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55화 (655/1,329)

4화. 첫 강의. (2)

이혁민 교수가 크게 웃었다.

“아이고! 선생님 말씀에 경석이 진짜 늙겠습니다. 경석이 니 30대 맞다. 과장으로서 인정한다.”

“어허! 이 과장. 난 원장이야. 원장. 그리고 경석이는 내 제자다. 내 제자. 이 과장은 현수나 잘 간수해. 지훈아. 현수야. 대장하자. 대장. 아직도 늦지 않았다.”

“선생님. 욕심이 많으십니다. 사이좋게 혈관에도 한 명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 교수. 일석이로 만족해. 일석이로. 그놈이 공수라며 공수. 일당백이잖아. 낙하산 잘 타고 있는지 모르겠네. 하사관들도 툭하면 다리 부러지는 게 그 동넨데 말이야.”

모처럼 큰 웃음이 터졌다. 남들 다 웃는데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던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강의 준비는 잘 돼가?”

“예.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걸 왜? 신현수, 이경석, 함께 준비했지?”

“예. 선생님.”

“잘해.”

제자의 첫 강의가 코앞인데 그것으로 끝이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김지훈, 떨지 말고 잘해라. 확실하게 준비했어도 전달을 제대로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 또박 또박 말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마라.”

“이 과장. 수술할 때 아무리 뭐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데 떨 리가 있어? 김지훈, 혈관 수술할 때처럼만 해.”

“이 과장. 신 교수. 학회에서 두 번이나 발표한 지훈이야. 그런 걱정이 바로 천하의 쓸데없는 걱정이야. 쓸데없는 걱정. 지훈아. 내 말이 맞지? 그치? 하 교수도 괜찮을 거다. 사람 살다 보면 이러저런 일 많이 생기는 법이다. 이참에 대장하자. 대장. 좋다. 좋아.”

한때 사라졌던 대장 소리가 또 나왔다.

김지훈이 여러모로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은근한 응원과 격려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요즈음 하윤호 교수도 잠잠했다. 그러나 막상 강의 자료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다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부담감이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교수라는 자리에 걸린 책임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꼈다. 외래 진료, 수술, 당직, 전공의 교육에 강의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일단 발등의 불은 강의다.

충실히 준비하지 않고는 강의가 불가능 할 정도로 분량이 어마어마했다. 급성 복증(Acute Abdomen)은 구체적인 질환 몇 가지가 아니라 배가 아플 수 있는 모든 질환을 전반적으로 다루기 때문이었다.

급성 복증(Acute Abdomen)!

급성으로 증상을 보이는 위염, 장염, 대장염, 담낭염, 신장염, 충수돌기염(맹장염 : 아뻬), 게실염, 난소염, 자궁 근막염 등등.

복통을 유발할 수 있는 악성 종양.

혈복강과 복막염이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장기 손상.

심근경색, 흉강 혹은 폐 염증, 부인과 질환 등 복부 질환이 아님에도 복통을 유발할 수 있는 질환.

말 그대로 배가 아플 수 있는 모든 질환을 파악하고 그중에서 외과적 처치가 필요한 질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교과 파트다.

신현수와 머리를 싸맨 끝에 중요한 케이스 위주로 준비했다. 슬라이드 강의와 함께 질답 형식을 취하기로 해 고경아를 앞에 앉히고 강의 연습까지 했다. 시험 양식과 유사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도 유용할 것으로 판단됐다.

예를 든다면?

(증례) 27세 남자 환자가 3-4일 전부터 시작된 복부 전반에 걸친 통증과 오심 및 구토를 주소로 내원했다. 특별한 과거력과 가족력은 없었다. 오른쪽으로 몸을 구부린 채 펴질 못했고 입에서는 사과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복부 촬영상 특별한 이상 소견은 보이지 않았고 백혈구 수치는 약간 증가된 상태였다.

1. 가장 먼저 의심되는 질환은?

2. 그때 보이는 복부 진찰 상의 특징적 소견은?

3. 도움이 되는 검사법은?

4. 감별해야 할 주요 질환은?

5. 적절한 치료법은?

6. 치료 후 시기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은?

(배점 3점)

이런 식이다.

문제 하나에 0.5점이니 반을 맞추면 1.5점이다. 그러나 다들 시험 봐서 알 것이다. 1번이 막히면 2번은 절대 풀 수 없다. 따라서 빵점이 아니면 3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짜다!

유급 제도까지 있는데 너무하다.

어쨌든 외과적 처치가 필요한 모든 질환을 이런 형식으로 기술하고 문제를 낼 수 있다. 전공의만 돼도 쉽게 알 수 있는 질환이지만 임상 경험이 없는 학생에게는 뜬구름 잡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각각의 질환을 확실하게 숙지해야만 본과 3학년부터 시작되는 임상 실습을 효과적으로 돌 수 있다. 점차 학년에 따른 학사 일정과 교육 내용이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이런 식의 일정을 따르고 있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났다.

강병옥이 드레싱을 제대로 하는지, 차팅은 정확하게 돼 있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마치 1년차를 대하 듯 빨간 펜까지 들었다. 반성하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이 정도로 이해하고 지나갈 일이었으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2년차 차팅이 이게 뭐야? 똑바로 해. 드레싱은 환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일이니까 확실하게 해야 한다. 그때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항상 생각하고.”

거의 매일 질책을 받는 강병옥도 그렇겠지만 김지훈에게도 절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기본을 숙지하고 환자에 대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만을 바랐다.

어느새 첫 강의 날 아침 해가 떴다.

오전 8시 30분.

고경철이 두툼한 외과 교과서를 꺼내며 눈가를 찡그렸다. 아버지에 매형도 모자라 매형 될 사람까지 외과의사다. 일일이 성적을 보지는 않겠지만 재시험이라도 걸리면 두고두고 놀림받을 것이다.

그 탓에 가장 부담 되는 과목이었다.

9시가 가까워지며 하나둘 자리가 차기 시작했다.

단짝 두 명이 잽싸게 옆에 앉았다.

“경철아! 일찍 왔다. 웬일이냐. 아후! 오늘도 6시에 끝나네. 이런 날은 정말 힘들어.”

“그런 의미에서 저녁 먹고 당구 한 판 어때?”

“당구? 물 당구 80이 왜 이렇게 덤벼? 술 내기 할까?”

“100이나 80이나 그게 그거지.”

“한 번이라도 이기고 그런 말을 해라.”

“내가 더러워서 여름방학 때 전지훈련 갔다 온다. 경철아. 너도 칠 거지? 세 명은 돼야 칠 맛이 나지.”

고경철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안 돼. 나 오늘 저녁에 바로 외과 복습해야 돼.”

“어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 시험 때도 아닌데 무슨 복습이야? 인마. 야마하고 당일치기는 진리야. 진리.”

“너나 그렇게 하셔. 난 그럴 일이 있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외과만은 성적 잘 받아야 돼. 아니면 평생 얼굴 못 들고 다닌다.”

친구 두 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고경철이 각오 단단히 했는지 이유도 말하지 않고 교과서에서 고개를 박고 눈도 떼지 않았다.

온갖 소리들로 시끌벅적했던 강의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하얀 가운을 입은 두 명의 전공의가 들어선 것이다. 제법 무섭다고 소문이 난 나종진과 이혁원의 양손에 프린트물이 가득 들려 있었다.

“종진아. 프린트물 나눠줘.”

출석부를 꺼내 든 이혁원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후배들의 눈빛 속에 긴장이 실려 있었다. 똑같은 기분으로 강의를 받은 지가 얼마 전 같은데 벌써 6년이나 흘렀다.

‘핏덩이들.’

왠지 뿌듯해 어깨까지 으쓱거렸다.

나종진도 다르지 않았다.

“출석 부릅니다. 대타치는 사람은 같이 결석 처리하니까 목소리 바꾸거나 자리 옮기지 마세요. 1번.”

“예.”

100명이다.

이름까지 부를 겨를이 없다. 빠르게 출석을 점검해야 시작 시간을 맞출 수 있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매서운 눈과 귀로 대답 소리에 집중했다.

“100번.”

“예.”

마지막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들어올 사람은 단 한 명이다.

당연히 외과 교수다.

강의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자세를 바로잡던 고경철이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매형이다.

“김지훈 선생님이다!”

누군가 나직하게 소리쳤다.

“뭐? 정말이야?”

“그래. 인마. 확실해.”

친구 놈들 자세가 반듯해졌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임상 실습을 도는 선배들이 진저리를 치는 전공의 세 명이 있다. 피할 수 있으면 무조건 피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일명 쓰리(three) X이다. X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각자 상상에 맡긴다.

매형은 한술 더 떠 그들보다 더 조심해야 할 교수란 소문이 돌고 있었다. 오죽하면 강의를 들어오는 교수 이외에는 정면으로 마주쳐도 임상 교수인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매형을 단번에 알아봤을까?

따르륵 선생님.

수술 킴.

매형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별명은 참 멋지고 친근했다. 하지만 실습을 도는 선배들의 반응은 판이할 정도로 매형을 어려워했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도 같은 말을 들었다.

“일반외과 선생님들이 분위기는 좋은 것 같은데 의외로 무서워. 뭐 하나 삐끗하면 그냥 죽음이야. 특히 이혁원 선생님하고 나종진 선생님이 제일 무섭다. 그리고 복병이 한 명 있어. 2년차 중에 강병옥 선생님이라고 있는데 쓰리 X보다는 조금 낫지만 정말 주의해야 돼.”

“송진우 선생님도 무시 못해. 리포트 하나 잘못 내면 얼굴이 시뻘게져서 뭐라고 하시는데 은근히 떨린다. 오죽하면 별명이 불타는 고구마겠냐. 앞에 있으면 정말 뜨거워.”

“야! 송진우 선생님은 순둥이에 천사야. 너 그 형이 예비역이라는 거 알아? 18방위니까 제때 들어왔으면 이혁원 선생님하고 동기인데 그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 나이를 떠나 선배는 선배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셨단다.”

전공의 선생님들이 그렇게 무섭나?

친한 선배 말고는 잘 모르니까 통과.

일반외과 분위기도 실습을 돌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관심사는 도대체 왜 매형을 무서워하는 지였다.

“형, 그런데 교수님들도 그렇게 무서워요?”

“경철아. 교수님들은 회진이나 강의 때 말고는 우리랑 접촉할 시간 자체가 없는 분들이야. 무서운지 안 무서운지 알 수가 없지. 딱 두 명만 빼고.”

“누구요?”

“무서운 분이 또 있겠지만 이준영 선생님하고 김지훈 선생님이 단연 발군이다. 생각해 보면 두 분 다 별다른 말씀도 없고 가끔 열심히 하라고만 하시는데 긴장을 풀 수가 없어.”

“왜요?”

“이준영 선생님은 한 번만 보면 저절로 알게 돼. 김지훈 선생님은 좀 다르긴 한데 예를 들어 병동에 딱 뜨잖아? 그러면 전공의 선생님들 눈빛이 달라져. 긴장하는 게 눈에 팍팍 보이니까 우린 어떻겠어? 긴장 백배지. 그냥 얼음이야.”

“전공의 선생님들이 왜 그렇게 무서워하세요?”

“그게 이상해. 화내시는 일도 없고 그랬다는 말도 못 들었는데 다들 그래. 옛날에는 폭력이 일상다반사였다니까 우리가 모르는 비사가 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그래서 우리도 별명 하나 만들었잖아. 리틀 이준영.”

“리틀 이준영이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아까 말했잖아.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셔. 어쩌다 말 한마디 툭 던지시면 소름이 쫙쫙 돋을 정도야. 천하의 김지훈 선생님도 이준영 선생님 앞에서는 어깨에 바짝 힘주고 긴장을 못 푸시는 게 보일 정도지만 우리가 볼 때는 둘 다 정말 만만치 않거든.”

별명이 세 개?

아주 나쁜 놈이거나 반대로 무척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일 것이다. 어쨌든 내가 아는 매형과는 전혀 다른 소문이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물론 처남이라는 말을 하면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아 입은 꾹 다물었다. 본과 3학년이 돼 임상 실습을 돌면 선배들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펠로우라 강의도 없을 테니 몇 년 후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매형이 강의를 들어왔다.

너무 놀라 눈만 껌벅거렸다.

헉!

눈이 마주 쳤다.

매형의 하얀 이빨이 형광등 불빛에 파르라니 빛났다. 서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따라 흘렀지만 사적인 관계에 연연할 매형이 아니라고 굳건히 믿었다.

처남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매형의 첫 강의다.

출석 점검하고 강의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힘차게 응원했다. 강의 못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야말로 가문의 수치일 것이다.

‘매형. 파이팅!’

강의실을 밝히던 불이 꺼졌다.

슬라이드 불빛을 따라 매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우!

정말 첫 번째 강의 맞아?

학생이 정확하게 평가하기에는 무리한 점이 많겠지만 경험 많은 교수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리어 딱딱하기만 한 다른 수업과는 달리 가끔 농담까지 하며 웃음을 유도했다. 덕분에 수업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다.

“다들 변비 우습게 생각하는데 딱 한 번만 손으로 파보면 그런 생각 싹 사라집니다. 이혁원 선생, 나종진 선생. 지금까지 몇 번 팠어?”

“세 번 팠습니다.”

“저도 세 번 정도 판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우리 선생님들이 얼마나 능력 있고 멋있는지 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되고 싶으면 최소 세 번은 파야겠죠? 그 이상 파면 교수 됩니다. 환자를 위해서 돌이 아니라 변이 나올 때까지 확실하게 파세요. 심한 변비는 의사도 당황하게 하는 급성 복통을 일으키는 요인이니까요.”

순식간에 1시간 30분이 지났다.

슬라이드 강의가 끝나고 프린트물이 남았다.

“프린트물은 질답 형식으로 진행할 겁니다. 30분 정도 여러분들끼리 토의할 시간을 줄 테니까 남은 시간도 즐겁게 공부해 봅시다.”

수업 시작 전의 긴장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급한 용무를 해결하고 열 가지 질환의 증례를 보며 답을 찾았다. 교과서와 강의 내용을 상기해도 답을 찾기 쉽지 않았다.

“첫 번째 증례는 급성 충수돌기염 같지 않아?”

환자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모든 증례가 아리송하기만 했다. 나만 아니라 모든 놈들이 다 그런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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