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시 채워지는 자리. (2)
1년차에게는 정말 힘든 일이었다.
눈에 띄지 않지만 조용히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송진우가 새삼스럽게 보였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혁원이 묘한 눈빛으로 송진우를 보았다.
김지훈이 이혁원을 보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
‘너희들 덕에 두 발 뻗고 잔다. 고맙다.’
“병옥이는?”
“교대로 킵하고 있습니다.”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한 목소리였다.
내심 궁금했지만 전공의들에게 맡길 일이었다.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혁원이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강병옥 선생이 가장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지만 1년차 중에서 킵은 진우가 가장 많이 했을 겁니다. 파트가 달라도 동기가 힘들어하면 거의 대부분 대신 서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능력 아닐까요?”
이혁원의 본심이 보였다.
“능력? 진우가 열심히 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였어? 자식! 체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닌데 대단하네. 그래서 실력이 그렇게 팍팍 늘었구나. 혁원아. 그런데·····.”
김지훈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이혁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1년차가 언제 어디서 킵을 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은 그 옆에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혁원이나 송진우나 별반 얼굴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이 뿌듯해지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까지 머금을 뻔했다. 이런 마음과 정성이라면 오상익 교수도 당장 훌훌 털고 일어날 것 같았다.
“여럿이 동시에 킵을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어. 자야할 때는 반드시 자고 킵해야 할 때는 확실하게 집중해.”
스승을 닮아가는 모양이다.
마음과는 달리 말이 좀 무뚝뚝했다.
“예. 선생님.”
이혁원이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도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혁원은 또 누굴 닮아가는 걸까?
홍재순과 전공의들의 노력이 가슴이 와닿는 새벽이었다. 그 덕인지 일주일이나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상익 교수의 바이탈이 의외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띠! 띠! 띠! 띠! 띠!
규칙적인 심박동 소리,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있지만 정상적인 산소 포화도, 뚝뚝 떨어지는 소변 방울은 중요 장기들이 건강하다고 알려주는 지표였다.
이혁원이 송진우를 깨우려 했다.
김지훈이 손을 들어 조용히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혁원아. 내가 있을 테니까 너도 가서 눈 좀 붙여. 조금 있으면 3년차 될 놈의 얼굴이 그게 뭐야?”
“괜찮습니다. 선생님. 전 낮에 자도 됩니다.”
“낮에 많이 자 봐야 머리만 아파. 그리고 이제는 수술에 집중해야 할 때야. 내 말 들어.”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모양이었다.
깜박깜박 졸던 송진우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허둥지둥 모니터를 확인하고 침대 밑으로 고개를 숙여 소변까지 확인했다.
졸음에 겨워 정신이 없을 텐데도 마치 몸에 익은 것처럼 파악해야 할 사항들을 모두 확인했다. 몇 번의 경험과 머릿속에 담긴 이론만으로는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정말 꾸준하게 노력한 티가 팍팍 나네. 외과 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수술 실력만이 아니라는 걸 진우, 혁원이 너희들이 몸으로 보여주는구나. 고맙다.’
“휴우! 다행이다.”
한숨 돌린 송진우가 크게 기지개를 펴다 말고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푹 숙였다.
“선생님. 언제 오셨습니까?”
“송진우, 킵을 할 거면 제대로 하고 잘 거면 편하게 자. 선생님 상태는 어떠셔?”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또 마음과 입이 따로 논다.
이번에는 솔직히 정말 진심으로 미안했다.
“큰 변화는 없으십니다.”
“킵을 자면서 하니까 그렇지.”
제길! 왜 자꾸 말이 꼬일까?
천만다행 몸이 따라주었다.
어느새 송진우의 어깨에 손이 가 있었다. 난로처럼 시뻘게진 얼굴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웃을 수 없는 자리이기에 등만 두드렸다.
그 때 이혁원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목소리 낮춰. 홍재순 선생님 깬다니까······.”
김지훈도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어느 틈엔가 눈을 뜬 홍재순은 아예 얼어붙었다.
오상익 교수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모두들 석상처럼 굳은 채 눈을 떼지 못했다. 입안이 바짝 말라오며 중환자실을 가득 채운 기계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눈꺼풀이 떨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눈을 떴다.
홍재순이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하나의 점으로 고정돼 있던 눈동자가 빛에 반응을 했다.
“선생님. 정신이 드십니까?”
삑! 삑! 삑! 삑!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오상익 교수의 가슴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자발 호흡이 돌아오며 인공호흡기와 충돌한 것이다. 다급하게 인공호흡기와 연결된 호스를 제거했다.
훅! 훅!
기관에 삽관된 튜브를 따라 거친 숨소리가 강하게 터져 나왔다.
“선생님. 제 말이 들리십니까? 들리시면 눈 한 번 깜빡여 보세요.”
반응이 없다.
초점 없는 눈이 멍하니 천장을 향해 있었다.
홍재순이 다시 소리쳤다.
“선생님. 제 말이 들리시면 눈 한 번 깜빡여 보세요.”
어깨가 움찔거렸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통증을 가하자 눈가를 찡그리며 손발을 움츠렸다.
김지훈이 재빨리 이혁원에게 눈짓을 했다.
빠르게 필요한 검사들을 시행했다.
“선생님. 천천히 숨을 쉬세요. 지금은 불편하셔도 당장 뺄 수가 없습니다. 제 말 알아들으셨으면 두 번 깜빡여 보세요.”
온갖 자극 탓일까?
홍재순의 간절한 목소리가 이제야 들린 걸까?
두 번 눈을 깜빡였다.
드디어 의식이 돌아왔다.
홍재순이 흥분과 감격에 겨워 숨만 몰아쉬었다.
간호사가 부리나케 검사 결과를 가져왔다.
모든 검사는 정상이었다.
연락을 받은 변상훈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미처 머리도 빗지 못했는지 부스스한 모습이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청진을 하고 수술 부위를 확인했다.
의식이 확실하게 돌아왔는지 재차 삼차 확인했다.
거듭된 자극에 오상익 교수가 심하게 기침을 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동안 혼수상태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몸부림이었다.
변상훈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김지훈과 홍재순을 보았다.
“빼도 되겠어?”
최종 결정은 가장 오랜 시간 곁을 지킨 홍재순의 몫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킨 홍재순이 다시 한 번 철저하게 오상익 교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홍재순이 직접 튜브를 제거했다.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한동안 거친 숨이 이어졌다.
오상익 교수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초점을 잃었던 눈동자가 한 사람에게 고정됐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홍재순의 손을 잡으려 애썼다.
“선생님!”
홍재순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시간이 갈수록 오상익 교수의 의식은 명료해졌다. 탁하고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했다.
“홍···. 홍재순 선생.”
“선생님.”
그것으로 족했다.
지난 일주일간의 노력과 간절함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결코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목소리를 듣고, 결코 마주 칠 수 없을 것 같던 눈을 마주 친 보호자들이 홍재순을 잡고 울었다. 아침 회진을 올라온 교수들도 너무 놀라 입을 열지 못할 정도였다.
“원장님. 다른 생각 말고 우리 변 교수하고 재순이 말만 들으시면 됩니다. 재순아. 수고했다. 다 네 덕이다. 네 덕.”
“아닙니다. 선생님. 전 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혁원이하고 진우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우리 이쁜 놈들이 우리 원장님 살렸구나. 살렸어. 잘했다. 잘했어. 니가 혁원이고 니가 진우지? 맞지? 그치? 지훈아. 교수야. 너도 수고했다.”
송재덕 교수의 말이 너무 반가웠다.
굳은 얼굴로 들어왔던 중환자실을 웃으면서 나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오상익 교수의 눈빛과 홍재순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고마웠다. 비록 얼마 안 남았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지막 근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회복됐다.
며칠 후 오상익 교수가 병실로 올라갔다.
명치부터 골반 위까지 봉합한 실도 제거했다.
오상익 교수도 여느 환자와 다르지 않았다.
맑은 의식, 환한 미소, 점차 힘이 붙은 두 다리, 안정적인 바이탈 그리고 확실하게 해결된 질환, 이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마침내 퇴원 결정이 내려 졌다.
많이 수척해졌지만 환하고 건강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시 일에 복귀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오상익 교수의 의지에 달린 일일 것이다.
홍재순이 가장 기뻐했다.
김지훈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는 말을 전했다.
다들 기분 좋은 얼굴로 연구실에 모였다.
“선생님. 혼수상태에 빠지신 것도 모르겠고 갑자기 깨어나신 이유도 알 수가 없네요.”
“그러게. 우리가 가진 한계가 그것뿐이겠어? 평생 노력하고 배워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겠지. 정말 무섭고 불안했는데 잘됐다. 너희들 덕분에 편한 마음으로 집에 갈 수 있겠다.”
집에 갈 수 있다는 말이 단순하게 들리지 않았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재순이 형의 마음은 정말 편할까? 오상익 선생님은 어떻게 벗어나신 걸까?’
지금도 혼수상태의 원인은 알지 못한다.
갑자기 회복된 이유 또한 알지 못한다.
무사히 회복됐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따름이다.
여전히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할 뿐이다.
한동안 여러 의견이 오고갔지만 뾰족한 답은 없었다.
김지훈이 손뼉을 딱딱 치며 일어섰다.
“이유는 몰라도 좋아지셨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죠, 뭐. 자! 퇴근합시다. 선생님은 두 발 뻗고 푹 주무시고 경석이 형은 당직 열심히 서세요. 전 갑니다.”
연구실 문을 막 열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오면 십중팔구 응급실이다.
하하하!
아름답고 편안한 소리다.
“경석이 형. 뭐해요?”
“에이! 요새 지훈이 일복이 옮겨 왔는지 당직 때마다 한두 건씩 수술을 했는데 오늘도 어김없네.”
투덜거리면서도 웃고 있다.
“수술 많이 하면 실력 팍팍 늘고 좋죠. 경석이 형, 그럼 수고 많이 밤새 하세요. 내일 봅시다.”
김지훈답지 않게 너무 좋아했다.
힐끗 째려보며 전화를 받은 이경석이 벌떡 일어나며 급히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예. 예. 예. 알겠습니다.”
어라!
응급실이 아니라 교수인 모양이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경석이 씨익 웃었다.
“지훈아. 가긴 어딜 가. 퇴근 취소다.”
“예? 무슨 전환데요?”
“이혁민 선생님께서 우리 셋 다 내려오라신다.”
“무슨 일로요?”
“난 모르지. 일단 가서 들어봐야지.”
왠지 노랫가락이 섞인 것 같다.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거의 울상을 짓고 있었다.
“와이프하고 간만에 저녁 먹기로 했는데 왜 하필이면 오늘이야. 미치겠네. 형.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가정의 평화가 걱정되면 이혁민 선생님께 빨리 끝내달라고 직접 말씀 드려. 당직인 게 이렇게 마음이 편할 줄은 몰랐네.”
농담 한 마디 던졌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급히 연락을 하고 줄레줄레 외래로 향했다. 특별한 일이 없어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섰는데 정말 뜻밖의 말을 들었다.
“좋은 소식이 있다. 송재덕 선생님이 원장님이 되셨고 이준영 선생님이 외과 센터를 맡기로 결정이 됐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승님이 센터장이 되셨다고? 자리에는 전혀 욕심이 없으신 분인데 어떻게 된 일이지? 아니지. 병원에서도 이제 스승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단 말이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김지훈의 입이 찢어졌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당장 달려가 축하드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 엉덩이가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엉덩이를 단단히 붙여야 했다.
“새로운 교수들이 초빙됐다. 대장 항문에 박승준 교수, 위장관에 지동훈 교수 그리고 간담도에 하윤호 교수가 3월부터 근무를 시작할 거야. 처음이라 서먹하겠지만 있던 사람이 먼저 다가가는 것이 예의다. 다들 실력이 있고 경력도 화려하니까 많이 배울 수 있을 거야.”
세 명이 동시에 들어온다는 말에 약간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것도 경력자라니 모두 윗사람이다. 교수 충원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다 갑작스럽기까지 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신임 교수들의 신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던 이혁민 교수가 갑자기 엉뚱한 말을 했다.
“경석이 니 올해로 서른다섯 넘었지?”
“예? 그것보다는 두세 살 정도 더 먹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는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인턴 때 사고 치지 말고 착실하게 다녔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박승준 교수가 한두 살 위겠네. 지동훈 교수나 하윤호 교수는 아마 너하고 나이가 비슷할 거다. 그래도 펠로우와 교수 관계니까 깍듯하게 대해야 한다. 지훈이. 니도 마찬가지다. 학교 선배하고 똑같이 대해야 한다. 알았나?”
“예. 선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쩐지 이혁민 교수의 표정도 밝지만은 않아 보였다. 과를 책임져야 하는 자리 때문일 것이다. 두 어깨에 걸린 책임이 더욱 무거워진 탓일지도 몰랐다.
이혁민 교수가 신임 교수들의 이력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한꺼번에 세 분이면 얼굴 익히는 데만 한참 걸리겠네. 하윤호 선생님이라고 하셨나? 어떤 분일까? 2년이나 연수를 다녀왔으면 실력은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이경석도 박승준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은 갑갑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송재덕 교수가 원장이 된 것은 정말 잘된 일이지만 대장 항문 파트 펠로우로서는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박승준 교수가 파트를 어떻게 운영할지도 걱정이 된 것이다.
홍재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담긴 무거움을 누가 알까?
똑! 똑! 똑!
이경석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밤에 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