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36화 (636/1,329)

5화. 새로운 출발. (1)

외래 진료실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퇴근을 하지 않았다면 교수들은 당연히 이 자리에 같이 있었을 것이다.

‘혹시 새로 오신다는 선생님들인가?’

의아한 얼굴로 문을 보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신현수다!

1년만이다.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난 탓일까?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입이 열리질 않았다. 그냥 꽉 껴안는 것으로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이혁민 교수 앞이라 표현도 못하고 얼굴만 벌게졌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신현수가 슬쩍 김지훈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꼭 말로 안 해도 돼. 나도 지훈이 네 얼굴 보니까 정말 반갑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저 돌아왔습니다.”

“이게 누고? 신현수 아니가! 이게 얼마만이야? 잘 왔다. 여기 앉아라. 앉아.”

사투리가 팍팍 섞였다.

이혁민 교수도 신현수가 돌아오기를 무척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얼굴까지 살짝 상기된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지훈아. 잘 지냈지? 홍재순 선생님. 경석이 형. 잘 지내셨죠?”

“야! 반갑다. 별일 없었지?”

“예. 많이 배우고 왔습니다.”

한동안 입가에 핀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신현수. 언제 왔나?”

“어제 저녁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전화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의외로 챙길 것이 많았습니다.”

“시차 적응도 안 돼 피곤할 텐데 이 시간에 왜 왔어?”

“지금이 더 말짱합니다. 선생님.”

“아! 미국은 지금이 아침이니까 그렇겠구나. 내 정신 좀 봐라.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지훈이하고 선생님들 만나러 왔다가 불이 켜진 것 보고 혹시나 해서 들렸습니다. 선생님.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1년 밖에 안 됐는데 늙을 리가 있나?”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많이 변했다.

전에 없던 여유까지 느껴졌다.

비록 몇 마디에 불과했지만 예전의 차갑고 날카로운 말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보다 넓은 세상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좋은 경험을 쌓은 덕일 것이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나누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이혁민 교수 앞이다. 입을 꾹 다물고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말 한 마디에도, 앉은 자세에서도 신현수의 여유와 자신감이 엿보였다. 결코 한눈을 팔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워 왔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드디어 내 진정한 라이벌이 왔네. 다시 긴장하고 살아야 하나?’

이혁민 교수가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신현수도 알아야 하는 내용이다.

“우리 과에 변동이 있는데 이사장님께 들은 소리 있나?”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래? 인사 문제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철저하게 지키시네. 이번에는 안 그러셔도 좋았을 텐데.”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어쨌든 3월부터 새로운 선생들과 근무를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일이 많았다.”

허경발 전임 원장님의 병환 그리고 홍재순과 오상익 교수의 소식을 들은 신현수가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교수진 구성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일은 아니었다.

대장 항문 : 송재덕, 박승준, 이경석.

간담도 : 이준영, 하윤호, 김지훈.

위장관 : 이혁민, 지동훈, 신현수.

혈관 : 신기동.

혈관 파트 보강은 없다는 사실에 김지훈이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군가 들어온다면 손일석은 펠로우조차 하기 힘들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여러 가지를 당부한 이혁민 교수가 일어났다. 지금도 신현수를 보는 눈빛에 반가움과 기대가 가득했다. 지동훈 교수까지 보강된 이상 이제 위장관 파트도 여유를 갖고 제대로 굴러갈 것이다.

“시간되면 식사 같이 하자.”

펠로우들만의 자리가 이어졌다.

슬쩍 눈치를 본 김지훈이 또다시 고경아에게 연락을 했다. 뾰족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다 신현수가 왔다는 말에 조용해졌다. 물론 김지훈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후였다.

홍재순도 끝까지 함께 했다.

화제는 단연코 신현수의 미국 생활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넋이 빠졌다.

칼처럼 지켜야 하는 근무시간과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보수부터 의료진에 대한 환자의 철저한 믿음까지 부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환자 부담 문제는 정반대였다.

내는 만큼 의료 혜택을 받는다지만 의료 보험이 없으면 환자 부담은 지나친 정도가 아니었다. 병원 문턱도 밟기 힘들다는 점은 미국 의료의 어두운 단면이었다.

김지훈도 사람이다.

부러운 것은 부러운 것이다. 단점보다는 장점, 특히 의료진들의 대우와 처우에 관심이 더 쏠렸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김지훈이 두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곳은 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다.

병원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무엇을 보고 배웠는지가 궁금해졌다.

“지훈아. 미국 애들은 위장관과 대장 쪽도 라파로를 시도하기 시작했어. 아직은 상당히 제한된 질환에서만 시행하지만 정말 대단하더라.”

“그래? 야!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할지 상상도 안 되네. 자료 많이 갖고 왔지?”

“수술 테이프하고 라파로 기구까지 최대한 가지고 들어왔어. 일단 눈으로 본 수술은 해봐야 하지 않겠어?”

연수하러 온 의사에게는 좀처럼 수술을 주지 않는다고 했지만 간접적인 경험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김지훈 역시 참관을 통해 배운 것이 적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눈을 반짝이며 신현수의 말을 듣고 있던 김지훈이 갑자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반가워 죽겠는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위장관을 라파로로 수술한단 말이지?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야.’

그놈의 라이벌 의식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새로운 수술 그것도 라파로의 새로운 적용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감을 느끼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서늘했다. 최선을 다해 펠로우 1년을 마쳤지만 신현수가 어디까지 달려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경석의 표정을 보니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얘기할 시간은 앞으로도 충분했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후우! 하윤호 선생님이 오시면 아무래도 수술이 줄겠지? 그건 좋지 않지만 연수를 2년이나 다녀오셨다니까 간담도의 새로운 면을 배울 수 있겠네. 1년에 저 정도인데 2년이면 차원이 다를 수도 있겠어. 다른 병원에서 근무하시던 분들이 오셨다고 의국 분위기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기대와 함께 묘한 불안이 뒤섞였다.

불과 일주일만 지나면 펠로우 2년차가 시작된다.

1년차를 시작했을 때의 은근한 긴장까지 다가왔다.

생소한 사람 혹은 새로운 환경을 만나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게다가 인생 최대의 라이벌인 신현수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에 대한 기대와 하윤호 교수까지 사뭇 가슴이 떨렸다.

집으로 막 들어가려던 김지훈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서성였다. 몇 번이나 번호를 누르다 결국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당장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리고 싶어 죽겠는데 이 밤에 전화하면 분명 한 마디하고 툭 끊으시겠지? 참자. 아침까지 참자. 좋다. 카르페 디엠!’

휴대폰을 쥔 손이 번쩍 올라갔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고경아도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물론 늦게 들어온 대가는 따로 치렀다.

일주일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오상익 교수가 무사히 퇴원했고 무뚝뚝한 양반은 축하 인사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김지훈. 한 번만 해.”

이준영 교수의 어색함이 눈에 보였다.

‘아무리 자리에 관심이 없으셔도 그렇지 애들처럼 쑥스러워 하시면 어떻게 해? 하실 때도 됐잖아.’

머릿속에 고이 담긴 생각이지만 김지훈 많이 컸다.

펠로우 1년이 가져온 대담함이었다.

파이팅!

“지훈아, 원장 된 게 좋기만 한 일은 아니다만 난 더 들어도 된다. 내가 이러다 모든 병원 원장을 다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흐음! 경석이는 벌써 여러 번 했어. 여러 번.”

“축하드립니다. 원장님. 축하드립니다.”

“그래. 그래. 내가 이 맛에 산다. 이 맛에. 이 교수, 자리를 안 맡았으면 몰라도 맡은 이상 열심히 하자. 열심히. 지훈아, 아직도 안 늦었다. 대장하자. 대장.”

송재덕 교수가 유난히도 즐거워했다.

자리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오상익 교수와 홍재순의 빈자리로 침체된 분위기를 띄우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음의 짐도 무거운 모양이었다. 되돌릴 수 없다면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 4년차들이 마지막 인사를 왔다.

서도진과 안호석부터 천광호까지 다들 군대를 가야 한다. 일반외과 전문의라는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가 교차했다.

신임 1년차들도 인사를 왔다.

모두 세 명이었다.

네 명이 정원이었지만 지원 미달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모두들 착잡함을 금치 못했다. 수련은 가혹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데 장래는 불확실하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사실 일이 년 전부터 불안했다.

“결국 돈이야. 돈.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는 다 우리 과랑 비슷한 처지지만 안과나 피부과, 성형외과는 경쟁률이 점점 높아지잖아. 큰일이다. 큰일. 이 과장, 내년에는 더 심해질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우리 과 자체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답답합니다. 일단 한두 해 지켜보면서 계속 미달 사태가 나오면 병원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과장, 그런다고 지원자가 늘겠어? 선생님 말씀대로 돈이 문제야. 수련 과정은 똑같이 힘든데 정형외과, 신경외과는 아직도 지원 초과잖아.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바뀌기 힘들 거야. 수련은 제일 힘들게 받고 나가면 찬밥인데 당연한 일이지, 뭐. 바이탈을 다루면 뭐해? 사고나 안 나면 다행이지.”

신기동 교수까지 침을 튀겼다.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상대적 박탈감을 보상해 줄 수도 없었고 의료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은 정부와 사회의 몫이기 때문이다.

신임 교수들과의 자리도 그 탓에 빛이 조금은 바랬다. 홍재순과의 마지막 시간이라는 점까지 겹쳐 초반 분위기는 다소 우울하기까지 했다.

하필이면 응급실에 환자가 왔다. 김지훈은 어떤 사람인지 가장 궁금했던 하윤호 교수와 인사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형. 어떤 분들인 것 같아요? 분위기는 괜찮았어요?”

“걱정을 조금 했는데 좋은 분들 같아. 박승준 선생님하고 얘기도 많이 했어. 말 들어보니까 실력도 쟁쟁하시네. 현수야. 지동훈 선생님도 그렇게 보였지?”

“예. 앞으로 잘해봐야죠.”

신현수가 말꼬리를 흐렸다.

수술 욕심이었다.

연수 기간 동안 거의 메스를 잡아보지 못했다. 다시 빡빡한 일상에 적응하고 손이 풀리면 본격적으로 수술하고 싶다는 기대가 깨졌을 것이다.

김지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지훈아. 너 고생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당직이 줄어서 힘은 덜 들겠다.”

“나보다 와이프가 더 좋아해.”

신임 교수 세 명에 펠로우 세 명이 돌아가며 당직을 서게 됐다. 주말 당직은 따로 돌아가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일주일 내내 당직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편해서 좋긴 한데 수술할 기회는 확실하게 주네. 이렇게 되면 양보다 질인가? 수술 하나하나에 전보다 훨씬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까 환자에게는 정말 좋은 일일 수도 있겠다.’

왠지 기분이 묘했다.

수술이 준다는 것은 곧 배울 기회가 줄어든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석사 논문을 쓰려면 케이스를 확보해야 하는데 은근한 걱정까지 다가왔다.

어쨌든 환경이 변했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좋은 일도, 끝까지 나쁜 일도 없다. 앞날이 어찌 될지는 결국 각자에게 달렸다. 변화에 맞춰 최대한 노력하고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한 가지 변화가 더 있다.

이것은 분명 희소식이었다.

“현수야. 정식 근무 시작되면 응급실 보고는 네가 해야 돼. 대우는 2년차라고 해도 펠로우 1년차나 다름이 없잖아. 우리끼리 연수 경력은 치지 말자. 이준영 선생님이 보고를 받으실 테니까 일찍 나와서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몇 시까지 나오면 될까?”

“그건 모르지. 송재덕 선생님보다 더 빡빡하신데 한 시간 일찍? 그 정도로 될까? 모자랄 지도 몰라.”

김지훈의 뻥에 신현수가 눈만 말똥거렸다.

다음 날 외과 센터 5층이 부산해졌다.

신임 교수들의 교수실 세 개가 연구실 옆으로 나란히 들어섰다. 박승준, 지동훈, 하윤호가 쓰인 명패를 보던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부럽다. 우리도 1년만 지나면 개인 교수실을 주겠지?’

신임 교수들이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특히 퉁퉁한 얼굴에 미소를 달고 사는 것 같은 하윤호 교수에 대한 관심이 줄지를 않았다.

“김지훈 선생. 잘 부탁해.”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첫인상은 좋았다.

왠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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