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노력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1)
신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너 라파로 수술 자료들 많이 갖고 왔다고 했지? 그거 나한테 100% 가르쳐 주면 다 들어줄게. 만일 하나라도 숨기면 친구고 뭐고 혈관부터 막아 버린다. 내가 혈관 수술 좀 받는 건 알지? 그거 굉장한 일이야. 신기동 선생님이 어떤 양반인데 수술을 주시겠어?”
긴장을 감춘 펠로우 2년차의 거만이다.
살짝 긴장했던 신현수가 웃고 말았다.
연수 기간 동안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혼자서는 앞선 의료를 쫓아가기도 벅찰 것이다. 수술만 부탁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너 일복 터졌다며 안 힘들겠어?”
“신현수가 하는데 내가 못하겠어? 체력과 열정하면 누구? 바로 나다. 그런 걱정은 하질 마.”
“오케이! 그럼 약속한 거다.”
너무 흔쾌한 대답에 김지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정말 긴장해야겠네.’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진료 시간이 임박했다. 힐끗 시계를 본 김지훈이 말도 없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멍하니 서있던 신현수도 간만에 숨이 턱 밑에 차도록 서둘렀다.
아직 적응 될 때가 아니었다.
“너 여기는 왜 와? 설마 첫날인데 외래 환자가 있어?”
외래로 향하다 말고 화들짝 놀란 신현수가 수술 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두 눈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수술을 함께 하자는 말이지? 야! 현수 덕에 정말 재밌어지겠는데.’
기분이 산과 골을 넘나들었다.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잔뜩 걸렸다.
월요일답게 바쁜 일상이 이어졌다.
신임 교수들이 병동, 응급실과 수술 방을 찾아 인사를 하고 전공의들과도 시간을 가졌다. 서먹한 분위기가 없지 않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찜찜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대신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 툭하면 따라 붙었다.
신현수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이경석까지 셋이 마주 보며 점심 식사를 했다. 함께 인턴을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모두 교수라니 묘한 느낌이었다. 신기동 교수의 수술을 들어갔을 때는 수술 내내 날카로운 눈길이 뒤통수에 꽂혔다.
‘어디 한군데 뚫어지겠네. 현수 앞에서 타는 거 아냐? 기껏 수술 좀 받는다고 했는데 이러다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라이벌이 보고 있기 때문일까?
마치 시험을 보는 것 같아 어느 때보다도 긴장하고 말았다. 정말 손끝 하나하나에 모든 정성을 실었다. 그 때문인지 다행히 비수는 날지 않았다.
김지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신현수는 놀란 눈치와 함께 의외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일 까다로운 신기동 선생님과 호흡이 정말 잘 맞네. 수술을 주실 수밖에 없네. 나도 빨리 감각을 되찾아야 하는데 바짝 긴장해야겠다.’
바쁘면서도 즐겁고 한편으로는 긴장되는 하루였다.
일과가 끝날 때쯤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
추측이 난무하던 당직 스케줄이 확실하게 결정됐다. 그 덕에 어떤 날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당직에 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임 교수들도 당직을 서기 때문에 당직 날이 대폭 준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이 6일마다 하루로 바뀌었다.
6일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당직은 놀라운 여유를 선사했다. 다음 주 화요일에야 다시 당직을 선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였다.
카르페 디엠!
‘저녁마다 뭐하지? 이젠 낮에도 시간을 뺄 수 있으니까 라파로 공부는 그때하고 앞으로는 경아 씨한테 확실하게 충성하자. 이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전해야 하는데 이럴 때가 아니지.’
퇴근하기 전 수술 방에 들렀다.
명목은 마취과 펠로우로 근무하게 된 윤서연을 축하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고경아가 목적이었다. 마침 신현수도 와 있었다.
“윤 교수. 축하해. 응급 수술 뜨면 잘 부탁한다. 난 스케줄 잘 받아주는 사람이 제일 좋더라.”
윤서연도 변함이 없었다.
굳이 변화를 찾는다면 머리 스타일이 조금 더 세련되게 보이긴 했다. 그러나 수술 모자는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는다. 어차피 눌리긴 마찬가지다.
혼자 실없이 웃으며 한동안 대화를 나누다 은근슬쩍 빠져나와 고경아를 찾았다. 당직 변동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럼 오늘만 고생하면 다음 주 월요일까지 당직이 없다는 말이죠? 이번 주말에 우리 뭐할까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
“경아 씨. 주중 당직만 생각했네요. 이번 주에 주말 당직을 서야 돼요. 하지만 앞으로 5주가 지나야 주말 당직이네요. 하하하!”
당직이 줄면 수술 건수도 줄 것이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좋은 일은 즐겨야 한다.
이번에도 카르페 디엠!
기쁨에 못 이겨 하이파이브를 하는 순간 누군가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대장 파트를 맡게 된 이혁원이었다.
“선생님. 어?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까요?”
하필이면 고경아와 두 손을 딱 잡고 있을 때였다.
어째 너무 가까이 선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야? 응급실에 환자 있어?”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럴 때는 도리어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게다가 응급실이라는 소리가 입에 착착 감겼다. 이렇게 부담이 없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예. 아뻬 의심되는 환자가 있습니다.”
“그래? 가자. 참! 신현수 선생한테도 연락해야 한다.”
“선생님과 이경석 선생님 당직이실 때 응급실에 환자 오면 바로 알려달라고 하셔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신현수가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고경아와 사랑의 눈인사를 나누고 응급실로 내려갔다.
한 가지 욕심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현수도 왔는데 라파로로 할 수 없을까?’
환자 한 명을 두고 의사들이 바글거렸다.
바짝 긴장한 신임 1년차, 후배 앞에서도 얼굴이 벌게진 채 뭔가 가르치고 있는 송진우, 팔짱을 끼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는 이혁원 그리고 최종 노티를 기다리는 김지훈과 신현수.
근 30분이 지나서야 마지막 노티를 받았다.
또 다시 시작된 백일 당직의 여파였다.
어쨌든 이 많은 의사가 동일한 진단을 내렸으니 아뻬가 아닐 수가 없었다.
김지훈은 한결같았다.
신중하게 진찰을 하고 질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후 수술을 권유했다.
“환자 분. 맹장염이 확실합니다. 동의하시면 준비되는 대로 수술하겠습니다. 단 수술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개복하거나 복강경으로 할 수 있습니다.”
“복강경이요? 그 방법이 더 유리한가요?”
보호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김지훈이 갑자기 입을 닫았다. 신현수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복강경에 대한 열망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런데 유리하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 젊고 마른 환자였다.
개복을 한다고 해도 3센티미터면 충분했다. 전신 상태가 양호하기 때문에 회복도 빠를 것이다. 통증 역시 복강경보다는 조금 더 심한 정도에 불과했다.
‘정말 유리한가?’
문득 새로운 수술 법이라는 사실만으로 무작정 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 비용, 통증 정도, 회복 시간, 수술 후 흉터 등등 고려해야 할 많은 점들이 객관적으로 검증이 된 것인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현수는 어떤 판단을 할까?’
이제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아뻬를 두고 정말 고민할 일이 끊이질 않았다.
논문이라고 해서 주관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때론 결론에 맞춰 자료를 준비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기존의 지식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눈가를 찌푸리던 김지훈이 솔직하게 장단점을 말했다.
한 번 떠오른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설명하는 도중에도 과연 눈앞의 환자에게 얼마나 득이 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의사의 불확실함 때문일까?
보호자와 환자의 선택은 개복이었다.
곧 수술 준비가 시작됐다.
함께 수술 방으로 향하던 신현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훈아. 무엇 때문에 설명하다 말고 주저한 거야?”
“현수야. 지금 이 환자 같은 경우에 라파로가 정말 유리할까? 효과는 비슷한데 괜히 돈만 더 내는 거 아닐까?”
신현수가 눈가를 좁혔다.
“아뻬라고 해도 개복보다는 라파로가 여러 면에서 유리하지 않겠어? 통증이 확실히 적고 미용적인 측면에서도 환자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은 너도 잘 알잖아.”
“그렇긴 한데.”
지금도 고민스러운지 김지훈이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미국하고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거야. 거긴 기본적으로 체격이 있는데다 고도 비만인 사람들까지 워낙 많거든. 어쨌든 개복하기로 했으니까 고민은 나중에 해. 오늘 어떻게 할 거야?”
아! 잊고 있었다.
신현수의 손을 보는 것과 동시에 전공의들을 교육 시킬 좋은 기회기도 했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퍼스트 서. 다음 수술은 상황 봐가면서 결정하자. 손 빨리 풀고 약속이나 잊지 마.”
“오케이!”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였다.
순간 사라졌던 긴장이 다시 느껴졌다.
아뻬 하나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연수 때 수술을 많이 못해보았다지만 어디까지나 신현수의 본인의 말이었다. 연수라는 것이 대개는 그렇다고 하지만 세상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엄살일지도 몰랐다.
그 때 약간은 풀 죽은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그러면 수술 팀은 어떻게 짤까요?”
“응? 혁원아, 너 3년찬데 세컨 설 수는 없잖아. 진우하고 종수 들어오라고 해.”
이혁원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3년차 첫날인데.
수술실이다.
송진우와 신임 1년차인 변종수가 부지런히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우야. 변종수. 오늘 퍼스트는 신현수 선생이 설 거야. 아뻬라고 해도 의사마다 하는 방식이 미묘하게 다르니까 수술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봐. 이런 기회 흔치 않다.”
‘현수도 있는데 아뻬라고 방심하지 말고 확실하게 하자.’
김지훈이 간만에 손까지 움직여 가며 수술에 대비했다.
곧 손을 씻고 들어온 신현수가 간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수술 가운을 입었다.
파란 수술 모자와 옅은 하늘색 수술용 마스크.
그 사이로 보이는 금테 안경.
푸른 수술복을 가린 하얀 수술용 덧 가운.
한 명의 써전이 눈앞에 서있었다.
순간 무의식처럼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최고의 써전이 되는 길!
동료들과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
‘현수. 경석이 형. 이제 셋이 모였네. 일석이까지 오면 내가 원했던 팀이 완성되는 건가?’
숱하게 해온 아뻬가 오늘은 정말 여러모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었다.
수술 팀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 섰다.
메스를 든 김지훈이 퍼스트 자리에 선 신현수를 보며 훅 숨을 내뱉었다. 신현수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지 눈가가 살짝 떨렸다. 펠로우 두 명의 흥분과 설렘이 뜨거운 숨결을 따라 수술실로 퍼졌다.
“마취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불과 3센티미터 정도 열었다.
아무리 말랐다고 해도 절개 창이 너무 작아 시야가 좋을 수 없다. 그런데 김지훈은 물론 신현수도 거침이 없었다.
슥슥 배를 여는가 싶더니 어느 새 아뻬가 배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환히 드러난 동맥이 묶이고 아뻬가 잘렸다. 좁은 절개 창 사이로 무영등 초점을 잡으며 배 속을 확인한 뒤 복벽을 닫기 시작했다.
“컷!”
복부 봉합까지 모두 끝났다.
송진우가 멍한 눈으로 김지훈과 신현수를 번갈아 보았다. 변종수는 눈만 껌뻑거렸다.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자연스럽게 진행된다고 느꼈을 뿐인데 불과 15분 만에 수술이 모두 끝난 것이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속도였다.
수많은 경험과 정확한 지식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신현수야. 너랑 손 제대로 맞추면서 경험만 쌓으면 어려운 수술이 없겠다. 근데 아무리 아뻬라지만 첫 수술부터 호흡이 너무 잘 맞네.’
희한한 일이었다.
‘말은 들었지만 지훈이 너 정말 수술 많이 했구나. 아뻬는 교수님들도 너보다 잘할 수는 없겠다. 다른 수술도 이렇게 할까? 그렇겠지? 정말 긴장해야겠어.’
“으으으!”
이제야 환자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 때 이혁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다말고 멈칫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