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첫 강의와 실전. (1)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그런 것 같은데 입에서 사과 향기가 왜 나?”
“교과서에 그런 말 없어?”
“Apple이라는 단어는 없어.”
교과서는 모두 원서다.
영어에 능통해도 한글보다는 훨씬 오래 걸린다. 증례 하나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쏜살처럼 30분이 지났고 절반 이상의 증례는 읽어보지도 못해 거꾸로 푼 친구들의 답을 취합할 수밖에 없었다.
“강의 시작합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요. 강의 끝나고 다시 출석부를 거니까 바로 가지 말아요.”
확실히 일반외과 선생님들은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출석 미달도 다운(Down : 유급) 사유기 때문에 확실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대타나 치면서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고 시험만 잘 봐 다운을 면하는 일은 내가 보아도 아니었다.
매형이 교탁 앞에 섰다.
“자! 첫 번째 증례부터 봅시다. 어떤 질환인지 아는 사람 말해 볼까요?”
자신 있어도 입을 다물 판인데 누가 대답을 할까?
이런 방식에 익숙하지도 않았다.
매형이 출석부를 힐끗 보더니 바로 누군가를 지명했다.
“아무도 없네. 그럼 3번이 대답해 봅시다. 3번.”
3번? 정말 3번?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이면 1번도 2번도 아닌 3번이란 말인가?
설마 매형이 내 번호를 알고?
졸업한 지 6년이 지났다.
전공의 때 시험 감독을 들어갔던 것이 마지막이니까 강의실 냄새는 3년 만에 맡아본다.
어디 나가면 다 커서 징그럽다는 소리를 들을 후배들이었지만 9년 차이 탓인지 참 파릇파릇하다.
교탁에 서자 후배들이 긴장이 눈에 보인다.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긴장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하긴 이제 임상 과목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기초 교수들과 임상 교수들이 주는 느낌이 다르긴 했다.
사실 나도 조금은 긴장이 된다.
처남과 눈이 마주 치는 순간 중압감마저 들었다.
강의 못한다는 소리라도 나오면 열심히 도와 준 와이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장인어른과 손일석은 특히 주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마음을 다잡고 강의를 시작했다.
준비한 대로 충실하게 때론 농담을 섞어가며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를 유도했다.
이상한 일이다.
말발이 팍팍 선다.
원인 없는 결과 없듯 이유 없는 일도 없다.
후배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긴장감을 주는 존재가 외과 선배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명 앞에서 발표를 두 번이나 했다. 그때의 소중한 경험이 오늘의 내 말발을 만든 것이다.
순간 경험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 분위기를 이어가야 한다.
강의 전에 느낀 긴장이 어디로 갔을까?
조는 놈이 몇몇 보였지만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안 졸은 사람 없을 것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혁원과 나종진에게 처분을 맡겼다. 어깨를 툭 치는 하얀 가운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꼭 예전의 손일석을 보는 것 같았다.
무사히 슬라이드 강의가 끝났다.
30분 정도 시간을 주고 커피 한 잔을 했다.
“혁원아, 종진아, 강의 괜찮았어?”
“어후! 선생님 타고난 교수님 같습니다.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강의가 정말 감명 깊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학교 다닐 때 이런 강의를 들었으면 눈이 말똥말똥했을 겁니다. 너무 재밌게 하셨습니다.”
딸랑! 딸랑!
손일석이 이 자식들에게 빙의라도 한 걸까?
아부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왜 웃음이 나오고 커피는 또 왜 이렇게 달까?
자! 내친김에 분위기 이어가자.
토론식 강의는 더욱 즐겁게 하리라 마음먹었다.
첫 번째 증례다.
후배들 중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한다.
이름은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제일 편한 방법은 번호를 부르는 것이고 당연히 번호 하나를 아무 생각 없이 선택했다.
정말이다.
그런데 처남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났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나도 솔직히 당황스럽고 놀랐다. 의도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교수와 학생, 매형과 처남.
어디로 봐도 고경철은 덤비지 못한다. 사석에서 항의라도 하면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주는 순간 찌부러질 것이다. 장인어른에게 슬쩍 정보를 흘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교수로서 관심사는 하나뿐이다.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까?
반드시 그래야 한다.
아버지와 매형 그리고 거의 확정된 매형까지 모두 일반외과 의사다. 예습은 필수다. 만일 가문에 먹칠하면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고경철. 가장 먼저 의심되는 질환이 뭐야?”
백 쌍의 눈동자가 고경철에게 집중됐다.
잠시 망설이던 고경철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급성 충수돌기염이 의심됩니다.”
“잘 봤어. 그럼 2번 문제와 연관된 질문인데 근거가 뭐야? 그때 보이는 복부 진찰상의 특징적 소견이 있겠지?”
“첫 이삼 일간 지속된 전체적인 복통과 오심, 구토는 전형적인 전구 증상입니다. 응급실에 들어올 때 우측으로 몸을 구부린 것 또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특징적 소견은 우하복부 압통과 반사통입니다.”
“도움이 되는 검사법은?”
“기본적으로 의사의 진찰 소견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만 최근에 와 초음파가 간단하면서도 상당한 정확도를 가진 검사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우우’소리가 들렸다.
학생 때 흔히 볼 수 있었던 익숙한 반응이었다.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예습을 하지 않고는 이렇게 척척 대답할 수가 없었다. 본과 2학년이 알아야 할 기본은 이미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감별해야 할 주요 질환은 뭐가 있지?”
고경철이 우물쭈물 거리며 교과서를 훔쳐보았다.
지금까지만 해도 훌륭했다.
또한 책은 보라고 있는 것이다.
“책보고 대답해도 돼. 시험 아니다.”
“예. 선생님.”
적절한 치료법과 치료 후 시기에 띠라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까지 정확하게 대답했다. 사전에 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책을 보고도 대답하기 힘든데 대견했다.
“정확하게 잘 대답했어. 질문 있어?”
대개는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 앉기 마련이다. 그런데 고경철이 주변을 훅 둘러보더니 힘차게 입을 열었다. 기대했던 바였다.
“사과 향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충수돌기염 환자 입에서 정말 그런 냄새가 납니까?”
질문까지 완벽하게 기대에 부응했다.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왠지 모를 기분 좋은 미소까지 입에 걸렸다. 처남이기 때문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보는 교수의 마음일 지도 몰랐다.
이혁원과 나종진은 어떨까?
“교과서에는 안 나오지? 나종진 선생. 나대신 설명할 수 있을까?”
구석에 앉아있던 나종진이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이혁원과 잠깐 눈을 마주친 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논문에 따르면 환자의 2-30퍼센트에서 사과 향이 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정식 진단 방법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증상이 굉장히 애매모호할 때 간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 나종진이다.
“이혁원 선생, 2-30퍼센트에서 보인다고 하지만 실제 환자를 볼 때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말하기 굉장히 힘들어. 그런데 왜 교과서에도 없는 내용을 프린트물에 넣었을까?”
이혁원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빠른 대답이 나왔다.
“제 생각에 환자에 대한 관심은 아무리 지나쳐도 부족하지 않다는 의미 같습니다. 우리가 환자 배에 꽂힌 드레인의 냄새를 맡는 것처럼 환자에게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증상을 세밀하게 안다면 오진은 물론 불필요한 검사까지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지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가 이 많은 질환들을 모두 배워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혁원 선생의 말이 오늘 강의의 핵심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도 환자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럼 다음 증례를 살펴 볼 까요? 13번.”
강의실이 돌연 3으로 끝나는 번호를 가진 후배들의 소란으로 웅성거렸다. 마지막 열 번째 증례가 93번 후배의 대답으로 끝났다.
“그럼 이것으로 강의를 마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후배들의 목소리가 힘찼다.
첫 강의 치고는 무난하면서도 즐거운 강의였다.
‘처남 얼굴은 보고 가야겠지?’
강의실을 나가던 김지훈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고경철에게 다가가 한마디만 했다.
“열심히 해라. 성적 볼 거야.”
매형이 처남에게 말한 것뿐인데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옆에 있던 후배 두 명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경험상 임상 교수는 정말 어려운 사람이다.
졸업 후에도 계속 얼굴을 봐야하고 훗날 어떤 과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일반외과를 하게 된다면 김지훈은 더욱 어려운 사람이 된다.
‘자식들! 분위기 좋게 강의했는데 내가 무섭나? 왜 고개도 못 들어?’
멀리서 강의를 듣는 것과 직접 대면을 하는 것은 상황 자체가 다를 수도 있는 문제였다.
낯설기도 할 것이다.
김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너희들도 열심히 해.”
“예. 선생님.”
왠지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지만 강의실에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경철아, 뭔가 서로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등덜미를 타고 흐르는데 너 김지훈 선생님 알지?”
후배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병동으로 향했다. 김지훈으로서는 자신이 무서운 교수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환자만 열심히 보면 천사가 따로 없잖아? 그런데 내가 경철이 매형인지 모르는 모양이네.’
평소 김지훈의 속마음이었다.
다음 날 고경아가 의아한 말을 하긴 했다.
“경철이한테 뭐라고 했어요?”
“응? 그냥 강의 때 얼굴 본 거 말고는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무슨 말이에요?”
“그렇죠? 지훈 씨가 매형이라는 걸 친구하고 선배들이 알았다는 게 왜 문제가 되지? 이상하네.”
고경아 말대로 이상하긴 했지만 본과 후배들끼리 나온 말에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날고 뛰어봐야 손바닥 안이다.
‘그러고 보니까 실습 도는 후배들한테 신경도 못 썼네. 앞으로 잘해줘야겠다.’
몸은 하나인데 관심을 가져야 할 후배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그것도 참 힘든 일이다.
첫 강의가 가져온 뿌듯함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바쁜 일상에 파묻히는 순간 무척 공교로운 일이 벌어졌다. 다른 용무가 있어 응급실에 들려 처리하던 중 건장한 청년 한 명이 급성 복통으로 내원했다.
아주 낯익은 얼굴이었다.
고경철 옆에 앉았던 후배였다. 잠시 후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고경철과 후배 한 명이 흠칫 놀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상당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응급실 인턴이 먼저 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후배에 처남 친구들이다. 마침 다른 환자들로 응급실이 북적여 손도 부족했다.
직접 진찰을 했다.
“이름이 최훈이었구나. 웬일이야? 배가 아파서 왔어?”
“예. 선생님.”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배가 제법 아픈지 눈가를 찡그리며 증상을 말했다.
단번에 감이 왔고 복부 진찰을 하며 확신했다.
연락을 받고 온 나종진과 송진우가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부지런히 필요한 준비를 했다. 아픈 환자를 두고 웃으면 안 되지만 나종진이 피식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참 때 맞춰 왔다. 부모님한테 연락드려야 하니까 전화번호 알려줘. 지금부터 아무 것도 먹으면 안 돼.”
김지훈도 웃고 말았다.
여느 환자 같으면 설명부터 했겠지만 의대 후배다. 일분일초를 다퉈 수술해야 할 상황도 아니었고 보호자가 도착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게다가 불과 며칠 전에 강의까지 했다.
“고경철, 진단명이 뭐 같아?”
“예? 진단명이요?”
깜짝 놀라 눈만 멀뚱거렸다.
“틀려도 괜찮아. 마음 놓고 말해 봐.”
“맹장, 아니 충수돌기염 같습니다.”
“그래? 최훈, 너는?”
환자지만 역시 후배다. 자기 몸이 어떻게 아픈지 가장 잘 알 테고 아픈 만큼 생각도 많이 했을 것이다.
“저도 충수돌기염 같습니다.”
후배 세 명의 의견이 일치했다.
“야! 배운 티가 나네. 강의 열심히 들었구나. 너희들 판단처럼 아뻬가 맞으니까 잘 기억해 둬.”
김지훈이 어깨까지 툭툭 두드리며 칭찬을 하자 다들 쑥스러워하면서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픈 후배는 빼고 말이다.
칭찬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