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경험은 무섭다. (1)
김지훈과 이경석은 펠로우다.
‘강의도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펠로우들에게 그만한 실력이 있을까? 설혹 있다고 해도 내가 그 밑이 될 수가 없잖아. 이것도 경력이고 실적 중의 하난데 일단 말은 확실하게 하는 게 낫겠어. 이런 면에서는 하윤호도 쓸모가 있네.’
결론을 내렸다.
“지 교수. 하 교수. 함께 과장님 만나자.”
박승준 교수가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며 이혁민 교수의 진료실로 향했다. 지동훈 교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하윤호 교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성급하신 것 같은데.’
‘좋았어. 잘되면 환심을 사는 거고 이혁민 과장이 기분 나빠 해도 어차피 그 화살은 박승준이나 지동훈에게 쏠릴 테니까 내가 입을 피해는 없어. 그나저나 김지훈만 데리고 들어가면 간암이 와도 괜찮을 텐데 수술 확보가 문제네.’
신임 교수들이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 이혁민 교수가 바로 자리를 권했다.
“무슨 일로 다들 왔나?”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혁민 교수의 재촉하는 눈빛에 박승준 교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침에 말씀은 하셨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해한다. 한 달만 일찍 부임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교육 일정과 강의 부분은 내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다. 학사 일정은 대학 소관이지 임상 교수들은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잖아. 이해해 주길 바라.”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지동훈 교수가 입술을 모았다.
확실히 편법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실 강의를 누가 했는지 확인하는 사람은 없다. 대학 측에서 요구하는 대로 3시간 동안 잘 가르치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김지훈 대신 박승준 교수나 자신이 강단에 선다고 문제될 거리가 없었다.
‘다행히 다른 뜻은 없으신 것 같네.’
박승준 교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애초에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슬쩍 뒤로 물러섰다.
“저희도 잘 압니다만 펠로우들과 겹치는 일이 있으면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내가 미안하다. 펠로우 선생들을 본지 얼마 안 돼서 미덥지 못한 부분도 있을 거야. 그렇지 않나? 말 나온 김에 펠로우들에게 문제가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해 봐. 그런 건 빨리빨리 고쳐야 하지 않겠나?”
엉뚱한 말인 것 같지만 겸사겸사 펠로우들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보아왔고 아끼는 마음까지 있다면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는 허물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신임 교수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신중하게 대답해야겠지만 이때가 기회일 수도 있었다.
박승준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경석 선생 같은 경우 개인적인 불만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파트 구분 때문에 어려움이 예상되긴 합니다. 항문 쪽 수술은 미진한 부분이 많고요. 앞으로는 제가 주로 대장 파트를 맡고 이경석 선생에게 항문 파트를 담당하게 했으면 합니다.”
“박 교수가 주로 대장 파트를 맡겠다고?”
“예. 송재덕 선생님께도 상의 드려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만 아시다시피 제가 대장 항문을 모두 전공해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파트 내부의 일이다.
과장이라고 해도 이혁민 교수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송재덕 교수와 이경석이 동의한다는 전제 하에 진행돼야 할 문제였다.
“알았다. 말한 것처럼 충분히 상의를 하면서 원만하게 결정했으면 좋겠다. 지 교수는 어때?”
“저도 큰 불만은 없습니다만 신현수 선생 수술을 못 봐서 다른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내일모레 위암 수술할 때 참관부터 할 생각입니다.”
“참관을?”
“연수도 다녀왔다고 해서 어떻게 수술을 할지 궁금합니다. 배울 게 있으면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혁민 교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신중하고 생각이 깊다고 느꼈는데 그 이상일 수도 있겠네. 신임 교수들 사이에서 중심만 잘 잡아주면 우리 과에 큰 힘이 되겠어.’
마지막 한 사람만 남았다.
하윤호 교수가 두꺼운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웃었다.
“김지훈 선생이야 새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듣던 말하고 똑같더군요. 수술 잘하고, 환자 열심히 보고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열의까지 넘쳐서 더 보기 좋습니다. 다만 아직 펠로우라 그런지 미숙한 면들이 조금은 보입니다.”
“미숙한 면?”
“확실하게 이거다 하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함께 수술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마무리 맡기면서 같이 일하다 보면 차차 좋아질 것 같습니다.”
이준영 교수와 이미 나눈 말이 있다.
몇 안 되는 수술을 통해 이혁민 교수도 내심 의문을 품고 있었다. 연수를 2년이나 다녀왔고 개인 종합 병원이라고 해도 수술을 꽤 했을 텐데 문제가 보이는 사람은 도리어 하윤호 교수였다.
“수술 때 특별한 문제라도 있었나?”
‘그냥 넘어가도 되는 말을 두고 왜 자꾸 물어?’
“과장님께서 신경 쓰실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 제가 먼저 적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김지훈 선생도 노력했으면 좋겠고요.”
좋게 말하다가도 꼭 끝에 토를 달았다.
이혁민 교수가 입을 열려다 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전공의도 아니고 개인적인 면담을 통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알아가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지훈에게 문제가 있다? 희한하군. 하성원 원장님의 조카라고 했지? 인사 위원회 때 실력은 보장한다고 했는데 조금 더 두고 봐야 할까?’
“문제가 뭔지는 몰라도 서로 노력하면 잘 해결되겠지. 하 교수만 믿어.”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술이 많지 않아서 걱정이 되겠어. 간담도가 원래 그렇잖아? 자리 잡기가 가장 어려운 파트지.”
“그렇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컨설트도 이상하게 시간대가 안 맞아서 신경이 쓰이긴 합니다. 명색이 저도 교순데 김지훈 선생 욕심이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전임이 되어야 할 펠로우라서 그럴 테지만 의욕이 넘쳐 보기는 좋습니다. 사실 저도 그 입장이었으면 불안했을 겁니다. 하하하!”
전임이라는 사실에 마음 푹 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눈빛을 굳혔다.
틀린 말은 아니다.
펠로우는 신분이 불안한 시간 강사고 전임 강사는 면직이 쉽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이다. 하지만 전임이라고 해서 무조건 직위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교수로서,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그만한 실력과 능력 및 품성을 가져야 한다. 신임 교수들은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르지만 첫 대면 시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곧 나오겠지. 그런데 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하나?”
“무슨 말씀을요?”
“앞으로 연공서열에 따라 인사를 관리하는 일은 없을 거야. 수술 실력만이 아니라 여러 요소를 감안한 능력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근무 연한이 됐다고 직급이 무조건 올라가는 일은 없다. 펠로우 때 능력이 안 되면 전임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전임이든 조교수든 다 마찬가지다.”
너무도 단호한 말에 일순 침묵이 흘렀다.
실력에는 문제가 없는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도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성원 원장이 단단히 밀어준다고 해도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저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하윤호 교수가 고개를 숙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날 향해서 하는 말이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심각한 말이었다.
더구나 수술 실력이라는 말에 유달리 힘을 주었다. 솔직히 생돈을 들인 미국 연수와 하성원 원장의 힘이 아니었다면 대학 교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외과 교수들도 눈과 귀가 있다. 이 자리에서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이 뻔했다. 마침 지동훈 교수가 입을 열지 않았다면 더욱 곤란했을 것이다.
“그 말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병원을 옮기면서 일종의 대우를 받았지만 저희도 더 이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실력과 능력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뜻을 잘 이해해 줘서 고맙다. 다들 일 봐.”
진료실을 나온 신임 교수들이 제각각 고민에 잠겼다. 박승준 교수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거푸 혀를 찼다. 하윤호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개망신 당한다.’
“선생님. 말은 그럴 듯한데 뒤집어 생각하면 나중에 펠로우들이 우릴 추월할 수도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겠어?”
“신현수가 있지 않습니까? 김지훈도 이준영 선생님이 보통 아끼는 것이 아닙니다. 창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저한테는 컨설트도 안 나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올해는 그냥저냥 지나가겠지만 펠로우들이 전임이 되면 저부터 밀어낼지 모릅니다. 그 다음은요?”
묘하게 여운이 남는 말이었다.
분명 경우가 달랐지만 박승준 교수에게는 야심이 있다. 그 때문인지 하윤호 교수의 말을 지나치지 못했다. 갑자기 신현수의 존재까지 마음에 걸렸다.
든든한 발판이 될지 아니면 반대로 자신을 제칠 경쟁자가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학 재단에서 이사장의 아들이 초고속 승진을 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었다.
“지 교수. 어떻게 생각해?”
‘하윤호. 가까이 할 사람이 아니다.’
“선생님. 이제 한 달 됐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닙니다.”
“그렇지? 일단 우리 일에 최선을 다 하자. 전에도 말했지만 실적이 안 나오면 그게 발목을 잡을 거야. 하 교수, 어떻게든 수술 건수를 늘리고 주변 시선에도 신경을 써.”
박승준 교수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여러 의미가 담겼겠지만 하윤호 교수에게 우호적인 말은 아니었다. 갑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첫 번째 끈은 하성원 원장이고 두 번째 끈은 김지훈이었다. 우려 섞인 주변 시선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루 빨리 메이저 수술을 잡는 것뿐이었다. 김지훈을 퍼스트로 세운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일단 작은 아버지부터 만나자. 안 만나주면 어떻게 하지? 가끔은 귀를 막는 사람이라 불안하네. 김지훈이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하윤호 교수가 부리나케 사라졌다.
지동훈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참 묘하다.
불안해 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불안을 금치 못했다.
박승준 교수는 몇 년 뒤에나 벌어질 일을 두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동훈 교수는 그런 박승준 교수 때문이었다. 정작 실력에 대한 불안을 스스로 해소해야 할 하윤호 교수는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런 모양이다.
불안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김지훈이 강의 준비를 하다말고 담도 담석 수술 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준비를 도와주던 고경아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석사 논문 써야 하는 수술이라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내일 오후에 시간 날 때 보면 되잖아요. 꼭 집에서까지 봐야 돼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아? 마누라님, 강의 준비도 해야 하는데 좀 봐주시죠. 그런 의미에서 커피 한 잔 타주시면 안 될까요?”
눈을 흘기면서도 커피는 타 줬다.
따스한 커피 향으로 머리를 식힐 때 나종진과 송진우 그리고 이혁원도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혁원아. 이 부분에서 수처가 들어가겠지?”
“글쎄. 김지훈 선생님이 의외로 꼼꼼한 구석이 있으셔서 박리를 더 하고 진행할 수도 있어. 안전제일이잖아. 참! 진우야. 리포트 다 작성했어?”
“아직 못했습니다.”
“빨리 써. 리포트 때문에 타는 일은 면하자. 요즘 강병옥 선생 펄펄 나는데 너도 날아야지. 인마.”
나종진이 눈가를 찡그리다 말고 피식 웃었다.
“혁원아. 그래도 우리 진우만은 못하지. 하도 열심히 환자를 봐서 내가 할 일이 없어. 넌 어제도 환자 때문에 얼굴 좀 붉히지 않았어?”
“그러게 말이다. 환자를 가려서 보는 건지 어떤 환자는 죽어라고 찾고 어떤 환자는 신경도 안 써서 답답해. 박승준 선생님은 수술 잘한다고 그냥 옆에 끼고 사시고. 진우야. 사실 나는 네가 펄펄 날고 있다고 생각해. 아마 김지훈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걸?”
“당연하지. 수술 실력만 보시는 분이 아니시잖아. 아! 진우야, 네가 수술 못한다는 소리 절대 아니다. 그것 말고도 잘해야 할 것이 많다는 말이야.”
얼굴이 벌게진 송진우가 머리만 벅벅 긁었다.
툭툭 어깨를 두드리던 이혁원이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내일 하루 종일 수술 들어가야 하는데 이럴 때가 아니다. 종진아. 빨리 마무리하자. 내일 수술 준비도 해야지.”
전공의 세 명이 고개를 박은 채 내일을 준비했다.
병동 일을 마치고 이제야 차트 정리를 하러 들어온 변종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도 어째 거의 같은 시간에 일과를 마칠 분위기였다.
다음 날 오전.
신현수의 첫 위암 수술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지동훈 교수는 이미 수술실에 들어와 있었고 이혁민 교수도 얼굴을 비쳤다. 여러모로 상당한 부담을 느낄 만도 했지만 이런 일에는 강단이 있는 신현수였다.
“마취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십시오.”
약간의 긴장을 느끼며 메스를 들었다.
무영등 불빛이 환하게 수술 부위를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