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첫 강의. (1)
두통을 유발하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요새 수술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이젠 문제 될 것이 없어요. 적응될 때도 됐으니까 앞으로는 달라지시겠죠.”
“그랬으면 좋겠는데 전종훈 교수가 생각 나. 수술에 문제가 있지 않으면 네게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어쨌든 병옥이부터 신경 쓰자. 에휴! 후배는 잘나도 못나도 고민덩어리네.”
“지훈아. 나도 형과 비슷한 생각이야. 가급적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윤호 교수는 병원 직원이기도 해. 그만큼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니까 정확하게 판단했으면 좋겠다. 의료진 내부에서 갈등이 생기면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잖아?”
이경석의 말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쁜 놈 미운 놈 할 것 없이 후배는 정말 골칫덩어리다.
신현수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대학 병원 교수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환자만이 아니었다. 모든 의료진들이 마음 놓고 환자 치료에 임할 수 있도록 일조하는 것 역시 교수의 일 중 하나일 것이다.
한동안 진지한 대화가 이어졌다.
강병옥의 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당분간은 말없이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박승준 교수까지 찾아온 마당이었다.
마음이 약해졌다.
아마도 동료이자 선후배이기 때문일 것이다.
퇴근하기 전 따로 조용히 불렀다.
긴 말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 믿었다.
“강병옥. 이번 실수가 나쁜 일만은 아니야.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환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그러면 넌 누구보다도 뛰어난 일반외과 의사가 될 수 있어. 사실 뛰어나다고 해도 실력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고 시간이 가면 저절로 늘 수도 있어. 하지만 마음가짐은 안 그렇다. 나도 항상 노력하고 있어.”
생각과는 달리 말이 너무 길었다.
강병옥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알아들었기를 바랐다.
잘나도 못나도 다 후배지만 뛰어나기에 한 번 더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도 결코 그런 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박승준 교수와 하윤호 교수의 말이 강병옥의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 사람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을 수밖에 없어. 실수 한 번에 평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야. 하던 대로만 해. 단, 남들을 압도할 만한 실력이 없으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 경험이 실력이다. -
경험을 쌓는 일에 누가 필요한지 강조하는 말이었다.
- 하필이면 그때 헤모뻬리가 떠. 그냥 이어서 했으면 문제없이 지나갔을 텐데 말이야. 재수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잖아. 박승준 선생님이 별다른 말은 안 했지? 실적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다. 다음 과장을 누가 할지 빤한데 잘 보여서 나쁠 것 없어. 앞으로는 펠로우도 쉽게 할 수 없을지 몰라. 참! 특실 환자 잘 보면 너나 네 아버님께도 도움이 될 거야. -
마음가짐과 실력 그리고 처세술까지 같은 일을 두고 다들 말이 달랐다. 모두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무엇을 가장 중요시할 지는 강병옥 자신에게 달린 일이었다. 오늘도 강병옥은 물론 김지훈과 이혁원 역시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병옥아. 진우를 봤으면 좋겠다.’
송진우도 홀로 있을 때면 얼굴이 좋지 못했다. 사이가 소원해졌다지만 함께 가야 할 동료라는 사실을 단 한 시도 잊은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하나?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까지 1년차에게 미루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알던 병옥이 형은 어디로 갔을까?’
선후배와 동료를 향한 의국원들의 다양한 마음이 교차하는 하루였다.
같은 날 밤.
박승준 교수와 하윤호 교수가 단 둘이 술잔을 기울였다.
“갑자기 술을 다 사고 무슨 일이야?”
“일이 있어야만 술을 사나요? 그동안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자리 한번 만들고 싶었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나직한 대화가 오갔다.
“특실 환자 분은 괜찮으시죠?”
“라파로가 좋긴 좋아. 삼사일 내에 퇴원시킬 수 있을 것 같아.”
“김지훈이 라파로를 잘하긴 잘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수술을 경험이 조금 더 있다고 맡기신 선생님이 더 대단하십니다. 그것도 VIP 환자를 말이에요. 자기를 인정해 주면 알아서 행동해야 하는데 눈치가 없어서 그게 탈이네요. 아직 젊어서 그럴까요?”
박승준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연구실까지 찾아가 미안하다는 말을 직접 했는데 김지훈의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잘잘못에 확실히 대처하는 성격인지 아니면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 알 수 없었다.
‘김지훈, 예상외로 뻣뻣한 놈일 수도 있겠어. 내가 직접 찾아갔으면 이 정도 일은 그냥 넘어가야 맞는 거 아닌가?’
그런 면에서 하윤호 교수는 가려운 곳을 잘도 찾아 긁어주는 존재였다.
‘눈치도 빠르고 내가 직접 하기 힘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실력이 문제야. 어떻게 해야 하지? 잘못 품었다가는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상관 안 하자니 하성원 원장님이 마음에 걸리고 정말 갑갑하네. 좀 더 두고 보아야 할까?’
“내가 잘못했지. 원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잖아.”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나쁘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윤호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병옥에게 슬쩍 순서를 바꾸라는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 빤히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이번 일을 두고 책망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소리였다.
‘역시 내 판단이 맞았어. 빠르게 과장이 되기 위해서는 실적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일단 뜸을 들이면서 풀어 나가자.’
“세상이 원칙대로만 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융통성 좀 기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것도 그거지만 선생님, 제가 걱정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걱정?”
“저도 빨리 조교수가 되려면 실적을 쌓아야 하는데 수술이 도통 잡히질 않네요. 선생님이나 지 교수는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어서 좋으시겠습니다.”
“보기에만 그렇지 하 교수나 나나 마찬가지야.”
“선생님도 엄살을 다 떠시네요. 하하하!”
하윤호 교수가 크게 웃다말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전에 있던 병원에서는 파트를 가리지 않고 수술을 했는데 여기서는 특별한 환자가 있어도 수술을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합니다. 선생님께도 죄송하고요.”
“죄송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실은 대장암 환자가 한 명 있는데 금배지를 달았던 양반입니다. 지금도 영향력이 상당하고요. 수술 받을 병원을 물색 중인데 아버님과 원장님을 통해서 말만 잘하면 우리 병원에서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승준 교수의 눈이 번쩍였다.
VIP가 아니라 VVIP다.
“그럼 오시라고 하면 되지 다른 문제라도 있어?”
“송재덕 선생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왕이면 선생님이 하셔야 제게도 좋은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아시다시피 행세 좀 한다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단단하게 뭉치는 데다 그 사람들 입이면 명의 소리 듣는 건 금방일 겁니다. 무조건 특실 이용이니까 실적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성원 원장님이 하 교수 집안을 인정하신 이유가 이거였어? 아주 좋은 기회인 건 확실한데.’
하윤호 교수 앞에서 조바심을 내면 안 된다.
박승준 교수가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송재덕 선생님이 욕심을 내실 수도 있지만 대장 수술은 이미 내가 거의 다 하고 있어. 그런 문제는 걱정하지 마. 일단 환자 분부터 보는 게 순서 아니겠어?”
“그러면 다행이긴 합니다만······.”
말꼬리를 흐렸다.
하윤호 교수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면 원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무엇일까?
십중팔구 확실한 미래와 입지 보장일 것이다. 박승준이라는 우산 밑에서 비를 피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지동훈 교수라는 방패는 덤으로 얻는 것이다.
‘하성원 원장님이 건재한 한 그 정도 못하겠어? 지금까지 보인 실력이 전부라면 이런 식으로라도 내게 도움이 돼야지.’
“내가 신경 쓸게.”
대답이 없다.
“그러면 이렇게 할까? 하 교수에게 닥친 문제를 하나하나 함께 풀어보자. 솔직히 말하면 김지훈하고 사이가 좋은 것 같진 않던데 그런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좋겠지. 펠로우가 교수 수술할 때 퍼스트를 서는 일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야.”
하윤호 교수의 입가가 말렸다.
단번에 많은 것을 얻을 수는 없다. 김지훈의 속마음이 어떻든 퍼스트만 서줘도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만 믿으면 되겠죠?”
“부탁은 무슨. 같은 처지에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야지.”
‘집안 배경도 실력이라면 실력이지. 날 위해서라도 김지훈이 퍼스트를 서게 만들어야겠네. 뭐라고 해야 말을 들으려나? 이준영 선생님도 문제고.’
실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한 하윤호 교수의 입지를 보장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당분간은 분명 득이 될 사람이었다.
훗날 조교수 임용에서 탈락한다고 해도 그 문제는 박승준 교수의 권한 밖이다. 원망은 들을지 몰라도 절대 책임질 사안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펠로우들이 의외로 복병이네요. 신현수는 이사장님 아들이니까 누구보다 먼저 치고 올라올 겁니다. 그건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겠지만 김지훈도 정말 문제입니다.”
“뭐가?”
“얼핏 들은 말인데 전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사장님께서 신현수만큼 총애한다는 말이겠죠. 그렇게 안 봤는데 아부하는 기술도 제법인 모양입니다. 게다가 간담도 학회에서도 의의로 꽤 인정을 받고도 있답니다. 물론 허경발 선생님이나 이준영 선생님에게 배운 덕이겠지만 전임이 되면 이사장님께서 어떤 대우를 할지 불안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어? 좋게 생각할 수만은 없는 일일 수도 있겠어. 내가 모르는 일이 얼마나 더 있을까?’
“펠로우들도 뛰어나면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지.”
“그래도 정도와 순서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박승준 교수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하성원 원장님 덕분에 정보는 빠른 모양이군. 일단 1년 정도는 곁에 두어야겠어.’
“복잡한 얘기 그만하고 술이나 먹자.”
술 한 병으로 자리를 끝냈다.
집으로 향하던 박승준 교수가 술기운을 쫒았다.
기존의 교수들.
확실하게 점수 따야 할 사람들이었다.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반드시 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이혁원, 강병옥, 하윤호.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해야 할 사람이었다.
‘예상보다 만만치 않은 곳이야. 교수들은 그렇다고 쳐도 펠로우들까지 바짝 신경 써야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
어느 병원이나 성공을 향한 첫 번째 계단은 과장이다. 보다 쉬운 길이라고 생각해 병원까지 옮겼는데 훨씬 난관이 많았다.
술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박승준 교수가 밤늦은 시간에 불구하고 무작정 전화를 했다.
“지 교수, 술 한잔 했다. 나 잘하고 있지?”
“예. 잘하고 계십니다.”
“정말이지?”
“선생님, 우리가 처음 일반외과를 택했을 때, 교수가 됐을 때 가졌던 마음만 잊지 않으시면 됩니다.”
“초심! 초심? 에라! 모르겠다. 동훈아. 나 너 정말 좋아하고 사랑한다. 내일 보자.”
툭 끊어진 전화기를 보던 지동훈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윤호 교수와 강병옥을 크게 혼내지 않은 박승준 교수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이제 시작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초조해 하십니까? 전공의 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그때의 모습을 잃지 않으신다면 평생 선생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수술 순서를 바꿨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도 묵인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멋졌던 선배를 향한 존경과 신뢰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전 병원과는 달리 과 내 파벌 싸움이 없어 훨씬 편안한데 왜 불안해 하실까?”
지동훈 교수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뒤끝이 길면 역효과를 내기 마련이다.
2주간 오프를 금지했다는 사실에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강병옥이 깊게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환자와 일과에 집중하기를 바랐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뭔가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마음을 뒤로 했다.
물론 교수들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마침 퇴근을 앞두고 있어 신임 교수들이 없을 때라는 것도 공교로운 일이었다.
“김지훈. 무슨 일 있었어?”
“별일 없습니다.”
“네 선에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는 경석이나 현수하고 잘 상의해. 혼자 끙끙대지 말고.”
지나가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무뚝뚝한 표정 속에 담긴 이준영 교수의 예리함은 항상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 그래. 무슨 일이 있든 니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 그럴 때가 됐어. 그럴 때가. 너희들 후배면서 제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허허! 제자라! 세월 빠르다. 참 빨라. 그러고 보니 이 교수도 많이 늙었다. 많이. 우리도 팔팔할 때가 있었는데 말이야. 경석아. 넌 쟤들하고 다니지 마라. 차이 나잖아. 차이.”
이경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또 왜 이러십니까? 저도 지훈이나 현수하고 똑같은 30대입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지. 인생 뭐 있니? 즐겁고 편안하게 살면 그게 최고지. 경석아. 너 낼모레면 마흔이지? 그치? 내 말이 맞지?”
“아! 선생님. 정말 왜 이러세요.”
“조금 있으면 불혹이다. 불혹. 이런 말에 흔들리면 나잇값 못하는 거야. 우리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래도 젊어 보이니까 걱정하지 마라. 성질내면 주름살 는다. 주름살 늘어.”
툭하면 엉뚱한 곳으로 말이 튀었지만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제자들이 항상 즐겁게 일하기를 바라는 송재덕 교수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