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같은 일 다른 판단. (2)
이경석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도 배울 게 많아. 송재덕 선생님이 수술을 많이 못하시니까 박승준 선생님에게라도 확실하게 배워야지.”
성격 참 무던하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술 스타일이 다른데다 간결한 손에 생각이 많은 모양이었다. 사실 김지훈도 시간이 나면 기웃거리는 형편이었다.
“역시 우리 형은 참 겸손해. 흐음! 박승준 선생님이나 지동훈 선생님을 보면 실력이 있는 분들은 어디서도 돋보인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현수야. 안 그래?”
신현수가 입술을 모으며 눈만 깜박였다.
“자식이! 오늘따라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입이 무거워. 어이구! 벌써 6월이 코앞이네. 석사 논문 써야 하는데 케이스는 부족하고 큰일이다.”
이제야 입을 열었다.
“라파로로 엠파이에마(담낭농증) 두 건에 담도 담석 세 건이면 결코 적지 않아. 이준영 선생님 케이스까지 합치면 지금도 쓸 수 있을 거야.”
“심사 받을 때 막히지 않고 대답하려면 내가 직접 한 수술이 두 자리 수는 돼야 하지 않겠어? 참! 현수야, 조기 위암 케이스 아직 없어?”
“조기 위암 환자야 있지만 환자도 충분이 알고 동의해야 하기 때문에 만만치 않아. 초조하다.”
“이제 세 달도 안됐잖아. 곧 온다. 나도 네가 어떻게 수술할 지 궁금해 죽겠어. 이준영 선생님도 가끔 물어보신다니까? 라파로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빨리 했으면 좋겠다.”
“부담되네.”
각자 가슴 속에 커다란 꿈을 안고 당면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모두들 일말의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의사로서의 욕심에는 환자의 건강과 삶이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신임 교수들 역시 3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박승준 교수가 지동훈 교수와 단 둘이 마주 앉았다.
“지 교수, 이것 좀 봐.”
“이게 뭡니까? 4월, 5월 실적표?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여기도 실적 평가를 합니까?”
“공식적으로만 없는 거지 다른 병원하고 다를 게 있겠어? 어렵게 구한 거니까 내용 확인해 봐. 심각하다.”
대학 병원이든 아니든 의사의 일차적 실적은 돈이다. 학술적인 성과 등 다른 면도 있겠지만 돈이 있어야 병원을 운영할 수 있다.
운영자 입장에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실적 통계를 본 지동훈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이준영 교수, 이혁민 교수, 신기동 교수.
역시 어느 면에서도 부족할 리가 없는 교수들이었다.
송재덕 교수야 서울 병원 원장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었다. 펠로우 된지 이제 세 달 된 신현수나 박승준 교수와 함께 수술하는 이경석의 실적은 평가 대상이 아니었다.
하윤호 교수?
참담함 그 자체였다.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김지훈이 박승준 교수와 거의 비슷한 실적을 올린 것이다. 파트 특성상 외래 환자는 다소 차이를 보였지만 수술 건수는 도리어 김지훈이 많았다.
“저보다 실적이 훨씬 좋네요. 수술 많이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펠로우 2년차가 대단하네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지 교수, 열심히 한다고 말로만 해서 안 되는 문제야. 난 부교수고 지 교수는 조교수야. 펠로우한테도 실적이 뒤처지면 이게 결국 우리 발목을 잡을 것 같지 않아? 만일 이경석하고 수술을 나눠했으면 나도 하윤호 꼴 났을지도 몰라.”
지동훈 교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요즘 정말 왜 이렇게 초조해 하시지? 말이 펠로우지 몇 년 전만 해도 전문의 따면 바로 전임으로 근무했으니까 2년차 교수인 것과 다를 바가 없잖아.’
“선생님, 이제 세 달 되갑니다. 초조해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김지훈 선생을 보면서 나태해 지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하 교수가 정말 문제네요. 실적을 떠나 실력이 어떤지 그게······.”
박승준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이해득실을 따져야 했다.
“당분간 하 교수 실력은 거론하지 마. 하성원 원장님 조카인데다 우리와 함께 왔기 때문에 유리할 게 없어. 김지훈과 신현수에게 신경 써야 해.”
“특별한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아니야. 신현수는 이사장님 아들이야. 그 점을 무시할 수 있겠어? 게다가 과장님도 연공서열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어. 이혁민 선생님이 은퇴할 때까지 펠로우가 아니잖아? 그때는 과장이 되기에 무리한 나이가 아니야.”
지동훈 교수가 내심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순리대로 가시면 선생님이 원하시는 바는 이루고도 남습니다. 솔직히 여기는 파벌이다 라인이다 이런 말이 안 나와서 그런 걱정을 할 이유도 없고 일하기 좋은 분위기 아닙니까? 우리가 병원을 옮긴 이유이기도 하고요.”
“지 교수, 내가 너 정말 좋아하고 실력 인정하지만 주변 보는 눈도 좀 길렀으면 해. 이미 교수들 간의 라인이 다 있고 결국 그게 모이면 파벌이야. 기존 교수들이 그렇다는 거 안 보여?”
“선생님, 그냥 스승과 제자일 뿐입니다. 어느 조직이나 자기가 아끼고 이뻐하는 아래 사람 한둘은 있기 마련 아닙니까? 라인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마음 푹 놓으시고 갈 길만 가셨으면 합니다. 전 선생님을 믿습니다.”
‘내가 이래서 지 교수 널 좋아하고 믿을 수밖에 없어. 날 향한 마음 변치 마. 난 현실적으로 가고 넌 내가 가끔 잊는 원칙을 상기시켜 준다면 한쪽으로 쏠리진 않을 거야.’
“알았어. 내가 요즘 좀 과민해졌네. 하 교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우리를 따로따로 볼까? 솔직히 도매금으로 넘어갈까 봐 걱정이 되긴 해.”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박승준 교수는 물론 친해지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 자신의 방에 가장 많이 드나드는 사람이 바로 하윤호 교수였다. 다른 교수들이 보기에는 하윤호 교수와 대단한 인연과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시죠.”
“개똥도 쓸모가 있다는 소리가 있잖아.”
박승준 교수가 웃으며 일어났다.
지동훈 교수는 별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에도 박승준 교수는 하윤호 교수와 자주 시간을 가졌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 퇴근 후에도 술자리를 갖는 일이 잦아졌다.
한동안 유지됐던 마음의 평온이 깨졌다.
마지막 외래 환자를 본 김지훈이 좀처럼 엉덩이를 떼지 못했다. 삐죽 고개만 들이민 하윤호 교수가 유들유들 던지고 간 말 때문이었다.
“김지훈 선생, 내 앞으로 담석 환자 두 명이 왔는데 다음 주에 수술 같이 하자. 하나는 염증 소견이 심해서 미니 콜레시스텍토미(담낭 절제술)로 하고 나머지 하나는 라파로로 할 생각이야.”
정규 수술을 두 건이나?
게다가 복강경 수술까지 한다고?
그동안 거의 환자가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었다. 순간 컨설트가 온 것인지 외래 환자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같이 하자고요?”
하윤호 교수가 씨익 웃었다.
“그래. 김지훈 선생은 미니 콜레를 배우고 나는 라파로를 손에 익히면 서로 좋지 않겠어? 오래간만에 라파로 한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다 설레네.”
말은 좋았다.
실력이 뒷받침 되고 배울 만한 구석이 좁쌀만치라도 있었으면 기꺼이 함께 했을 것이다. 고개를 저으면 그뿐인데 사람 마음이 참 묘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에둘러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
“그날 상황 봐야할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혹시 일 있으면 내가 스케줄 조정할 테니까 그런 걱정하지 마. 그럼 같이 하는 걸로 알고 간다. 김지훈 선생 덕에 마음이 편해. 고마워.”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이 닫혔다.
말만 놓고 보면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상황이나 수술 실력과 연관시키면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허탈한 웃음이 저저로 터졌다.
‘대놓고 싫다고 해야 알아듣나?’
일주일 후의 일을 두고 지금부터 머리를 싸맬 이유가 없었다. 하윤호 교수 아니어도 신경 쓸 일은 많았다. 설렌다는 말에 또 웃음이 터졌다.
‘설렌다고? 에휴! 좋게 생각하자. 오후에도 외래 환자가 온 날은 기쁜 마음으로 회진 도는 게 예의지.’
병동에 올라온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진 때마다 교수들과 전공의들에 간호사까지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정돈된 분위기를 잃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어수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X-ray를 거는 뷰 박스(view box) 앞에 신임 교수들과 모두 모여 있었다. 이경석까지 옆에 있었고 이혁원은 두리번거리며 계단 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떤 환자기에 하윤호 선생님까지 모였지?’
잠시 후 강병옥이 한 손에는 차트를 다른 손에는 X-ray 봉투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박승준 교수가 눈가를 좁혔다.
“직장암에 임파선을 상당히 많이 먹었고 크기도 꽤 크다. Stage III(암 3기)네. 지 교수, 이경석 선생, 이거 수술 가능하겠어?”
“항문에서 9cm 정도 떨어져 있으니까 스테이플을 사용하기에는 충분해 보입니다만 직접 전이가 문제네요.”
지동훈 교수의 말에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 주변 조직 박리가 상당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골반 안인데다 종양 바로 뒤에 혈관이 몰려 있어서 자칫하면 출혈을 제어하지 못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렇지? 하 교수, 내가 들은 말하고는 상태가 많이 다른데 환자 분한테 따로 한 말이라도 있어?”
“어이구! 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쩐지 다른 병원에서 시간을 끄는 게 이상하긴 했습니다. 선생님만 믿고 수술 문제는 걱정 말라고 했는데 어쩌죠? 이거 정말 힘들까요?”
박승준 교수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위험한데.’
하필이면 하윤호 교수가 말한 VVIP다.
전직 국회의원이라지만 아직도 위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보호자들의 면면도 그렇고 당장 입원하자마자 병실을 가득 채운 난초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았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박리하면 종양 뒤쪽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까? 지 교수, 시야만 나오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어때?”
“3기까지 진행됐는데 위험하다고 수술을 안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시기를 놓쳐 원격 전이라도 발생하면 아예 불가능해 질 수도 있습니다.”
“이경석 선생은 어떻게 생각해?”
“시야 확보는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지만 저도 지동훈 선생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환자 분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환자가 수긍할까? 다른 병원에 먼저 들렸다가 우리한테 온 이유가 있지 않겠어? 원하는 말을 듣지는 못했을 거야.”
하윤호 교수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내가 소개하긴 했지만 이 환자를 수술하길 원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우리가 한배를 탔다는 것을 굳이 숨길 이유는 없겠지?’
“그래도 좋은 기회 아닙니까? 수술만 잘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겁니다. 이후에도 계속 선생님 환자로 진료를 받아야 할 텐데 그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좋은 기회와 여러 도움?
말 그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이경석과 지동훈 교수가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환자의 사회적 혹은 경제적 지위는 수술이 가능한지 여부에 조금도 필요치 않은 요인이었다. 도리어 약자일 때 치료 이외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좋은 말도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하물며 눈총받을 말이었다. 박승준 교수가 질책이라도 하듯 힐끗 곁눈질을 하며 말을 돌렸다.
‘하윤호. 머리 쓰지 마라. 실력 없는 네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하 원장님도 우리 과 내부 일은 함부로 관여하지 못해.’
“그건 다른 문제고 일단 환자부터 보자.”
박승준 교수를 필두로 교수 세 명과 전공의 세 명이 병실로 향했다. 파트가 세분화 된 상황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은근히 호기심이 동한 김지훈이 슬쩍 뷰 박스 앞에 섰다.
‘뭐 때문에 저렇게 심각하지?’
복부 CT를 보는 순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눈에도 결코 쉽지 않은 케이스였다. 수술 중 혹은 후에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특히 출혈을 막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송재덕 선생님도 이런 환자는 힘들어 하실 것 같다. 그렇다고 안할 수도 없고 스테이플을 사용해야 하니까 경석이 형하고 손을 정말 잘 맞춰야 할 수술이네.’
위험하다고 회피하는 의사도 있겠지만 어려운 수술일수록 의사의 도전 정신은 강해진다. 박승준 교수나 이경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지훈은 당연히 함께 수술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런 수술은 무조건 들어가야 하는데 욕심이겠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증이 도졌지만 회진을 뒤로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송진우와 함께 병동 환자를 다 보았다. 그때까지 아무도 특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병실에 들어간 지 30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환자하고 말이 잘 안 되나? 하긴 이 정도면 의사나 환자나 무지하게 신경 쓰이겠지. 근데 하윤호 선생님은 왜 저러고 있어?’
여러모로 은근히 눈에 밟히는 사람이었다.
신기동 교수의 회진까지 돌았다.
무슨 일인지 신현수가 보이지 않았다.
“신현수는 어디 갔어?”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아까 환자 한 명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아직도 보나? 좋은 일이네.”
오늘은 펠로우들 모두 환자를 보는 날인가 보다.
외래 차트마저 마치 입원 차트처럼 자세하게 적성하는 미국 물을 먹은 덕인지 신현수도 환자를 꽤 오랫동안 진료했다. 바람직한 일이었다.
결국 모든 회진이 끝나고 나서야 이혁원을 볼 수 있었다. 의국으로 들어가 커피 한 잔 하며 물었다.
“혁원아, 아까 한참 고민하던 환자 수술 언제 하신데? 직장암 환자 말이야.”
“그 환자는 또 언제 보셨어요?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다음 주에 하실 것 같습니다.”
“교수들이 네 명이나 모였는데 그걸 모르겠어? 상당히 어려울 것 같은데 이경석 선생님하고 같이 하시겠지?”
“당연히 그러시지 않을까요?”
“잘돼야 할 텐데.”
‘다음 주에는 어려운 수술이 줄줄이 이어지네. 하윤호 선생님 수술을 들어가 줘야 하나? 환자만 아니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데 이게 무슨 난리야.’
수술이 아니라 사람이 어렵다.
‘나 몰라라’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수술하는 손이 눈에 밟혔다.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환자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지워지질 않았다.
‘하루아침에 실력이 좋아질 리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지?’
당장은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입맛을 쩝쩝 다신 김지훈이 막 일어서려는 순간 신현수가 급히 들어왔다.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