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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658화 (658/1,329)

6화. 같은 일 다른 판단. (1)

김지훈도 며칠 사이에 느낀 즐거움과 뿌듯함을 뒤로 했다. 이제 본과 2학년이지만 고경철이 많을 것을 느끼길 바랐다. 이제는 치열한 일상으로 돌아갈 때였다.

중환자실 환자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역시 송진우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 다녀갔는지 챠트에 아침에는 없었던 새로운 기록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환자를 직접 보지 않아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드레싱도 깔끔하기만 했다.

‘내가 후배 복은 참 많네.’

“송진우 선생 언제 왔었어요?”

“30분쯤 됐을 거예요. 이혁원 선생님하고 나종진 선생님도 그렇고 참 자주 오세요.”

후배들 덕분에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어제 당직 아닌 당직을 섰고 오늘은 진짜 당직이라 은근한 피로감을 느꼈는데 그마저 싹 사라졌다.

밤늦게 응급수술이 떴다.

간만에 박순용과 당직이 겹쳤다.

이번에는 비장 손상이 의심되는 환자였지만 재빠른 처치 덕에 바이탈은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역시 총치프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다.

수술 방으로 올라가던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4개월만 지나면 박순용 선생님도 손을 놓네. 모든 선생님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이젠 이런 수술도 할 때가 됐겠지?’

박순용은 3년차 때부터 꽤 많은 수술을 받았다.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장 손상 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박순용 선생님, 집도하세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던 박순용이 인사를 하고는 수술을 시작했다. 퍼스트를 서며 비장 절제를 돕던 김지훈이 나직한 콧소리를 냈다.

이혁원이나 나종진과는 또 다른 손이었다.

매끄럽고 과감한 손길에서 자신감마저 엿보였다. 응급수술에 한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끝났다.

비장을 절제한 부위가 깔끔하기만 했다.

이것이 바로 3년차와 4년차의 수준 차이일 것이다.

“선생님, 지적할 부분은 없으십니까?”

수술이 끝난 후 도리어 박순용이 물어왔다.

“잘하셨습니다. 굳이 지적을 하자면 비장 동맥 처리가 조금은 미흡해 보여요. 타이할 부분을 확실하게 박리해야 만에 하나 타이가 풀릴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솔직히 혈관은 마음처럼 처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역시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겠죠?”

“다른 방법이 있나요. 평생 배워야죠.”

“명심하겠습니다. 선생님하고 수술하니까 너무 좋습니다. 손 놓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앞으로 기회 되면 자주 불러 주십시오.”

깍듯한 말과 태도였지만 언제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박순용이었다. 어쩌면 교수와 전공의를 떠나 친하게 지냈던 선후배였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그 덕에 민감한 문제라 하기 힘든 말도 꺼낼 수 있었다.

박순용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순용 선생님, 병옥이는 어때 보여요?”

“글쎄요. 모든 면에서 정말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가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네요.”

“어떤 면에서요?”

“진우가 가진 장점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동기라 그런 생각이 안 든다면 혁원이와 종진이만 봐도 되는데······.”

말꼬리를 흐렸다.

치프로서 자신의 책임 하에 있는 후배의 단점을 말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강병옥의 속마음을 모르는 한 확신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도 더 이상 말을 끌고 싶지 않았다.

‘후우!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네.’

“저도 노력할 테니까 남은 기간 동안만이라도 잘 가르쳐 주세요. 최고의 일반외과 의사가 될 수 있는 놈이잖아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술 순서가 바뀐 사건 이후 모두들 강병옥을 주시하고 있었다. 설혹 문제가 있더라도 비난이 아닌 애정 섞인 조언이라면 반드시 고쳐질 것이다.

그렇게 믿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선배다.

박순용이 병실로 올라간 환자가 완전히 깰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 의미를 강병옥이 느끼길 바랐다. 김지훈의 마음을 누군가 알기라도 한 듯 다음 날 응급실로 환자 한 명이 내원했다.

정말 일복 터졌다는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펠로우들과 당직 교수마저 수술실에 묶여 남은 사람은 김지훈 뿐이었다. 마침 강병옥이 병동에 있어 함께 응급실로 내려갔다.

‘누가 보면 응급실이 내 진료실인 줄 알겠다. 시간도 그렇고 상황도 참 절묘하네.’

뜨거운 물이 배에 쏟아지면서 발생한 화상으로 손바닥만 한 부위에 물집이 잡힌 2도 화상이었다. 개인 의원에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어 대학 병원 응급실까지 올 상태가 아니었다.

어쨌든 환자가 온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

김지훈이 치료 중인 강병옥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우리가 치료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아파서 온 환자야. 꼼꼼하게 치료해.’

소독약이 환부에 닿자 심한 통증을 느낀 환자가 움찔거렸다. 몸을 잔뜩 구부려 치료하기 힘들 정도였다. 엄살만은 아니었다. 화상 부위가 작다고 해도 바람만 불어도 아프다는 심재성 2도 화상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아아! 살살해 주세요.”

“조금만 참으세요.”

강병옥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에이! 이런 것도 우리가 치료해야 하나? 개인 병원 놔두고 대학 병원까지 왜 와?’

김지훈은 지켜만 보았다.

치료를 위해서 가끔은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 치료가 끝난 후 말하기 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환자 분. 지금 입은 화상이 가장 아픈 화상입니다. 참기 어려운 건 알지만 움직이시면 치료하기 힘드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곧 끝납니다.”

“흉은 안 남을까요?”

“염증만 생기지 않으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내일부터는 근처 가까운 외과 의원에서 그만 오라고 할 때까지 치료 잘 받으셔야 합니다.”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다 나으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크든 작든 화상은 화상이다.

“2도 화상이라 최소 열흘에서 보름은 잡아야 합니다. 물론 상처가 좋아지면 매일 치료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치료 기간에 답답한 한숨이 터졌다. 그게 환자 마음일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치료가 끝났다. 원칙대로 외기와 접촉하지 않도록 단단하게 밀봉했다.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스테이션으로 가 투약 오더를 내렸다. 겸사겸사 강병옥이 작성한 응급실 차트도 확인했다. 빠진 항목 없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었다.

‘병옥아, 사소하다고 지나치지 말고 이렇게만 신경 써.’

당연한 일을 두고 왜 웃음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젊은 청년 한 명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잘 생긴 얼굴도 모자라 키까지 훤칠했다. 성큼성큼 걷는 모습에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스테이션으로 다가오자 간호사의 눈이 반짝였다.

김지훈이 곁눈질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패션모델이야, 배우야? 너무 비교되네. 빨리 오더 내고 사라져야겠다.’

후다닥 마무리를 하던 김지훈이 몸을 돌리다 말고 귀를 쫑긋거렸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배에 화상을 입은 분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40대 여성 분입니다.”

“화상 환자 분이요? 지금 처치 실에서 나오시는 저 분 아닌가요?”

“아! 제대로 찾아왔네요. 감사합니다.”

환자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결코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예의를 보였다.

현실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청년이었다.

김지훈이 내심 부러움에 찬 눈길을 보내는 순간 젊은 청년이 뚜벅뚜벅 다가왔다. 역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뭔가를 내밀었다.

젊은 사람이 명함을?

중저음으로 살짝 깔리는 것이 목소리마저 매력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글렌 호텔에 근무하는 도경준입니다.”

얼떨결에 명함을 받아든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순간 실례라는 생각에 급히 헛기침으로 마무리를 했다.

글렌 호텔 총괄 부장.

도경준.

부장이라고 하기에는 젊어도 너무 젊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둘 중의 하나다.

‘사기꾼 같아 보이진 않는데 재벌 2세?’

“일반외과 김지훈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환자 분 상태가 어떤지 해서요. 우리 호텔에서 투숙하시던 중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개인적인 부주의라고 하시면서 혼자 치료를 받겠다고 하시지만 저로서는 지나칠 수 없는 일입니다. 조금도 문제없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싶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환자 상태는 물론 향후 치료 방침까지 모두 설명했다.

“다행히 심한 상태는 아니셨군요. 치료도 꼼꼼하게 해 주시고 상세한 설명까지 모두 감사드립니다.”

도경준이 다시 환자를 찾았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저희 호텔에서 벌어진 일인 만큼 다른 걱정 마시고 치료를 잘 받으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로 벌어진 일인데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글렌 호텔 다시 봐야겠는데요.”

“아닙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도경준이 환자와 함께 응급실을 나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도경준에게 받은 인상이 제법 강렬했다. 탤런트 뺨치는 외모가 아니라 투철한 직업의식과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동안 무뚝뚝하게 대했던 강병옥과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기회였다.

“병옥아! 멋진 사람을 봤다.”

“키도 크고 잘생기긴 했네요.”

“그게 아니라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직접 응급실까지 와서 자기 직분을 다하잖아. 어느 직업이나 마음 씀씀이가 참 중요해. 그렇지?”

강병옥이 콧등을 찡그렸다.

“의사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마음도 중요하지만 실력이 없으면 애초에 의사로서의 자격이 없잖아요.”

“맞는 말이야. 실력이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이지. 하지만 반쪽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는 감정이 없는 기계가 아니라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치료하잖아.”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시기가 전공의 때 아닌가요? 전문의가 된 이후에는 기회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병옥의 각오도 느껴졌다.

“그래. 그 말도 맞아. 열심히 해야지. 단, 실력과 마음가짐을 제대로 갖는 일은 서로 다른 일이 아니야. 어느 것이 우선이라고 말할 수도 없어. 도경준이라는 사람을 봐. 굉장히 젊은 사람인데 총괄 부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이유가 있지 않겠어?”

“혹시 호텔 사장 아들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기본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많이 든다. 설령 아들이라고 해도 저런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잖아.”

강병옥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물려받은 돈이 많든, 배경이든 간에 뭔가 있는 사람이 실력까지 갖췄으니까 벼락출세를 했겠죠.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실력입니다. 선생님도 실력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대우는 받지 못했겠죠. 이런 환자는 나중에 신경 써도 충분할 겁니다.’

몇 마디 대화 속에서 드러난 견해 차이에 김지훈 역시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후배에게서 이런 벽을 느낄 줄은 몰랐다.

‘후우!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수련 내내 가르치고 느끼게 한다면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겠지.’

선배로서 전공의를 가르쳐야 할 교수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강병옥은 놓치지 말아야 할 인재라는 생각이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여느 때처럼 무척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신임 교수들이 보강됐지만 이준영 교수, 이혁민 교수, 신기동 교수의 일상도 변함이 없었다. 외래가 있는 날이면 진료 때문에 바빴고 수술이 있는 날이면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늦어지기 일쑤였다.

김지훈은 펠로우 2년차치고는 상당히 안정적으로 자신의 환자를 확보했다. 신현수 역시 차근차근 한 발씩 내딛으며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복강경 케이스가 없어서 조급해 보였지만 여기까지면 편안한 일상이었다.

평생의 라이벌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둘 다 몸이 편할 리가 없었다. 당직, 참관, 부족한 부분에 대한 연구에 전공의 교육까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이경석이 그나마 숨은 쉬었지만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서울 병원 원장이 된 송재덕 교수가 진료 이외의 일로 너무 바쁜 탓이었다.

사실 상 대장 항문 파트에는 두 명의 교수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덕에 파트의 거의 모든 수술을 박승준 교수와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와! 요새 형 얼굴 보기 정말 힘드네요. 도대체 일주일에 수술을 몇 개나 하는 거야?”

“거의 다 퍼스트야. 부러울 거 없어.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 너희들이 바빠서 못 보는 거지 내가 바빠서가 아니다.”

“우린 수술 말고 다른 일 때문에 바쁘잖아요. 현수 저 자식 때문에 더 그래요. 어쨌든 퍼스트도 다 실력이죠. 벌써 세 달이 다 되가는데 언제까지 같이 수술 하실 거예요? 이젠 각자 수술할 때도 됐잖아요?”

“내 핑계 대지 마.”

신현수가 김지훈을 째려보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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