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44화 (644/1,329)

9화. 신임 교수들. Ⅱ (1)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장암 수술 한 건과 치질 세 건?

“형. 치질 수술을 또 같이 한다고요? 그렇게 되면 대장 항문이 한 파트로 돌아가는 거 아니에요? 원래 항문 파트 교수로 오신 거 아닌가?”

“전에 있던 병원에서는 구분을 두지 않았나 봐. 박승준 선생님 속은 정확히 모르지만 송재덕 선생님도 당분간은 이렇게 하는 것이 괜찮겠다고 하시네. 대장 쪽 수술도 잘하신다고 하니까 나쁜 일은 아니지, 뭐.”

일반적으로 체계에 사람을 맞추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체계를 바꾸는 것이 바람직한 경우도 있다. 대장 항문 파트에 인원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박승준 교수가 소문처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경석이나 환자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러네. 치질 수술 끝내주게 하시던데 대장암 수술은 어떻게 하실지 기대가 되네요. 형도 그래요?”

“왜? 또 참관하려고?”

“손이 다르면 수술도 뭔가 다르게 하잖아요. 목요일에 수술도 없는데 잘됐다.”

신현수가 묘한 콧소리를 냈다.

“지동훈 선생님도 목요일에 위암 수술 있는데 나만 아직 시작을 못하네. 펠로우하고 경력자는 환자 눈에도 다르게 보이나 봐.”

김지훈과 이경석이 동시에 웃었다.

“현수야. 너 아직 멀었다. 우리도 작년에 환자 없어서 한두 달은 발을 동동 굴렀어. 경석이 형. 생각나죠?”

“그럼. 어휴! 그때는 뭘 하고 지냈는지 몰라.”

뻥이 꽤 섞였지만 농담하고는 거리가 먼 신현수였다.

“연수 갔다 왔다고 써 붙이면 지금보다 나을까?

더욱 심각해지는 모습에 웃음소리만 커졌다.

어쨌든 신임 교수 두 명이 동시에 첫 메이저 수술을 하다니 공교로운 일이었다. 수술을 어떻게 하는지 무척 궁금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오시자마자 메이저 수술을 바로 하시네. 역시 경력이 있는 분들은 뭐가 달라도 달라. 하윤호 교수님은 어떻게 수술하실까?’

눈살 찌푸리고 웃다보니 점심시간이 끝났다.

복강경 토론을 위해 신현수와 함께 연구실로 향하던 김지훈의 눈에 식곤증을 동반한 피곤이 내려앉았다. 이 상태로 오늘 당직을 서긴 힘들 것 같았다.

‘나도 이젠 체력 생각을 해야 되겠어. 나흘 내리 당직은 확실히 무리야.’

“현수야. 미안한데 오늘 특별한 일 없으면 나랑 당직 바꾸자. 오늘은 조금 힘드네.”

“천하의 김지훈도 무리를 느끼는구나. 알았어. 대신 내일 수술도 내가 한다. 싫으면 없던 일로 하고.”

잊을 만하면 옆구리를 훅 치고 들어왔다.

그래도 기분 좋은 말이었다.

“오케이! 오는 환자 다 네 앞으로 입원시켜.”

복강경 수술에 대한 토론을 하는 내내 신현수의 열정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찜찜했던 마음까지 싹 사라졌다. 동기란 그런 존재일 것이다.

사실 신현수의 속은 까맣게 타 있었다.

간 절제, 대장 절제, 조기 위암 부분 절제에 복강경으로 시행한 담낭농증까지 김지훈이 해낸 굵직한 수술을 듣는 순간 초조함이 온몸을 휩쓸었다.

연수 기간 동안 이를 악물고 노력했는데 김지훈은 그 이상 노력했고 발전한 것이다. 체력만 따라준다면 마음 같아서는 일주일 내내 당직을 서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 내겐 무엇보다도 실전이 필요해.’

하! 하! 하!

휴식이 목적이었는데 왜 바꿨을까?

‘현수 일복이 이렇게 없었나?’

예외일 정도로 평화로웠던 화요일 밤이었다.

보상이라도 하듯 수요일 밤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한가하나 바쁘나 평생 보는 환자 수는 다 똑같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맞는다면 나이 마흔도 되기 전에 파리만 날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나마 수술이라도 했으면.

아니, 퍼스트라도.

집도보다 더 힘든 일이 한밤중에 참관을 하는 것이다.

퍼스트나 집도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이혁원과 나종진의 살벌한 눈빛에 수술 가운은 입어 보지 못했다. 모른 척하면 빨간 띠라도 두를 태세였다.

결국 아뻬 한 건, 복막염 한 건, 혈복막 한 건을 후배들에게 모두 빼앗겼다. 집도는 신현수가 해 퍼스트를 설 뿐인데도 좋아 죽었다.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데 입은 썼다.

응급실부터 회복실까지 내내 일 년차 옆에 붙어 최선을 다해 가르치는 송진우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즐거운 광경이었다.

즐거운 일이 더 있긴 했다.

혈복막 수술을 하는 신현수의 손을 보는 설렘에 간만에 각 잡고 이혁원, 나종진, 송진우를 활활 태우는 즐거움까지 겹쳤다.

눈물 좀 흘렸을 것이다.

신현수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내 수술 다 뺏고서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당직 바꾸자고 한 건 너야.”

피로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세 건이나 수술했으니 좋아하지 않으면 인생 최대의 라이벌 신현수가 아닐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현수야. 이틀 연속 당직 섰구나? 수술 많이 했네. 많이. 지훈아. 니 일복이 현수한테 간 모양이다. 당직도 안 서고 편했겠다. 그치? 아니니? 아니야? 그런데 얼굴이 왜 당직을 선 것 같니?”

웃고 있는 송재덕 교수가 왠지 얄밉다.

“수고했어. 잘했다.”

마치 전후 사정을 다 안다는 듯 툭 어깨를 두드리는 스승의 말에 스르륵 피곤이 풀렸다. 어떻게 하면 스승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회진을 끝낸 후 중환자실로 향했다.

하윤호 교수의 환자라고 해도 수술을 한 이상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다행히 어젯밤을 기점으로 의식을 찾으면서 빠른 회복을 보이고 있었다.

김지훈을 본 보호자가 살짝 고개만 숙였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왠지 서운한 느낌이 들었지만 보호자와의 접촉은 응급실이 마지막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종진아. 보호자는 별말 없어?”

“예. 진우가 킵을 한데다 하윤호 선생님도 회진 때마다 자세하게 설명을 하셔서 문제없었습니다.”

“진우 저 자식도 일이 줄줄줄 따라붙네. 병실로 올리라는 말씀은 없었어?”

‘그게 누구 때문인지 모르세요?’

“워낙 손상이 심했다고 이번 주까지는 중환자실에서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심리적으로 힘들 텐데.”

어쨌든 하윤호 교수의 환자다. 왈가왈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충분한 신뢰를 받고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다.

이제 지난밤의 피로를 뒤로 하고 눈을 부릅떠야 할 시간이었다.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의 수술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이상하게 설레는 마음으로 수술실을 기웃거렸다.

박승준 교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들어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김지훈 선생. 여긴 왜 들어왔어?”

“참관하고 싶어 들어왔습니다.”

“치질 때도 그러더니 내 수술은 다 참관할 셈이야?”

“시간이 되면 그럴 생각인데 안 될까요?”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걸렸다.

‘이경석이나 김지훈이나 괜찮네. 무난하겠어.’

“안 될 건 없어. 기회가 될 때 배우는 것이 좋겠지. 김지훈 선생. 마음에 든다.”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서로가 가까워지면 서먹함이나 어색함은 곧 사라질 것이다.

수술실 두 곳에서 동시에 마취과의 수술이 시작됐다.

약간의 차이를 두고 박승준 교수가 먼저 개복을 했다.

병변을 확인하고 바로 임파선 절제를 시작했다.

상당한 경험이 있는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손이 빠른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대장을 자르시네. 치질 수술도 그렇더니 참 간결하게 수술하시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대장암 수술은 처음 같이 하는 이경석도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집도의의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치질 수술 때와는 달리 거의 말이 없었다.

아마도 첫 메이저 수술이기에 그럴 것이라 여겼다.

어느새 잘렸던 대장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봉합할 때도 마찬가지로 간결하네.’

같은 수술을 두고 집도의에 따라 받는 느낌이 이렇게 다르다니 새삼 희한한 일이었다.

문득 지동훈 교수의 수술도 궁금해졌다.

조용히 옆 수술실로 건너갔다.

1년차가 부족한 탓인지 강병옥이 세컨을 서고 있었고 신현수는 참관을 하고 있었다.

‘어때?’

‘수술 정말 잘하시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발판에 올라선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박리된 부분들이 상당히 깔끔하게 보였다.

힐끗 눈길을 준 지동훈 교수가 의외라는 눈빛을 보이다 이내 위와 소장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위장관 파트 의사들의 특징인가?

정확하고 꼼꼼했다.

이혁민 교수의 손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신중한 손길을 따라 새로운 통로가 완성돼갔다.

“박순용 선생, 그동안 열심히 한 모양이야. 수술하기 아주 편해. 앞으로도 많이 도와줘.”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격려와 부탁을 아끼지 않았다.

겸손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어느새 마무리 과정만 남았다.

“박순용 선생, 마무리하고 강병옥 선생에게 수처 줘 봐. 우리 이삼 년차들 손 좀 보자.”

첫 메이저 수술의 마무리를 전공의들에게 맡기다니 역시 펠로우들과는 달랐다. 어느 정도 경험을 축적한 외과 의사의 여유가 엿보였다.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전공의들이다.

순조롭게 피부 봉합까지 끝났다.

고개를 끄덕이며 지켜보던 지동훈 교수가 그제야 김지훈에게 시선을 주었다.

“김지훈 선생, 어땠어?”

항상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다.

“예? 우리 전공의 선생······.”

“아니. 내 손 말이야.”

상대가 전공의라면 모를까 윗사람이라고 해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뜻밖의 말에 얼굴만 붉히자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열정을 가진 의사들과 한솥밥을 먹는 것도 큰 행운이지. 은근히 흥분되는 걸.’

“김지훈 선생하고 신현수 선생 소문 다 들었어. 우리도 열심히 할 테니까 어떤 일이든 힘 합쳐서 잘해보자.”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참관을 들어왔다 의외의 소득까지 얻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사람이야말로 인정받을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는다. 섣부른 판단일지 몰라도 지동훈 교수는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힐끗 눈길을 준 지동훈 교수가 휴게실에서 박승준 교수를 만났다. 한동안 대화를 나눈 후 회복실에 들렸다. 오더를 내고 있는 강병옥을 보더니 어깨를 툭 쳤다.

“강병옥, 다음에 박승준 선생님이나 내 앞으로 아뻬라도 뜨면 치프에게 말하고 들어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해.”

‘박승준 선생님과 아버님이 서로 잘 아신다고? 일하는 걸 보니까 싹은 있어 보이지만 실력이 없으면 특별한 대우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내가 박승준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과 이 문제는 달라.’

지동훈 교수가 나가자마자 강병옥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지난 1년간 열심히 해왔고 2년차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김지훈은 칭찬은커녕 좀처럼 인정한다는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특히 이사장의 아들인 신현수와의 친분도 상당히 강해 보여 더욱 초조하던 참이었다.

세상은 정말 좁았다.

뜻밖에도 박승준 교수와 아버지의 친분이 상당히 두터웠다. 신임 교수들이 오며 변호사인 아버지와 산부인과 의사인 어머니 덕을 볼 기회가 온 것이다.

‘남들 눈에는 행운으로 보이겠지만 이것도 실력의 일부분이야. 실력이 없다면 모를까 아버지의 부탁 한 마디가 문제 될 것도 없잖아.’

지동훈 교수의 말은 단비와 같았다.

불과 이삼 일 전에 친분 관계를 알았지만 아무 반응도 없어 슬슬 조바심까지 나던 차였다. 확실하게 실력을 보인다면 출세의 지름길을 발견한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흔히 말하는 빽을 든든하게 얻는 것이다.

한참 생각에 잠겼을 때 익숙한 얼굴이 휙 지나갔다.

잠시 후 김지훈과 송진우가 수술 방을 나갔다.

신현수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강병옥이 눈가를 찌푸렸다.

경쟁할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송진우만 보면 이유 모를 짜증이 났다. 송진우를 보는 김지훈의 눈빛 때문인지 아니면 언제부턴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자식이 내 말을 잘 들어야 수술에만 집중할 수 있는데 말은 안 듣고 정말 신경 쓰이네. 환자 몇 명 봐 달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겠지.”

다음 환자가 내려왔다.

회복실에 위암 수술을 받은 환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곧 병실로 올라가겠지만 환자의 불안을 덜어줄 말 마지막 몇 마디를 아직도 빼먹고 있었다.

응급실이다.

오후 일과 중 급성 담낭염 환자가 내원했다.

고열과 심한 우상복부 동통으로 복막염에 준할 정도로 증세가 심했다. 이미 수술에 필요한 검사는 물론 보호자의 동의서까지 받은 상태였다.

김지훈이 살짝 콧등을 찡그렸다.

“나한테 연락하라고 하셨다고?”

“예. 환자 확인하시고 수술 준비하라고······.”

나종진이 말꼬리를 흐렸다.

“보호자에게 설명은?”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수술 팀은?”

“선생님과 저하고 진우까지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김지훈이 얼굴을 펴지 못했다.

좋은 게 좋다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한동안 응급 환자를 같이 보기로 했고 펠로우가 아래 사람이긴 하지만 이런 식의 일처리는 예의가 아니었다.

사흘 전의 일로 느낀 찜찜함도 완전히 가신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일과 중에 온 환자라 직접 연락하는 것이 힘든 일도 아니고 말이다.

‘이건 아니라고 말을 해 볼까? 아니야. 이제 두 번째 수술인데 성급할 수도 있어.’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지켜본 신현수도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 방이 나왔다.

환자는 이미 옮겨진 상황인데 하윤호 교수는 보이지 않았다. 마취가 시작되고 수술 준비가 거의 다 끝날 무렵에야 손을 씻고 들어와 집도의 자리에 섰다.

“김지훈 선생, 준비 다 됐지? 수고했어.”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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