 2년차인 강병옥이 환자를 보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다. 하지만 박승준 교수 파트의 담당 전공의가 이혁원이라는 사실 또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먼저 노티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아까 박승준 선생님이 직접 자세하게 다 설명했는데 이 시간에 거기서 뭐해? 무슨 일 있어?”
“별 일 없는 것 같은데 하윤호 선생님이 다시 올라오셔서 강병옥 선생을 부르셨습니다.”
일순 분위기가 묘해졌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면 당연히 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하윤호 교수가 강병옥을 부를 이유가 없었다. 환자에 관한 일이라면 도리어 이혁원을 찾아야 했다.
‘병옥이야 부르면 갈 수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특실 환자라 그런가?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되는데.’
강병옥의 말을 들어봐야 알 일이었다.
“일단 이 환자에게 집중합시다.”
한동안 수술에 관한 의견이 오고갔다.
언제나 그렇지만 후배의 의견 역시 귀중했다.
신현수의 말은 단 한 마디도 놓칠 수 없었다.
토론이 끝나고 나서야 강병옥이 들어왔다.
이혁원의 눈초리가 좋지 않았다.
“직장암 환자 병실에 들렸다면서요? 무슨 일 있어요?”
‘어떻게 알았지? 진우, 저 자식이?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하윤호 교수님께서 검사 결과 하나 챙기라고 하셔서 병실에 갔었습니다. 환자 분이 꽤 충격을 받으신 데다 예전부터 잘 아는 분이라 신경 많이 쓰시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이혁원이 찜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한 번 의심하면 끝이 없는 법이다. 김지훈이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어떤 환자든 세심하게만 봐. 그러면 아무 문제없어. 사소한 일이라도 노티는 제대로 하고.”
어쨌든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
하윤호 교수와 수술을 함께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만 빼면 말이다.
김지훈이 퇴근을 하자마자 병동이 또 한 번 부산해졌다.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 하성원 원장이 특실 환자를 찾은 것이다. 미리 연락을 했는지 박승준 교수와 하윤호 교수까지 보였다.
이혁원의 뒤를 따라 부리나케 병실을 안내한 강병옥이 눈을 반짝였다. VVIP의 거만함이 중앙 의료원 원장 앞에서는 상당 부분 사라졌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면회가 끝난 후 이혁원이 투덜거렸다.
“에휴! 돈과 자리가 좋긴 좋네.”
결코 좋은 말이 아니었지만 강병옥에겐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돈과 힘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경우의 수를 배제하면 절대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다음 날 펠로우들이 모두 모여 대장암이 재발한 환자를 두고 의견을 교환했다. 이경석이 정말 어려운 수술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수야. 이 환자 언제 다시 보기로 했어?”
“내일 예약이 돼 있어요. 환자 분 오시면 바로 형한테 보낼게요.”
“지훈이가 도와준다고 해도 정말 만만치 않아. 일단 송재덕 선생님하고 박승준 선생님과 상의해야겠다.”
신현수가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박승준 선생님과 상의는 하시되 집도는 형이 해야 합니다. 어려운 케이스지만 형은 대장 파트 교수잖아요. 항문 쪽 수술만 할 수는 없고 감각도 다르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제 파트 구분은 거의 하지 않고 퍼스트만 서도 박승준 선생님에게 배우는 것이 상당히 많아. 아직 한참 더 배워야 하는데 송재덕 선생님이 너무 바쁘셔서 수술할 시간조차 없으시잖아. 나한테는 큰 문제다.”
“형, 내 느낌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대장 쪽은 아예 집도 못할 수도 있어요.”
이경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내 말 흘려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동훈 교수님과는 약간 다르게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이경석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지만 신현수의 판단을 무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었다. 박승준 교수에 대한 일종의 호감 때문인지 뒷맛이 개운치 못했다.
‘현수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겠지? 박승준 선생님의 수술 욕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네. 휴우! 사람이 제일 어렵다더니 정말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우리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과의 관계잖아요. 윗사람에게 항상 양보하는 일이 좋은 일만은 아닐 수도 있잖아요. 대우하는 것과 자신의 일을 챙기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고요.”
‘지금까지 실적 통계를 개별적으로 부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환자를 대하는 태도도 다른 것 같고요.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지만 우리 과 입장에서 좋게만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화가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이경석은 지금도 그럴 일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신현수의 말과는 다른 의미였지만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사람 관계에서 선입견만큼 무서운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에휴! 이런 얘기 그만하고 수술부터 생각하죠. 형,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 정말 좋은 기회야. 집도보다는 못하겠지만 일단 두 환자 다 퍼스트를 서면서 어떤 방식으로 수술하시는지 배우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자신감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집도에 대한 미련까지 보였다.
박승준 교수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신뢰일까?
전자보다는 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히 믿는 것 같네. 경석이 형이 이렇게 나오면 도전해 보고 싶은 수술을 할 기회가 자동적으로 사라진 건가? 예전에 오상익 선생님 수술할 때를 생각하면 후복막 쪽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다.’
단 한 번의 경험이었지만 지금도 눈에 생생했다.
복부 대동맥과 주변 조직의 구조 및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재덕 교수나 박승준 교수의 지도와 도움까지 고려하면 무리한 수술도 아니었다.
어쨌든 결론이 났다.
결정은 온전히 이경석의 몫이었다.
그날 저녁.
박승준 교수가 송재덕 교수에게 직장암 환자의 복부 CT를 보이며 수술 방법에 대해 상의했다. 이경석과 이혁원이 진지한 눈빛으로 귀를 기울였다. 하윤호 교수는 이번에도 빠지지 않고 얼굴을 보였다.
“박 교수 말대로 이 정도 자르면 시야가 나올 수도 있겠다. 그래도 저 놈의 나쁜 덩어리를 제거하기는 쉽지 않아. 어렵다. 어려워. 호치키스가 있으니까 자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아. 열심히 하자. 열심히. 그런데 언제 수술할 거야?”
“다음 주 목요일에 할 생각입니다.”
“그래. 그래. 결정했으면 끝난 거잖아. 박 교수, 자기 실력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충분히. 어려운 수술은 함께 하면 되고 말이야.”
송재덕 교수가 이경석에게 눈길을 주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의미는 빤했다.
“한 손보다는 두 손이 낫지. 암! 그렇고말고. 경석아, 박 교수, 내 말이 맞지? 그치?”
“예. 선생님.”
이경석의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근데 하 교수는 왜 여기 있어? 회진 안돌아? 환자하고 무슨 관련이라도 있어? 자기는 간담도고 이 환자는 대장이잖아. 대장.”
“잘 아는 분입니다.”
“그래? 그랬구나. 그랬어. 잘 아는 분이구나. 내가 요새 쓸데없는 일로 바빠서 신경을 못 쓴다. 못 써. 미안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이 묘했다.
‘하성원 원장님이 실력은 보증한다고 했는데 왜 못미더울까? 준영이가 다른 교수 수술 문제까지 관여할 사람이 아닌데 이유가 있겠지? 세 달이면 충분할까?’
때마침 회진을 마친 김지훈의 얼굴이 보였다.
뭘 했는지 이마에 땀까지 맺혀 있었다.
송재덕 교수가 ‘허허’웃으며 손짓을 했다.
‘저 놈만 보면 기분이 좋아져.’
“부르셨습니까?”
“네가 지훈이구나. 지훈이. CT 좀 봐라. CT. 살벌하다. 살벌해. 이거 수술하기 너무 어려운 케이스다. 그래서 더 하고 싶지? 그치? 내 말이 맞지? 지훈아, 대장하자. 대장.”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다.
오늘은 더 정신이 없다.
“선생님, 저 펠로우 된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응? 그래서 하기 싫다는 거야? 내 말에 토도 달고 우리 김지훈 많이 컸다. 많이. 속 탄다. 커피 마시자. 커피. 지훈아. 뭐하니? 뭐해?”
마침 이준영 교수도 회진을 끝냈다.
환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이젠 펠로우가 없는 신기동 교수와의 회진만 간신히 챙기는 김지훈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입가에 잔주름이 생겼다.
‘당연한 일인데 서운하네. 함께 회진 돌 때가 정말 즐거웠는데 말이야.’
“나도 한 잔 마시자.”
“예. 선생님. 맛있게 한 잔 타 올리겠습니다.”
외래 휴게실로 가 커피 세 잔을 탔다.
네 잔, 다섯 잔으로 자꾸 잔 수가 늘었다.
마침내 신현수까지 가세해 계속 커피만 탔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인생의 스승과 멘토 그리고 평생의 라이벌까지 함께 하는 자리인데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윤호 교수에 관한 말까지 나왔는데도 말이다.
“김지훈, 다음 주에 수술 두 개 있다며?”
스승의 물음이다.
척하면 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