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신뢰는 절대적 조건이다. (2)
가끔 수술 방 복도를 지나치며 복강경 수술을 보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김지훈 실력이 이 정도였나? 하윤호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신현수나 이경석까지 정말 만만하게 보면 안 되겠어. 어쨌든 확실하게 품에 안아야 돼.’
마지막 피부 봉합을 마친 김지훈이 콧소리를 냈다.
확실히 비만이 심한 사람에게는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개복했다면 아무리 적게 열어도 젊은 여인의 배에 최소 5센티미터 이상의 흉이 남았을 것이다.
‘케이스가 모이면 스터디를 해 봐야겠네. 정확한 적응 조건을 정하면 수술을 권하기도 쉽겠지.’
“김지훈 선생, 수고했어. 라파로는 이거네.”
박승준 교수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선생님.”
“겸손하긴. 고마워. 이혁원, 보호자 만나고 있을 테니까 환자 잘 깨는지 확인해. 강병옥, 넌 다음 환자 준비하자.”
환자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 때 나종진이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박승준 선생님, 응급실에 헤모뻬리(혈복강)가 의심되는 환자가 있습니다.”
“뭐? 바이탈은?”
“불안합니다. 최대한 빨리 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검사 결과는 모두 나왔고 보호자들도 도착했습니다.”
우선순위가 완전히 밀렸다.
더구나 바이탈까지 흔들리는 상태라면 아뻬를 뒤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마취과, 아뻬 환자 올라왔습니까?”
“예. 올라와서 대기 중입니다.”
상황이 꼬였다.
잠시 고민하던 박승준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선생, 미안한데 아뻬 환자 좀 맡아줘. 수술 방까지 올라왔는데 뒤로 미루는 것 보다는 그게 낫지 않을까?”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보호자에게 이미 설명하셨을 텐데 괜찮을까요?”
“일단 내가 먼저 사정을 말할 테니까 김지훈 선생도 보호자 만나서 추가로 설명했으면 좋겠어. 강병옥. 아니다. 이혁원, 응급실은 나하고 병옥이가 맡을 테니까 아뻬 수술 들어가. 나종진, 가자.”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수술실을 나가며 한마디 더 했다.
‘이준영 선생님 아들인데 신경 써야겠지?’
“혁원이 수술한지 오래 됐을 거야.”
이혁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대장 파트를 돌기에 당연히 나종진이 아니라 자신이 응급실 환자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집도 문제까지 거론하다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졸지에 수술 하나를 더 하게 됐다.
오후 회진 돌 시간이 됐지만 당직도 아니고, 아뻬는 빠르게 끝낼 수 있어 큰 부담은 아니었다. 박승준 교수 말대로 겸사겸사 이혁원의 손을 볼 기회이기도 했다.
“혁원아, 내가 설명하는 동안 수술 준비하고 있어. 나도 간만에 네 손 좀 보자.”
“간만에요?”
“열흘 넘었잖아. 며칠도 간만인데 당연한 거 아냐?”
김지훈이 박승준 교수가 강병옥에게 한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수술 욕심으로 따지면 강병옥보다 더한 이혁원이었다. 단 며칠도 꽤 오랜 시간일 것이다.
보호자를 만났다.
환자 얼굴도 제대로 못 본 상태에서 수술을 하려니 상당히 꺼림칙하면서도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다행히 이미 사정을 들은 덕에 별다른 말은 없었다. 다만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좋지 못했다.
“걱정이 많으신 것 같은데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맹장염이 맞는다면 큰 문제없이 잘 끝날 겁니다.”
“다른 병은 아니겠죠?”
“여러 선생님들이 보고 내린 진단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수술 끝나고 다시 뵙겠습니다.”
수술실로 향하던 중 고경아와 마주 쳤다.
“아뻬 환자 우리 교수님이 수술하세요?”
“그렇게 됐네요. 조금 늦을 지도 몰라요.”
“어머! 나 오늘 친구 만나기로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맞다. 저번에 본 친구 만난다고 했죠? 꽤 자주 만나네. 그러면 저녁은 어떻게 하지?”
“학교 다닐 때 제일 친했던 친구를 세 달 만에 만나는데 뭐가 자주에요? 저녁은 알아서 해결하세요.”
정신머리가 없다.
시간관념이 없는 것도 아닌데 꽤 바쁘게 산 모양이었다. 그만큼 고경아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뭐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즐거운 시간 가지라는 말이 고작이었다.
수술 준비가 모두 끝났다.
김지훈의 눈짓에 이혁원이 집도의 자리에 섰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마취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십시오.”
배를 열었다.
수월하게 아뻬를 찾았다.
제법 마른 환자라 그대로 진행해도 무방했다. 그런데 이혁원이 포셉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맹장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아뻬가 배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켈리 주세요. 동맥 묶고 바로 아뻬 타이하겠습니다.”
목소리에 뿌듯함이 팍팍 실려 있었다.
마치 나도 이 방법을 숙달했다는 것처럼 힐끗 눈길까지 주었다. 아뻬를 하는 손만 보아도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김지훈이 눈가에 만족스러운 잔주름이 생겼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이!”
동맥을 묶고 아뻬까지 잘랐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손이었다.
‘자식! 무섭게 발전하네.’
내심 감탄을 터뜨리는 사이 피부 봉합까지 모두 끝났다. 상당히 빠른 진행에 마취과 당직 전공의의 눈에도 즐거움이 잔뜩 걸렸다.
바로 옆 수술실에서 혈복막 수술이 한창이었다.
뜻밖에도 나종진이 아니라 강병옥이 퍼스트를 서고 있었다. 의아한 일이었지만 마치 본능인 것처럼 박승준 교수의 손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한동안 수술을 지켜본 김지훈이 회복실로 향했다.
“야! 수술 정말 잘하시네. 피가 철철 나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간결하고 빠르게! 혁원아,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지? 참! 환자 분 잘 깼나?”
“예. 잘 깼습니다. 선생님, 보호자 분들이 수술 방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보호자?”
“갑자기 집도의가 바뀌어서 걱정이 많을 것 같습니다. 곧 선생님께서 설명하실 거라고 미리 말씀 드렸습니다.”
눈앞에 서있는 후배가 바로 이혁원이다.
실력만이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에 대한 마음가짐까지 확실하게 갖춰가고 있었다. 자랑스럽고 믿음직했다. 이런 후배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마웠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는데 정말 고맙다. 난 스승님께 혁원이 같은 제자였을까? 스승님은 이럴 때 어떤 느낌이셨고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고작 이혁원의 어깨를 잡는 것이 다였다.
한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침묵 속으로 후배를 향한 격려와 사랑, 선배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이 따스하게 흘렀다.
북받친 감정에는 적당히 취할 때가 가장 좋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차트를 찾았다.
“검사 결과도 제대로 못 봤네.”
일반적인 검사들이었지만 확인은 기본이다.
펠로우가 아니라 교수라고 해도 머리가 아닌 몸에 밴 기본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김지훈이 아직도 입가에 즐거움을 묻힌 채 응급실 차트를 집어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 이혁원이 흠칫 놀랐다.
뒤적뒤적 차트를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를 톡톡 치며 눈가를 찡그리다 말고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이혁원, 회진 끝나고 나 좀 보자.”
수술이 끝나면 항상 미진한 점에 대해 말해 주던 김지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복실을 나갔다. 이혁원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지 못했다.
환자가 수술 방에서 나올 때까지 보호자에게 성심성의껏 설명을 한 김지훈이 병동으로 향했다. 막 돌아서려는 순간 보호자가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실례가 될지 모르겠는데 왜 우리가 나중에 수술을 받은 거죠? 더 급한 환자였나요?”
불안하기만 했던 추측이 확신으로 변했다.
고개를 푹 숙이며 이를 악문 김지훈이 간신히 표정을 바꿨다.
“그게 다른 사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서운하시더라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지훈의 안색이 점점 심각해졌다.
부들부들 손이 떨리는 것 같았다.
이혁원은 아무 말도 못하고 뒤만 따랐다.
회진 내내 찬바람만 휭휭 불었다.
병실에서는 활짝 웃었지만 복도로 나오면 얼굴을 굳힌 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송진우도 점점 불안해 지는지 얼굴이 벌게졌다.
방금 전 수술한 환자들의 회복까지 확인했다.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복강경으로 수술한 환자의 차트를 본 김지훈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이혁원. 연구실로 와.”
마침 신현수와 이경석은 퇴근한 후였다.
단 둘이 마주 앉았다.
이혁원이 김지훈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야?”
목소리가 서늘했다.
환자에 관한 일이 아니면 웬만한 문제로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김지훈이었다. 펠로우가 된 이후 일이 년차의 잘못은 삼사 년차에게 전적으로 맡길 정도였다.
화가 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알아채지 못하길 바랐지만 김지훈이 이런 일을 놓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3년차로서 의국 후배의 잘못을 먼저 떠안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을 했습니다.”
“착각? 이혁원, 응급실 환자를 보지 못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어. 그런데 직접 두 환자를 모두 보고도 수술 순서를 착각했단 말이야?”
설혹 환자나 보호자가 모른다고 해도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응급이라면 순서를 바꿀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아뻬라고 해도 생명이 달렸기에 수술 받는 환자나 보호자는 누구나 초조하고 불안하다. 따라서 의사는 어떤 환자가 와도 반드시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신뢰라고 배웠고 평생 지켜야 할 일이었다.
“정말입니다. 다시는 이런 실수 하지 않겠습니다.”
김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착각? 실수?”
실수라는 말에 더욱 화가 났다.
백번 양보해 실수를 할 만한 사람이 실수를 했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이혁원이기에 더욱 화가 나는지도 몰랐다. 환자와 의사간의 신뢰가 달린 문제이기에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 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잘못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혁원은 지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부글부글 가슴이 끓어올랐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혁원. 왜 대답이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혁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태도였다. 이혁원은 그런 후배였다. 순간 수술실에서 본 얼굴이 생각났다. 수술을 앞두고 긴장은 할지언정 얼굴을 굳힐 이혁원이 아니었다.
‘정말 혁원이가 실수했다면 수술실에 들어왔을 때 먼저 잘못했다고 말했을 놈이야. 실수나 착각이라는 핑계도 대지 않았을 거야. 혹시?’
VIP와 평범한 환자.
강병옥의 속삭임과 박승준 교수의 끄덕거림.
이상스럽게 마음에 걸렸다.
“1년차가 아니라 강병옥이 스케줄 냈지?”
“예? 그게…….”
나쁜 짓 하다 들킨 놈처럼 화들짝 놀랐다.
분명 이혁원의 착각이나 실수가 아니었다. 일부러 등을 떠밀어도 절대 그럴 후배가 아니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해명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추측이 맞는다면 전공의 한두 명 혼내고 끝낼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상대가 교수이자 윗사람이라고 해도 절대 지나갈 수 없었다.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한 후 박승준 교수와는 따로 얘기해야 할 것이다.
“응급수술 끝나는 대로 강병옥 불러. 나종진하고 박순용 선생님도 오라고 해. 입 맞추고 오지 마라.”
한기가 들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다.
이혁원이 입술을 깨물며 눈가를 찡그렸다.
총치프까지 부른 이상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병옥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아래 년차다. 어떤 이유로 수술 순서를 바꿨는지도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전공의 문제는 자신들에게 맡겼던 김지훈이었다. 믿음이 없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의국 자체에서 먼저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선생님, 저희들이 해결하겠습니다. 저도 확실하게 어떻게 된 일이지 몰라서······.”
이혁원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의국 선배로서 먼저 자초지종을 듣고 싶은지도 몰랐다.
“이혁원, 이건 실수든 착각이든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수술 순서도 모르는데 환자가 어떤지는 제대로 알겠어? 그런 놈이 어떻게 환자를 수술하고 치료해?”
“선생님······.”
김지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혁원, 같은 말 두 번 하게 할래?”
얼굴까지 시뻘게졌다.
“죄송합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연구실을 나가는 이혁원을 보던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사소한 방심이 큰 실수를 유발하는 법이다. 절대 그럴 리는 없다고 믿으면서도 신장 이식 순서를 바꾸려고 했던 금경태까지 생각났다.
‘어떤 이유가 있든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하필이면 환자가 VIP 때문일까?
좋지 않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기우라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화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흥분된 상태에서는 나중에 후회할 말을 할 수 있었다. 교수들 누구도 화가 난 상태에서는 바로 전공의들을 질책하지 않았다.
전공의들을 보기 전에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자신은 교수이자 선배였고 전공의들 모두 기대할 수 있는 후배이기에 더욱 그래야 했다.
‘후우! 그럴 수 있을까?’
점점 창밖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전후 관계를 따져보아도 명백한 잘못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누군가의 의도가 섞여 있다면 이는 동료와 환자의 믿음을 배신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시간이 가도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실수가 아니라 잘못이야. 착각도 아니야. 누가 잘못을 했든 절대 그런 핑계부터 대면 안 돼. 이혁원, 이건 감쌀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화가 가라앉지 않을까?
김지훈이 불도 켜지 않은 채 자리를 지켰다.
밤 10시가 다 돼서야 전공의들이 들어왔다.
모두들 흠칫 놀랐다.
어둑어둑한 실내에 하얀 가운만 보였다.
“불 켜.”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