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임상 교수! (2)
오프 날 저녁을 빼고는 항상 바쁜 나날이다.
신현수와의 토론에 석사 논문 준비까지 시작해 낮에는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신임 교수들 역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며 나날이 수술 건수가 쌓여갔다.
하윤호 교수만 예외였다.
가장 환자가 적은 간담도 파트의 특징이기도 했지만 지금도 내과 컨설트가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에게 집중되는 까닭이었다.
담낭 수술 후 응급으로 아뻬 몇 건 한 것이 다였다. 수술을 들어간 전공의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 수군거렸지만 교수들의 귀에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다른 선생님들에게는 컨설트가 나오는데 이상하네. 그렇다고 내 환자를 넘길 수는 없잖아. 어쨌든 아뻬할 때는 부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펠로우인 김지훈도 여전히 바쁜데 놀고 있으니 눈치가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와 말이 더 잘 통했다.
어쩐 일인지 그들도 하윤호 교수와 소원한 것처럼 보였다. 몇 건 안 되는 하윤호 교수의 수술이 끝날 때마다 더욱 그런 경향이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같은 파트이기 때문인지 은근히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싫든 좋든 그게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더욱 미안하게도 좋은 일이 이어졌다.
담도 담석 환자의 복강경 수술이 예약됐다.
신현수도 드디어 첫 위암 수술을 잡았다. 시기적으로 상당히 빨랐다. 환자에게 미국 연수라는 타이틀이 꽤나 유효한 것 같았다.
다들 자리를 잡아가는데 이경석이 다소 애매모호했다.
항문 쪽 수술을 빠짐없이 들어가 배우는 것까지는 좋았다. 대신 대장 수술이 하나둘 박승준 교수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오상익 교수의 빈자리로 왔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펠로우들 모두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월요일 아침, 커피 타임이다.
담도 담석 환자 수술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첫 케이스이자 석사 논문 대상 수술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이준영 교수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내가 준 테이프는 다 검토했지?”
“예. 선생님.”
“이 교수, 엠파이에마(담낭농증)까지 라파로로 했는데 뭘 걱정을 해? 뚝딱 끝낼 게 뻔하니까 두고 봐라. 두고 봐. 지훈아. 목요일에 하는 거 맞지? 시간되면 얼마나 잘하는지 구경해야겠다. 참! 현수, 너도 준비 확실하게 하고 있지? 언제야. 언제? 수요일인가? 맞지?”
“예. 수요일에 합니다.”
“그래. 그래. 미국 놈들한테 배운 실력이 어떤지 보자. 보자. 걔들도 수술 잘하지? 그치?”
“잘하긴 하지만 선생님들만 못합니다.”
신현수가 이제는 아부까지 한다.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단 한 사람, 하윤호 교수만을 빼고 말이다. 지금까지 정규 수술을 단 한 건도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이준영 교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준영 교수. 당신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 있어? 외래 환자도 거의 없는데 왜 조금 더 두고 보자는 말로 내과 컨설트까지 막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제때에 기회를 잡지 못하면 자칫 펠로우인 김지훈에게도 밀릴 판이었다. 지금은 초반이라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치명타로 작용할 것이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지만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았다. 신임 교수의 힘으로 인정받는 일반외과 의사이자 외과 센터 센터장까지 맡고 있는 사람을 이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수술을 해야 손이 풀리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박승준과 지동훈이 나를 도와줘야 하는데 지들 앞가림 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지? 작은 아버지에게 말하면 내과 교수들이 말을 들을까?’
박승준 교수는 이미 작은 아버지인 하성원 원장에게 두세 차례 식사 대접을 했다. 분명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데 정작 피붙이인 자신은 예외였다.
‘제길! 고민 있으면 연락하라더니 당분간 다른 사람은 되도 나는 오지 말라는 게 말이 돼. 챙겨준다고 했으면 초반에 그래야 할 거 아냐?’
하윤호 교수가 두 가지를 간과했다.
하성원 원장의 후원을 떠나 신임 교수들은 실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미 경력이 있는 교수들이기에 보다 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준영 교수는 물론 이혁민 교수의 날카로움을 무시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몇 건의 수술만으로도 실력을 파악할 수 있는 의사들이었다.
실력이야 당장 어쩌지 못하는 문제지만 아뻬 하나를 해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면을 생각하지 못하면 불만만이 남는다.
웃고 떠드는 교수들.
맞장구를 치는 신임 교수들.
내색은 안 하지만 좋아 죽는 펠로우들.
하윤호 교수에겐 정말 짜증나는 시간이었다.
커피 타임이 거의 끝날 무렵 이혁민 교수가 뜻밖의 말을 했다. 교수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만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의 눈가에 잡힌 주름을 놓치지 않았다.
좋은 기회가 온 지도 몰랐다.
대학 병원 의사는 임상 교수이기에 자존심이 달린 문제일 수도 있었다. 당장 입을 열려던 하윤호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눈빛을 굳혔다.
‘내가 먼저 나섰다가 박승준이 가만히 있으면 나만 눈 밖에 날 수 있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난 후에 나서도 늦지 않아. 지동훈도 표정이 좋지 못하네.’
신임 교수들의 눈에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김지훈과 이경석도 다소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강의를?’
“원래 홍재순 선생 강의 스케줄인데 갑자기 그만 두는 바람에 펠로우 선생들에게 강의를 배정했다. 그렇게 알고 김지훈 선생 강의는 다음 주 수요일이니까 미리 외래 진료 조정하고 준비해라.”
의외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난감한 일이었다.
박승준 교수는 부교수고 지동훈 교수는 조교수다. 대학 병원 근무 경력이 없지만 2년간의 연수를 인정받은 하윤호 교수도 전임 강사로 임명됐다.
신임 교수라고 하지만 먼저 강의를 한다는 사실이 펠로우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눈치를 읽었는지 이혁민 교수가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다.
“김지훈, 이경석, 왜 대답이 없나?”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본과 2학년 외과 총론 파트 내 급성 복증 강의다. 예전 강의 자료 참조하면 어려운 일은 없을 거야.”
외과 과장의 결정이다.
가장 신경이 쓰일 박승준 교수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불만이 있다고 해도 면전에서 바로 항의할 수는 없다. 홍재순의 강의를 대신한다는 말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내년에는 우리 신임 교수들도 강의하자. 하자. 올해는 처음 근무하는데다 작년에 이미 결정 난 사항이기 때문에 변경하기 어려운 거 잘 알잖아. 박 교수, 지 교수, 학사 일정이 그렇지? 잘 알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 위아래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니까 절대 서운해 하지 마. 우리 이 과장, 모든 일에 확실하고 철저한 사람이야. 부드러운 원칙주의자야. 원칙주의자.”
신임 교수들을 달래는 것 같으면서도 원칙이라는 말로 못을 박았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진 가운데 하루 일과가 시작됐다.
“지훈아. 축하한다. 첫 강의 잘해. 이럴 줄 알았으면 연수 가지 말 걸 그랬나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밀리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놀라게 하는 신현수였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친 것처럼 보였다.
“무슨 소리야? 넌 수준 높은 의술을 배우고 왔잖아.”
“그럼 뭐해? 써먹을 수가 없는데.”
“이제 시작했어. 급하게 생각하지 마. 이번 주 위암 수술을 시작으로 엄청 바빠질지 누가 알아?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야.”
“난 급해. 널 내 밑에 두고 싶어 죽겠는데 한참 앞에 있잖아. 내가 느긋할 수가 있겠어? 딱 일 년만 두고 본다,”
혀를 차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덥석 어깨동무를 했다.
“고맙다. 인마.”
“애들도 아니고 왜 이래? 팔 내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기분 좋은 일이다.
신임 교수들보다 먼저 강의를 하게 됐다는 어색함과 난감함마저 싹 사라졌다.
외래 진료가 끝나자마자 연구실로 달려갔다.
교수가 됐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마치 첫 수술을 앞둔 것처럼 기대 반 불안 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실제로 보여주며 할 수 있는 전공의 교육도 쉽지 않은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 마음을 모를 스승이 아니었다.
책상 위에 놓은 손때 묻은 자료를 보며 긴 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강의 자료를 건네준 스승에게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기억을 되살렸다.
이대로 강의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스승의 뜻은 그것이 아닐 것이다. 내용부터 강의 방식까지 생각하고 고민할 사안이 많았다.
‘후우! 본과 2학년이면 임상은 하나도 모를 텐데 어떤 식으로 강의를 해야 하지? 본과 2학년! 가만!’
처남인 고경철이 본과 2학년이다.
배우는 사람 역시 가르치는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 백 명에 이르는 학생들 중 한 명이지만 삐끗하면 화끈거리는 얼굴만 남을 것이다.
‘하필이면 첫 강의에 처남이 들어 오냐.’
게다가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생각만으로도 은근한 긴장이 다가왔다.
그 때 신현수와 이경석이 들어왔다.
“지훈아. 열흘이나 남았는데 벌써 준비해? 한두 번 본 질환도 아니고 다 아는 거잖아?”
“형. 이거 만만한 게 아니네요. 형도 강의할 날 가까워지면 실감할 겁니다.”
“난 한 달 후라 여유가 있지. 그런데 손에 든 건 뭐야?”
“스승··· 이준영 선생님께서 주신 겁니다.”
“이젠 스승님이라는 말이 입에 붙는 모양이네.”
말은 안 해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한때는 신현수도 이준영 교수에게 배우기 위해 기를 썼던 적이 있었다. 슬쩍 떠오른 옛 기억이 마음을 포근하게 했다.
신현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훈아. 어떤 식으로 강의할 거야? 학교 다닐 때 생각해 보면 내용만큼 중요한 문제가 강의 방식인 것 같아.”
“그렇긴 한데 양이 많아서 다른 방법이 가능할지 모르겠네. 배울 때는 3시간이 길기만 했는데 입장이 바뀌니까 도리어 짧을 수도 생각이 들어.”
외과는 3학점이다.
일주일에 3시간 강의를 하지만 메이저 과목들이 그렇듯 워낙 양이 방대했다. 줄줄 설명만 하며 주입식 교육을 해도 시간이 부족할 판이었다.
더구나 초짜 교수다.
“지훈아. 케이스 별로 각각 임상 사례를 주고 질답식으로 하는 건 어떨까?”
“프린트 물보다는 슬라이드 강의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다. 깜깜하면 조는 놈들 많아서 안 되겠다.”
“형. 방식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문제죠. 강의하는 사람이 재밌게 하지 못하면 깜깜하지 않아도 졸 놈은 다 졸지 않겠어요?”
“아무나 재밌게 강의해? 미리 연습이라도 해라. 다른 방법이 없잖아?”
연습!
할 일이 또 늘었다.
그것도 왕창 늘었다.
비록 열흘 안에 끝나는 일이지만 일복은 환자복, 수술복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신현수와의 토론과 석사 논문 준비까지 포함하면 정말 산더미나 다름이 없었다.
‘프린트 물이든 슬라이드 건 그건 또 언제 만들지?’
독수리 타법이라고 해도 이런 일들은 전공의나 인턴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남는 시간을 모두 투자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동안 오프 반납이다.
‘으윽! 담도 담석 환자 수술 준비도 해야 하잖아.’
무거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시간 신임 교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분위기가 무거웠다.
“선생님. 아무리 학사 일정이 정해져 있다지만 바꿀 수 없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과장님께 말은 해 봐야 하는 일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지 교수는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판단하기 애매모호한 문제네요. 학사 일정이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 바뀔 수는 있지만 이미 강의할 사람이 정해졌다면 중간에 바꾸는 것도 쉽지는 않지 않습니까?”
“뭐가 애매모호해? 사람이 없다면 모르지만 이제 펠로우 2년차한테 강의를 준다는 게 말이 돼? 나야 전임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선생님을 무시하는 처사지. 지 교수도 마찬가지 아니야? 기분 안 나빠?”
하윤호 교수가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그래서 하 교수 생각은 뭐야?”
“적어도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말은 해야죠. 이러다 잘못하면 내년에 선생님이 외과 총론을 강의하고 김지훈이나 이경석이 각론을 강의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내용인 총론과 구체적인 질환을 가르치는 각론 강의는 격이 다르다. 즉, 처음에는 총론을 가르치고 이후 각 파트의 주임 교수가 되면 각론을 가르친다.
만일 하윤호 교수의 말대로 되면 강의 부분에서는 신임 교수들이 펠로우보다 아래라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없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연공서열의 파괴다.
박승준 교수가 고민에 잠겼다.
이혁민 교수는 물론 기존 교수들과의 충돌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 업무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가까워져서 나쁠 일은 하나도 없다.
반면 교수들 직위가 공연히 있는 것은 아니다. 신임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면 절대 용인할 수 없었다. 펠로우들을 보는 교수들의 눈빛도 마음에 걸렸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야 하나? 이런 일이 반복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늦을지도 몰라. 제길! 펠로우들하고 좋은 관계를 만들기 직전인데 이런 일이 터지다니 난감하네.’
하윤호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민한다는 건 불만이 있단 얘기지. 이걸 기회로 삼아 일단 박승준을 잡아야 해. 그러면 지동훈도 저절로 따라올 테고 그래야 내가 움직일 공간이 생겨. 김지훈, 그 자식 눈빛도 별로 안 좋은데 이참에 펠로우들 기를 죽여 놓을 필요도 있어.’
“선생님. 일단 과장님 의중이라도 들어야 합니다. 내년에 펠로우들이 정식으로 교수가 되면 지금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박승준 교수의 입장에서는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섣불리 나설 문제가 아니었다. 신중한 지동훈 교수의 의견이 필요한 때였다.
눈길을 받은 지동훈 교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지금은 이런 일보다 수술에 집중할 때잖아. 특히 하 교수는 수술 실력에 의문이 가는 상황인데 그건 신경 안 쓰고 왜 자꾸 박승준 선생님을 자극하지?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어차피 자신의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게다가 지금은 불필요한 충돌은 피해야 할 시기였다. 박승준 교수도 이를 모르진 않을 것이라 믿었다.
“하 교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이번은 그냥 지나가셔도 되는 일입니다. 송 원장님 말씀대로 이혁민 과장님은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분으로 보입니다.”
상반된 의견에 혼란스러운지 박승준 교수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한 가지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