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34화 (634/1,329)

4화. 다시 채워지는 자리. (1)

오상익 원장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에게는 유리한 일이었다.

“얼마 전이었으면 틀린 말도 아니었겠지만 오상익 원장이 쓰러졌어. 같은 대장 항문 전공인데 몰랐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동맥류로 수술 받은 지 며칠 됐는데 지금도 혼수상태야. 깨어난다고 해도 복귀할 수는 없지 않겠어? 누군가는 그 자리를 대신해야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오상익 선생님은 주로 항문 쪽을 담당하셨고 대장 쪽은 송재덕 선생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시다시피 전 대장 항문을 모두 담당하고 있습니다. 두 분 다 제가 잘 아는 분들인데 예의가 아닐 것 같습니다.”

송재덕 교수와 오상익 교수는 대장 항문 학회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또한 30대 후반인 박승준 교수에게는 대선배이기에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박승준은 병원을 옮기는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이런 일을 모를 수가 없는데, 정보가 더 필요하다 이 말인가?’

“그런 문제는 걱정할 필요 없어.”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요? 송재덕 선생님은 쉽게 손을 놓으실 분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원장 자리가 비잖아. 지금도 외과 센터 때문에 펠로우에게 수술을 많이 넘겼어. 만일 송재덕 교수가 서울 병원 원장이 되면 지금보다 더 시간이 없지 않겠어?”

“펠로우에게 수술을 넘기셨다고요?”

박승준 교수의 눈이 번쩍였다.

가장 먼저 알았어야 할 사항 중 하나였다.

“이번 외과 펠로우들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말은 많지만 펠로우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게다가 오상익 선생 파트 펠로우도 이번에 그만 둬.”

“아! 그건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아버님이 운영하는 전문 병원을 맡게 된다는 홍재순 선생 아닙니까?”

“맞아. 그럼 답이 딱 나오지 않아? 결국 대장 항문 파트에 펠로우 한 명만 남는 꼴이 돼. 박 교수,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

박승준 교수가 생각에 잠겼다.

일전에 슬며시 언질을 받았다. 내심 관심이 있어 알아본 결과 확실히 탐이 나는 자리였다. 가장 결정적인 점은 과장인 이혁민 교수의 뒤를 받쳐 줄 허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중간에 교수들이 그만 두었다지만 달랑 펠로우 세 명만 있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어쨌든 자리만 잡으면 빠른 시간 내에 과장이 되는 일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양날의 검이었다. 만일 이혁민 교수에게 복안이 있다면 헛물만 켜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도리어 튕겨 나가지 않으면 다행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내가 믿을 건 실력과 하성원 원장님의 후원뿐인데 언제까지 가능할까? 끝까지 날 밀어준다는 보장도 없잖아?’

“원장님. 솔직히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외과 과장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도 모르고 저 혼자 아등바등한다고 과장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혼자 오면 어려운 점이 많겠지. 내가 그 문제까지 다 생각을 했어. 위장관 파트로 한 명 더 데려와. 자네 말이라면 껌벅 죽는다는 지동훈이 있잖아?”

뜻밖의 대답이었다.

학교 선배에 평소 친분이 두터웠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단순히 선배로서 후배를 이끄는 것일까?

박승준 교수에게는 솔직히 의외였다.

“원장님. 제게 너무 과분한 제안이신데······.”

“과분할 거 없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야. 우리 병원 일반외과 힘이 보통이 아닌데다 신현수라고 이사장 아들까지 외과야. 자네가 좋은 관계 유지하면서 확실하게 자리 잡으면 내게도 도움이 될 수밖에 없어. 솔직히 원장 이삼 년하고 물러날 수는 없잖아? 한 명이라도 더 내 힘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정말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솔직히 자신과 지동훈 정도의 실력이라면 어디 가서든 대우 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경쟁자까지 없다면 말 그대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그러나 장래가 달린 일이었다. 다른 펠로우는 몰라도 신현수의 존재는 십분 고려해야 했다. 신중하게 한 번 더 고민하고 결정할 일이었다.

“언제까지 말씀드리면 됩니까?”

“시간은 없어. 이번 주 내로 결정해.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건 박 교수가 더 잘 알 거야. 아! 그리고 만일 우리 병원으로 온다면 한 가지 부탁은 들어줘야 해.”

“부탁이라니요?”

“내 조카 중에 일반외과 의사가 한 명 있는데 그 집안이 무시할 수 없는 집안이야. 그래서 이번 기회에 교수 한 번 시켜주려고 해.”

“그걸 제게 왜?”

“지금 개인 종합 병원에 근무하고 있어서 조금 곤란한 면이 있어. 그렇다고 실력이 없는 아니야. 재작년에 2년 과정으로 미국 연수까지 다녀왔으니까 자네하고 지동훈과 함께 초빙하면 보다 자연스럽지 않겠어?”

어느 쪽이 본심일까?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일단 근무를 시작하면 중앙 의료원 원장보다 기존 일반외과 교수들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쯤은 상식이기 때문이었다.

하성원 원장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협조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펠로우도 아니고 한 번에 세 명이나 새로운 의사를 뽑는 일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죄송한 말씀인데 교수 세 명을 한 과에서 동시에 충원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 병원은 이사장이 아니라 인사 위원회에서 결정을 하기 때문에 가능해. 내 말을 따르는 사람도 제법 있고 이제는 외부에서 새로운 피를 수혈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도 먹힐 거야. 곧 인사이동이 있는데다 오상익 교수가 저 모양이니까 일반외과 내부에서 딱히 대안을 제시하기도 힘들지 않겠어?”

참 묘한 시점이자 묘한 상황이었다.

자리를 옮기는 것에 대한 불안은 어디를 가든 피할 수 없다. 그 점을 생각하면 이보다 좋은 기회는 확실히 없었다.

‘교수들과 펠로우 둘은 내가 확실하게 관리하고 지동훈이 신현수만 잘 다루면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건가? 설마 조카라는 사람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겠지?’

박승준 교수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하성원 원장이 피식 웃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다. 욕심을 내는 만큼 불안한 법이다. 부당하거나 혹은 불법이 아니라면 생각보다 쉽게 욕심을 따르는 존재가 또한 사람이다.

“좋은 게 좋은 거야, 이 사람아. 당장 과장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과장부터 된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아. 자! 오늘은 술이나 먹자고. 겸사겸사 새로운 사람도 한 명 만나봐.”

종업원에게 귀 뜸을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하성원 원장과 닮은 것 같은 사람이 들어섰다. 둥근 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제법 몸집까지 있어 모나지 않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안녕하십니까? 하윤호입니다.”

“박승준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보다 선배님이신데 말씀 놓으십시오.”

잠시 눈길을 주던 박승준 교수가 웃음을 머금었다.

선입견을 가지고 볼 필요는 없었다. 문제만 만들지 않는다면 친해져서 나쁠 일도 없었다. 아니, 이미 한 배를 탄 지도 몰랐다.

곧 술잔이 오고갔다.

“앞으로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뜻밖의 말까지 하는 하윤호의 모습에 박승준의 경계가 풀렸다. 하성원 원장의 말대로 실력만 갖췄다면 든든한 힘이 될 사람이라고 여겼다.

“연수까지 다녀왔으면 수술은 많이 해 봤겠지?”

“지겹도록 했습니다. 간담도 쪽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결코 형님에게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얼큰하게 술기운이 오른 박승준 교수가 지동훈 교수까지 불렀다. 상당히 진지한 성격을 가진 지동훈 교수였다. 같은 생각,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면 병원을 옮기는 것이 장래를 보장하는 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젊은 사람들답네. 자!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 보자고. 기분 좋다. 박 교수, 지 교수, 내가 한 말 잊지 마. 우리 하 교수도 잘 부탁해.”

밤이 깊어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동훈아. 어때 보여?”

“글쎄요. 첫 인상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연수 가서 그렇게 수술을 많이 했는지가 좀 의문입니다.”

“설마 거짓말이겠어? 지 교수하고 나하고 힘 합치면 충분할 것 같은데 우리 함께 갈까? 대장, 위장, 간까지 싹 잡아서 빨리 과장 달고 원장까지 달려보자. 외과 센터도 있다니까 자리는 많겠네.”

“선생님. 오늘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말씀하시죠.”

“나도 문제지만 넌 너무 신중해서 탈이야. 하성원 원장님이 이번 주까지 시간 주신다고 했으니까 잘 생각해 봐. 나쁠 것 같지는 않아. 솔직히 좋은 기회잖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욕심이다.

박승준과 지동훈은 욕심을 부려도 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실력을 바탕으로 인정까지 받는다면 더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성원 원장의 든든한 지원을 생각하면 호랑이 등에 날개까지 단 격일 수도 있었다.

비틀거리던 박승준이 코웃음을 폈다.

‘미국 연수를 받았다지만 하윤호의 실력이 미지수이긴 하네. 문제가 되면 스스로 책임을 지겠지. 아니면 내 손으로 쫓아 버리면 되고.’

일반외과에 한바탕 바람이 불 것이다.

순풍일까?

역풍일까?

아니면 회오리바람일까?

일주일째 혼수상태다.

집도를 한 변상훈 교수와 신기동 교수의 극에 달한 괴로움이 눈에 보였다. 한 주 내내 얼굴을 펴지 못했다. 툭하면 날던 비수가 사라졌지만 도리어 마음만 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김지훈. 홍재순 선생이 있지만 신경 좀 써. 스승님 때보다 더 힘드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날카롭고 차갑게 보이는 신기동 교수가 자신의 속마음까지 비쳤다.

김지훈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오상익 교수가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좁은 방안을 서성거리기 일쑤였다. 환자든, 수술이든, 가정이든 무언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 돌아오는 당직 날이다.

점점 더 피곤해졌지만 홍재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차라리 환자에게만 집중해야 하는 수술실에 있을 때가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간만에 혈복막이 떴다.

새벽 1시가 넘어서 수술하는 일도 이번 주 들어 처음이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송진우와 강병옥을 물끄러미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1년차의 피곤이야 당연하다지만 강병옥에 비해서도 송진우의 피곤해 유난해 보였다.

‘요샌 새벽에 수술한 적이 없는데 잠을 거의 못 잔 얼굴이네. 진우한테 일이 몰렸나?’

잠시 후 이혁원이 수술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노티를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던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피곤에 찌든 이혁원을 보니 송진우의 얼굴이 당연해 보였다.

열심히 환자를 보는 후배들 역시 힘이었다.

‘그래. 다들 이렇게 열심히 환자를 보는데 오상익 선생님도 당연히 좋아지실 거야.’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수술을 시작했다.

그 시간만큼은 수술 팀 모두 무섭도록 집중했다.

파열된 비장을 제거하고 손상 받은 장을 자르고 연결했다. 수술은 빠르고 정확하게 끝났지만 전공의를 보는 김지훈의 눈은 점점 더 매서워지고 있었다.

쌓여가는 경험과 점차 넓어지는 시야의 힘이었다.

퍼스트를 선 이혁원과 배를 닫을 때 타이를 한 송진우가 새카맣게 탔다.

“이혁원. 다음 달이면 3년차야.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하자. 송진우. 2년차 돼서도 이 모양이면 가만 안 둔다. 1년차 교육이나 제대로 시킬 수 있겠어?”

하얀 재와 빨간 재가 흩날렸다.

“나종진. 너도 마찬가지야. 같은 퍼스트를 서도 2년차와 3년차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달라야 돼. 명심해.”

수술 후 환자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회복실로 들어온 나종진이 덤으로 탔다. 이틀 전 김지훈의 수술을 들어가 퍼스트를 선 것이 죄였다.

“어쩐지 별말 없으시더라.”

나종진의 푸념에 다들 입맛만 다셨다. 살 떨리게 타고 나면 우울하다가도 점점 늘어만 가는 실력을 확인할 때면 더 타도 좋다는 생각이 드니 희한한 일이었다.

잠시 탈의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일어서니 어느새 새벽 4시가 넘었다. 퇴근했다 다시 출근하자니 다소 애매모호한 시간이었다. 연구실에서 잠깐 눈을 붙일까 고민하다 중환자실로 향했다.

지금이 가장 힘든 시간이다.

오상익 교수는 물론 벌써 일주일 째 병원을 떠나지 않고 있는 홍재순이 걱정됐다.

중환자실을 가득 채운 소리와 기계에 의존해 생명을 이어가는 환자의 모습은 항상 가슴을 무겁게 만든다. 특히 심장 박동 소리는 날카로운 탓인지 중환자실을 나와도 한동안 귓가를 울리곤 했다.

띠띠띠띠!

누군가의 심장이 또 헐떡이고 있었다.

혹시 오상익 교수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졌다. 다행히 아니었다. 피곤에 지친 홍재순은 눈을 감고는 위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송진우였다.

차트 몇 개를 무릎에 올린 채 눈을 뜨려 애쓰고 있었다.

‘파트 1년차도 아닌데 진우가 왜 킵을 하고 있지? 잠깐 와 있는 건가?’

그 때 이혁원이 발소리를 죽으며 달려왔다.

“선생님. 무슨 일 때문에 오셨어요?”

“쉿! 홍재순 선생님 깨시겠다. 목소리 낮춰. 진우는 여기 왜 있는 거야? 교대한 건가?”

이혁원이 힐끗 눈길을 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 주 내내 새벽이면 킵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잘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많이 피곤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거의 눈도 못 뜨고 있는 건 처음 봅니다.”

매일 새벽마다 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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