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새로운 출발. (2)
드디어 3월 첫 주가 시작됐다.
이제 펠로우 2년차다.
넓게 보면 변하는 일상은 거의 없지만 새로운 출발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신임 1년차.
신임 교수들.
년차가 하나 씩 오른 전공의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신현수.
두 번째 해를 맞이하는 펠로우들까지.
그 중에서도 김지훈이 가장 큰 변화를 맞이했다.
‘어후! 30분만 더 자면 좋겠다. 1년 동안 이 생활을 했는데도 적응이 안 되네. 아침형 인간이 되기는 글렀어. 으흐흐! 그래도 오늘로 끝이다!’
아침 일찍 응급실로 나가 피곤한 눈을 비비며 신현수에게 인수인계를 했다. 송재덕 교수에게 노티하는 일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아! 아니다.
새로운 외과 센터 센터장인 이준영 교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노티하는 날이다.
아침마다 스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신현수가 있고 아침 단잠의 유혹은 너무도 강렬했다.
응급실 문이 열렸다.
거구에 항상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하는 이준영 교수가 들어섰다. 그런데 그 뒤에 동네 아저씨 같은 양반이 보였다.
“지훈아. 놀랐니? 내가 와서 놀랐구나. 현수야. 이제 시차 적응은 다 됐지? 원래 아침에는 다들 졸리기 마련이다. 일단 노티부터 받자. 노티부터.”
약간은 의아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시범을 보였다.
근무 초반부터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신현수가 바짝 귀를 들이댔다. 보고가 끝나자 이준영 교수는 고개만 끄덕였고 말은 역시 송재덕 교수 차지였다.
“내일은 현수가 하겠구나. 현수가.”
“예. 선생님.”
“그럼 모레는 누가 하니? 누가?”
홀가분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꿀꺽 침을 삼켰다.
“앞으로는 현수가 하기로······.”
“지훈이 너도 펠로우잖아. 펠로우 맞지? 펠로우 1년이 아니라 2년이잖아.”
“예. 그렇긴 한데 응급실 보고는 그동안·······.”
말이 또 잘렸다.
“나도 매일 나올 거야. 하나보다는 둘이 낫잖아. 둘이. 이 교수도 처음이라서 올해가 무척 중요하다. 올해가. 그러면 너희들도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니? 생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말이 안 나온다.
30분 정도 일찍 일어나는 것이 뭐가 힘드냐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새벽 단잠은 단순한 30분이 아니다. 게다가 올해라고 했다.
1년 내내 함께 노티하라는 말이었다.
슬그머니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날 왜 봐?
무표정한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김지훈이 이를 악물며 물었다.
“선생님. 그러면 저희들이 번갈아 가면서 노티하면 되는 겁니까?”
“역시 지훈이가 생각이 깊어. 생각이. 번갈아 가면서 매일매일 얼굴 보면 된다. 그러면 돼. 교수 둘에 펠로우 둘. 좋다. 좋아. 그런데 지훈아, 너 왜 턱 옆에 근육이 잡히니.”
할 말을 완전히 잃었다.
번갈아가 아니라 매일 새벽 출근이다.
일복은 쭉 이어지고 있었다.
왠지 눈물이 나려고 해 고개를 돌려야 했다.
커피 타임이다.
신임 교수까지 모두 열 명이라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신현수와 사이좋게 다섯 잔씩 타고 구석에 앉아 홀짝홀짝 커피를 마셨다.
주로 당부의 말이 이어졌다.
“한동안은 외래 환자나 수술 문제가 얽힐 수가 있다. 아직은 서먹할 테지만 상의 잘해서 원만하게 해결하자. 그리고 당직 때 우리 신임 교수들 불편하지 않도록 펠로우들이 신경 써라.”
신임 교수는 교수들대로 펠로우는 펠로우대로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곧 회진을 위해 병동으로 올라갔다. 앞서가던 하윤호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오늘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감사한 일이었다.
“김지훈 선생. 저번에 봤을 때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수술이나 재진 환자는 어쩔 수 없지만 외래 신환은 당분간 나눠 보자. 양해해 줘.”
이미 이혁민 교수에게 언질을 받은 사항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시원해서 좋네.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리 들었어. 난 선배 후배 가리지 않고 배울 건 배우는 사람이니까 잘 부탁해. 올라가서 회진 돌아.”
마음가짐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말 반가운 소리였다.
“선생님은 안 올라가십니까?”
“환자도 없는데 뭐 하러 올라가? 수고해.”
전공의와 간호사에게 인사를 했으면 했지만 첫날이니 챙겨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신임 교수들끼리 따로 모이는 모습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 보자.’
박승준 교수가 있는 외래 문을 열던 하윤호 교수가 머리를 톡톡 치며 돌아섰다.
“아! 내가 당직 서는 날 환자 오면 분위기도 익힐 겸 함께 봤으면 좋겠는데 괜찮지? 한동안은 그렇게 하자.”
한동안 응급실 환자를 함께?
적응 기간을 생각하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동으로 향하던 김지훈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왠지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보다 경험이 훨씬 많을 텐데 응급실 환자를 꼭 같이 봐야 하나? 어? 일복이 있으신 분이면 당직이 사흘마다?’
순간 등짝이 서늘해졌지만 회진부터 돌아야 한다.
김지훈이 어깨를 흔들며 부리나케 병동으로 향했다.
그 시간 박승준 교수가 눈가를 좁힌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동훈 교수와 하윤호 교수는 조용히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하윤호만 잘해주면 어렵지 않겠어.’
“지 교수. 하 교수. 우리가 확실하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실력을 증명해야 돼. 송재덕 선생님은 병원 일로 바쁘실 테니까 내가 움직일 공간은 많아. 하지만 이준영 선생님과 이혁민 선생님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 학회에서 인정할 정도로 실력이 대단한 분들이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야. 하 교수. 어때?”
하윤호 교수가 걱정이라는 기색이 엿보였다.
지동훈 교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랜 세월 함께 했고 누구보다도 실력을 잘 알기에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석에서 형님이라고까지 불러 줬는데 첫날부터 저 눈빛은 뭐야?’
“이준영 선생님에 대한 말은 저도 들었습니다. 열심히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습니까?”
“김지훈은 어떤 것 같아? 실력이 상당하다고 들었어. 이미 간 절제까지 집도했다고 하던데 알고 있어?”
하윤호 교수가 입을 삐죽거렸다.
“저도 들었습니다. 빠릿빠릿해 보이는 게 일은 잘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야 펠로우 아닙니까? 혼자 한 수술도 아니라고 하고요. 간 절제가 펠로우 혼자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수술이 아니지 않습니까? 라파로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고 들어서 그게 조금 신경 쓰이는 정도입니다.”
박승준 교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간담도는 라파로가 추세니까 그럴 수 있겠어.”
“그래도 라파로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준영 선생님과 잘 상의해서 메이저 위주로 가 볼 생각입니다.”
“쉽지 않을 텐데. 어쨌든 최선을 다 하자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가 믿을 건 실력, 즉 실적뿐이야. 일단 실적을 올려야 하성원 원장님도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도와주실 수 있을 거야.”
지동훈 교수의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뭔가 의아해 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박승준 교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지는지 깍지를 낀 채 입술을 오므렸다.
‘분위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라. 이경석! 펠로우지만 나이가 많아서 다루기 쉽지 않겠어. 대장은 내가 맡고 항문은 이경석이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데 어떻게 해야 하지? 신현수는 동훈이가 잘 제어하겠지만 역시 하윤호가 문제야.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2년 연수를 하고 개인 병원 과장이라! 느낌이 안 좋아.’
제법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첫 날부터 고민스러운 문제에 직면했다.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교수들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지만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펠로우부터 확실하게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실력을 보이면 된다. 펠로우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병원 한 곳에 국한된 일이다. 다들 어렵다고 하는 수술 한 건만 해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 하성원 원장의 위세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인간적으로 대해주면 이경석은 몰라도 김지훈이나 신현수는 쉽게 경계를 허물 것이다.
‘라파로! 이준영 교수! 역시 하윤호가 불안하지만 급하게 생각할 것 없어. 모든 사람과 친해질 수도 없고 어차피 과장 자리는 아무리 빨라도 삼사 년 후에나 기회가 올 거야. 차근차근 기반을 만들어 가면 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하윤호 교수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박승준 교수가 손을 흔들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하 교수. 하성원 원장님께 인사드릴 거니까 연락 좀 해. 그 다음에 병원 한 바퀴 돌자. 첫날인데 안면은 터야지.”
신임 교수들의 얼굴에 약간의 긴장이 감돌았다.
누구보다도 가장 큰 변화에 직면한 사람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병동이 다소 어수선했다.
아직은 적응이 안 된 신임 1년차들과 새로운 파트 구성에 신현수의 첫 출근까지 맞물린 탓이었다. 신임 교수들 파트를 맡게 된 3년차들도 어떻게 일을 해야 할 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변화의 폭이 작년보다 클 뿐 해마다 벌어지는 일이었다. 반가운 인사가 오간 후 이내 각자 자신의 일을 찾아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준영 교수의 회진이 끝나자마자 김지훈이 힐끗 송진우를 보았다.
‘치프가 스승님 환자를 보고 종진이가 하윤호 선생님 환자를 맡으면 진우가 내 파트네. 교수님들은 늘었는데 1년차는 도리어 줄었으니까 당직 때 말고는 얼굴 보기도 힘들겠다.’
올해도 2년차가 담당이다. 신임 교수들까지 있는 마당에 펠로우가 3년차와 환자를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전공의들끼리 말이 오갔는지 송진우가 후다닥 달려와 옆에 섰다.
“진우야. 열심히 해 보자.”
“예.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거벼운 흥분을 느끼는지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준영 선생님 파트하고 내 파트 환자는 당연한 일이고 신기동 선생님 환자도 파악했지?”
“예. 선생님.”
때마침 신기동 교수가 회진을 올라왔다.
“송진우. 네가 내 파트 맡았어?”
원래 치프가 파트를 담당해야 했지만 그런 문제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제는 김지훈 옆에 있는 전공의를 당연히 자신의 파트 전공의로 여겼다.
“예. 선생님.”
“확실하게 하자. 2년차다.”
첫날이라고 부드러울 신기동 교수가 아니었다.
역시 냉랭하게 들리는 말투였다. 김지훈도 가끔은 서늘한데 송진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굴이 조금 더 붉게 변했다.
김지훈이 옆구리를 툭 치며 속삭였다.
“진우야. 너 2년차야.”
2년차라는 말에 담긴 두 가지 의미를 곱씹는지 송진우가 입을 꾹 다문 채 눈가에 힘을 주었다.
‘어쭈! 2년차라고 눈에 힘까지 주네.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송진우. 파이팅하자.’
차트가 휙휙 넘어갔다.
송진우가 최선을 다해 신기동 교수의 물음에 대답했지만 분위기가 삽시간에 돌변했다. 이혁원도 넘지 못한 신기동 교수와 김지훈이다. 찌릿하면서 서늘한 비수와 이글거리는 눈빛이 송진우의 눈앞을 뱅뱅 감돌았다.
“쯧!”
‘회진 돌아야지 뭐해? 빨리 앞장 서.’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송진우가 막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신현수가 급히 달려왔다. 신기동 교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저도 앞으로 선생님 파트를 돌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이혁민 선생님께는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잠시 눈가를 좁히던 신기동 교수가 고개를 딱 한 번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신현수. 마음에 든다.”
“감사합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가장 인원이 적었던 파트가 졸지에 세 명으로 늘었다.
그것도 펠로우가 두 명이다.
신기동 교수의 입가에 남모를 웃음꽃이 피었고 신현수의 얼굴은 상당히 진지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얼떨떨해 하던 김지훈이 회진을 마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현수야. 위장관하고 혈관을 동시에 돌겠다 이거야?”
“넌 작년에 세 파트 돌았다며. 올해는 내가 그래야 할 것 같아. 연수할 때 기초가 더 단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이라니?”
“응급실에 수술 환자 뜨면 나도 같이 들어가자. 내 환자가 생기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정규 수술 참관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경석이 형은 이미 오케이 했다.”
연이어 옆구리를 훅 치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내가 당직일 때 불러 달라 이 말이지?”
“그래. 네가 집도의니까 참관도 좋고 퍼스트를 세워도 좋아. 전공의한테는 미안하지만 수술을 주면 제일 좋고.”
“내 수술을 참관 한다고? 너 진심이야?”
“진심이지. 절대 농담 아니다.”
‘자존심하면 신현수였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서 왔네.’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정도가 아니었다.
단번에 상대방을 KO 시킬 수 있는 어퍼컷에 이은 강력한 스트레이트였다. 사뭇 진지한 모습에 머리가 멍할 지경이었다. 목덜미에서 시작된 서늘한 기운이 발끝까지 전해졌다. 급기야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긴장 백배다.
입술에 침을 묻히며 신현수를 보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을 번쩍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펠로우 2년차다. 당황스럽다고 해도 필요한 머리는 돌아간다.
신현수만 변한 것도 아니었다.
“현수야. 부탁을 들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약간은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술 사라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지?’
“뭘 해주면 될까?”
“미국 물 먹은 놈이 give and take에 놀라기는. 아! 오늘 영어 좀 되네. 긴장할 정도의 부탁은 아니다.”
김지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