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50화 (650/1,329)

2화. 신뢰는 절대적 조건이다. (1)

김지훈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에이! 점심 먹기 전에 수술 테이프 봐야겠다. 어떻게 해결했는지 모르겠네. 현수야. 겸사겸사 이준영 선생님 수술 테이프도 볼 건데 같이 갈래? 라파로라 너한테도 꽤 도움이 되지 않겠어?”

신현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지훈아. 너 내가 라이벌로 안 보여?”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런 건 꽁꽁 감춰 둬야 날 이기지? 금방 추월당한다.”

콧방귀가 터졌다.

“어이구! 토종이 더 무섭다는 소리 몰라?”

“미국 연수 공짜로 다녀온 거 아니다. 언젠가는 돈값을 하게 돼 있으니까 긴장해.”

“어제 수술 보고 많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신현수 선생님.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함께 가시죠.”

무사히 회복된 환자를 살피고는 연구실로 향했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졸래졸래 뒤를 따랐다. 일이 밀린 송진우는 얼굴이 벌게진 채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동안 네 명의 외과 의사들이 비디오 삼매경에 빠졌다. 하나의 과정이 넘어갈 때마다 김지훈은 자신의 감각과 생각을 말했고 모두들 그 말에 집중했다.

점심시간을 조금 잡아먹었다.

펠로우들은 구내식당으로 향했고 이혁원과 나종진은 응급실로 가야 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는 거의 울 것 같았지만 김지훈이나 신현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억울하면 너희들도 펠로우 해.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하하!

그 시간 하윤호 교수가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이마에 식은땀까지 맺혀 있었다.

김지훈의 수술을 보며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으면서 애써 외면했는지도 몰랐다.

‘이건 정말 펠로우 실력이 아니야. 엄청난 경험이 아니면 저렇게 수월하게 수술할 수는 없어. 후우!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러다 정말 펠로우한테도 밀리는 거 아냐?’

전공의가 아닌 교수이기에 자신의 한계를 금방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하물며 펠로우와 상당한 차이가 난다면 앞날이 암담할 수밖에 없다.

이미 교수들은 물론 전공의들의 시선도 좋지 못했다.

- 연공서열에 연연하지 않겠다. -

불현듯 이혁민 교수의 말까지 생각난 하윤호 교수가 눈가를 찌푸린 채 교수실을 서성거렸다.

‘제길! 펠로우한테도 밀린다는 생각이 들다니 이게 무슨 꼴이지? 일단 휴직이라도 신청하고 연수를 다시 가야 하나?’

고민한다고 없던 실력이 갑자기 생길 리는 없었다. 김지훈이 펠로우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하성원 원장이 손을 써 본다고 했지만 김지훈이 말을 안 듣거나 혹은 돌발적인 행동을 한다면 수술마저 여의치 않을 수 있었다.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지훈을 확실하게 휘어잡을 수 있을까? 박승준, 지동훈과는 반드시 한 배를 타야 돼.’

하성원 원장과 나눈 말을 떠나 내부적으로도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를 하던 하윤호 교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실적이 곧 실력라고 했지?’

잠시 후 부리나케 달려 박승준 교수를 찾았다. 도중에 강병옥과 마주쳤다. 평소 고개만 숙이던 놈이 잠시 주춤거리더니 꾸벅 허리까지 굽혀 인사를 했다.

‘저 자식이 왜 저래?’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윤호 교수를 본 강병옥이 눈가를 좁혔다.

‘우리가 듣는 앞에서 연락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뭔가 있다는 느낌이 괜히 든 것이 아니었어. 가까이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하성원 원장님 조카라니 뭐든 성급하게 생각하면 안 돼. 수술은 배울 게 하나도 없지만 다른 도움은 받을 수도 있겠지.’

박승준 교수와 친분이 있는 아버지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됐다. 신임 교수들은 모두 한 사람의 손에 잡혀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성원 원장까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다.

박승준 교수의 힘이 점점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응급실이다.

김지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혁원을 찾았다.

오늘은 박승준 교수 담당이라 마음 푹 놓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콜이 온 것이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야?”

“박승준 선생님께서 찾으십니다. 당직실에 계십니다.”

이혁원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환자는 두 명이었지만 모두 아뻬라 김지훈을 부를 일이 없었다. 혹시 동시에 수술을 할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정규 수술이 남아있어 양방을 띄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이한 점은 있었다.

박승준 교수에게 얼마나 VIP인지 몰라도 환자 중 한 명은 배도 만져보지 못했다. 그간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당혹스러웠지만 전공의가 항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알았어.”

강병옥이 검사 결과를 챙기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1년차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백일 당직 기간인데 왜 혼자 저러고 뛰어다녀? 다들 수술 방에 있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당직실로 들어갔다.

박승준 교수가 반갑게 맞이했다.

“김지훈 선생, 왔어? 여기 앉아.”

“예. 선생님.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커피 한잔 해.”

커피를 내밀며 잠시 뜸을 들였다.

“다른 게 아니라 지금 아뻬 환자가 두 명이야.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라파로로 하길 원하네.”

“그래요?”

김지훈이 반색을 했다.

박승준 교수는 복강경 수술을 하지 않았다.

설혹 할 줄 안다고 해도 경험이 부족하면 선뜻 수술하기 어렵다. 모든 직업이 그렇지만 의사에게 경험만큼 무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술해 달라는 부탁일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그 환자가 내게는 상당히 각별한 분의 따님이야. 내가 직접 수술해 주기를 바라시네. 끝까지 책임져 달라는 말이겠지. 그래서 내 앞으로 입원 시켜야 하는데 집도의 문제가 마음에 걸리네.”

무슨 말일까?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솔직히 말할게. 수술은 김지훈 선생이 하지만 환자나 보호자 관리는 내가 했으면 해.”

“그러니까 수술만 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려운 부탁인 거 알아. 그런데 사정이 참 묘해. 그렇게 해 줄 수 있을까?”

정중한 말투였다.

뭐가 문제일까?

실력과 믿음이 전제돼야 하지만 전공의가 수술하고 교수 앞으로 입원을 시키는 일은 흔하다. 아마도 같은 교수이기에 미안해 하는 것 같았다.

비슷한 말을 해도 하윤호 교수와는 확실히 달랐다.

이런 식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김지훈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편하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환자 분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이해해 줘서 고마워. 참! 수술에 대해서는 내가 다 설명했으니까 특별하게 할 말은 없을 거야.”

곧바로 환자를 진찰했다.

박승준 교수가 함께 했다.

“김지훈 선생, 어때?”

“맞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아뻬였고 살집이 상당해 복강경 수술이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환자였다. 사전에 들은 말도 있고 해서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당직실로 돌아왔다.

‘좋은 분이 오셨네.’

커피 맛이 달달했다.

박승준 교수를 보며 느꼈던 약간의 어색함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겪어 봐야 하는 모양이었다. 문득 하윤호 교수에게도 자신이 모르는 장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잠시 후 강병옥이 들어왔다.

김지훈에게 인사를 하고는 박승준 교수에게 노티를 했다.

“선생님, 필요한 준비 다 마쳤습니다. 마취과에 스케줄 냈고 환자 분 입원 수속도 끝났습니다.”

“특실로 잡았지?”

“예. 수술 후 바로 올라가실 수 있도록 조취 취했습니다.”

“중요한 분이니까 신경 써야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슬쩍 김지훈의 눈치를 본 강병옥이 귓속말을 했다. 약간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박승준 교수가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보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수술은 이혁원하고 같이 들어와.”

‘휴우! 다행이다. 미리 말씀도 안 드렸는데 반응이 좋으시네. 역시 VIP는 그에 맞게 대접해야 도움이 된다는 말이겠지? 하윤호 선생님이 이런 식으로 도움을 주네.’

갑자기 웬 귓속말?

의아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환자는 두 명인데 한 사람에 관한 말만 오갔다.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친분이 꽤 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조금은 눈에 거슬렸다. 다른 교수의 일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어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달달했던 커피가 왠지 씁쓸해졌다.

‘어차피 환자복을 입으면 돈이 많건 적건 똑같은데.’

강병옥의 태도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어떤 문제건 간에 교수가 바짝 신경을 쓰면 전공의는 따라갈 수밖에 없다. 박승준 교수에게 이번 환자가 예외적이길 바랐다.

“수술실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았어. 김지훈 선생에게도 연락해. 그리고 두 번째 환자는 너만 들어와. 손본지 며칠 됐는데 간만에 오늘 한 번 더 보자.”

“감사합니다. 선생님.”

역시 수술 욕심은 누구 못지않게 많았다. 그동안 신임 교수들에게 2년차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여러 번 수술을 받았지만 만족할 강병옥이 아니었다.

입이 쫙 찢어진 강병옥이 김지훈을 보았다.

“선생님, 어디 계실 겁니까?”

“나? 연구실로 연락해.”

“알겠습니다. 나가보겠습니다.”

기분이 붕 떴는지 허리까지 굽혀 인사를 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저렇게 좋을까? 나도 저 때는 그랬겠지?’

파트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동안 신경 못 쓴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승준 교수처럼 욕심이 있고 열심히 하는 전공의에게 기회를 더 주는 것도 필요한 일일지 몰랐다. 그러나 이제 2년차를 시작했다.

‘아직은 기본에 더욱 충실할 때야. 3년차를 놔두고 2년차에게 수술을 더 줄 수도 없잖아. 병옥아. 진우야. 내년에 보자. 그땐 아주 죽여 주마.’

잘났든 못났든 모두 후배들이다.

시기에 맞게 수련을 시키는 일 또한 중요하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당직실을 나오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하윤호 선생님 아닌가? 환자도 없는데 응급실에는 왜 왔지? 잘못 봤나?’

하윤호 교수가 맞는다고 해도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연구실로 올라간 김지훈이 수술 과정을 되새겼다.

말은 안 했지만 상당히 부담스러운 수술임에는 틀림없었다. 전공의가 수술한다면 책임은 무조건 교수가 져야 하지만 같은 교수이기에 책임져야 할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집도를 한 자신은 물론 박승준 교수도 무척 곤란한 처지에 빠질 수 있었다.

‘이거 은근히 부담되네.’

얼마 후 강병옥에게 연락이 왔다.

수술실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 반복해 과정을 상기하며 손까지 놀렸다. 모든 수술이 그렇지만 이번 경우는 사소한 실수마저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수술 준비가 한창이었다.

박승준 교수는 이미 수술 가운까지 입은 상태였다.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데 이혁원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혁원아,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왜 그래?”

“예? 별일 없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평소와는 달리 당황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의아한 일이었지만 수술을 앞두고 있어 꼬치꼬치 캐물을 상황도 아니었다.

힐끗 눈길만 주고는 집도의 자리에 섰다.

박승준 교수가 세컨을 자청했다.

“내가 라파로는 배운 적도, 한 적도 없어서 퍼스트는 이혁원 선생이 서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네. 그래야 김지훈 선생이 더 편하겠지?”

정말 새롭다.

윗사람이지만 다시 보게 됐다.

‘야! 보면 볼수록 대단하신 분이네.’

기분 좋게 수술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마취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예. 시작하십시오.”

오전에 복강경으로 담도 담석까지 수술한 김지훈이다. 라파로에 관해서는 치프보다 더 능숙하게 퍼스트를 서는 전공의가 바로 이혁원이다.

처컥! 처컥!

배 속에 가스가 주입되자마자 트로카를 집어넣었다.

몇 배로 확대된 맹장 뒤편에서 아뻬를 찾았다.

송진우의 얼굴처럼 잘 익었다.

기다란 막대 끝에 달린 기구들을 몇 번 움직이던 김지훈이 곧바로 기구를 바꿨다.

“클립.”

동맥과 아뻬를 은색 클립으로 잡고 잘랐다.

이것으로 수술 끝이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개복할 때보다 더 쉽게 보일 정도였다.

박승준 교수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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