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또 하나의 빈자리. (1)
간만에 이경석과 둘만의 자리를 가졌다.
“경석이 형. 혹시 이러다 형이 대장 항문을 모두 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두 파트 쉽지 않을 텐데 죽겠다고 난리 치면 안 됩니다.”
“세 파트 맡은 놈도 있는데 내가 할 소리가 아니지.”
“난 이제 면역이 돼서 괜찮아요. 거기다 과장님 파트가 빠지면 이건 완전 천국이지, 뭐.”
“방심하지 마라. 그러다 갑자기 현수가 일 년 더 연수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온다는 연락 없었지? 마취과 말 들으니까 서연이도 연락이 없다더라.”
“설마?”
설마가 사람 잡을 수도 있다.
이경석의 말이 묘하게 뒷덜미를 잡아끌었지만 이젠 마음의 정리가 어느 정도 된 모양이다. 홍재순의 빈자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눈가를 좁히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틀 연속 오프인데 심란한 마음으로 퇴근할 수는 없었다. 입맛을 쩝쩝 다신 김지훈이 가운을 벗으며 집에 갈 준비를 했다.
그 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 시간에 연구실 전화벨이 울리는 이유는 하나다.
“경석이 형. 환자 온 모양이네요. 요샌 일복 좀 생기셨어요. 날밤 새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씨익 웃으며 전화라도 대신 받아 주었다.
그런데 전공의가 아니었다.
홍재순이다.
“김지훈 선생. 이경석 선생하고 같이 있지? 오프 날 미안한데 응급실로 같이 좀 내려와.”
어라?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목소리까지 심상치 않았다.
“오상익 선생님이 배가 아파서 오셨어. 증상이 심상치 않아서 같이 봤으면 좋겠다.”
“오상익 선생님이요?”
아무리 항문 전공이라지만 일반외과 전문의다. 외과 환자를 못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과 질환이라면 당연히 내과 전공의와 교수들이 보면 된다.
이경석까지 찾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 정도로 심하세요?”
“복막염은 아닌 것 같은데 증상이 너무 심하셔.”
문득 큰 스승님이 생각났다. 별 일 아니기를 바라며 응급실로 내려갔다. 이경석이 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홍재순이 다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디가 얼마나 안 좋으시기에 선생님이 직접 내려 오셨어요? 복막염은 아닌 것 같다면서요?”
“복통이 너무 심하시네. 일단 CT 예약해 놨어.”
뭔가 의심하면서도 말을 안 하는 것 같았다.
내심 찜찜했지만 별일 아닐 것이라 믿었다.
단순한 복통이라고 해도 위경련이나 장경련이 발생하면 얼굴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플 수 있다. 때론 가까운 사람이 환자면 경험 많은 의사도 부담감으로 인해 제대로 진료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수술할 병은 아니라고 하면서 왜 저렇게 불안해하시지? 경석이 형도 너무 불안해하네. 오상익 선생님과 의외로 각별했던 모양이네.’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랬다.
오상익 교수를 보자 마음속에 자리했던 방심이 싹 사라졌다. 한눈에도 웬만한 복통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김지훈과 이경석을 앞에 두고도 끙끙 신음 소리만 낼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가 얼마나 아프시기에.’
복부 진찰을 했다.
복부 전반에 걸친 압통은 심했지만 복막염의 중요 징후인 반사통은 없었다. 그런데 또 다른 주요 증상 중 하나가 보였다. 딱딱하게 경직된 배가 좀처럼 부드럽게 풀리질 않았다.
청진을 했다.
장 소리가 다소 감소됐지만 정상 범위 내에서 들렸다. 복막염이나 수술을 요하는 질환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위경련치고는 지나치게 증상이 심했다.
‘소견들이 앞뒤가 안 맞네. 뭐지?’
청진기를 뗄 수가 없었다.
그 때 무심코 지나쳤던 심장박동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복부 대동맥은 직경 2-2.5센티미터에 달할 정도로 굵다. 그 때문에 마른 환자는 복부에서도 박동 소리가 들리는 경우가 꽤 많았다. 문제는 그 부분에서 가장 강한 압통을 호소한다는 것이었다.
‘박동 소리가 들리는 범위가 너무 넓은 거 아냐?’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힐끗 고개를 돌리자 불안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지훈 선생도?”
오상익 교수가 눈앞에 있다. 눈을 마주 친 홍재순이 복부를 가리키며 말없이 큰 원을 그려보였다.
복부 대동맥류를 의심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눈빛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혹시 모르니까 일단 신기동 선생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흉부외과에도 연락해 놓는 게 좋겠습니다.”
비상이다.
복부 대동맥류는 무증상인 경우도 많지만 크기에 따라 다양한 증상을 보인다. 만일 추측이 맞는다면 심각할 정도로 진행됐을 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합병증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마침 CT 촬영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홍재순과 이경석이 방사선실로 가는 사이 김지훈이 부리나케 신기동 교수에게 연락했다. 마음이 급해 흉부외과에서는 변상훈 교수 이외에 아무도 떠오르지도 않았다.
다행히 두 교수 모두 퇴근 전이었다.
“뭐? 대동맥류가 의심되는데 증상이 심하다고? 바이탈은 괜찮아?”
“예. 심박동이 빠른 것 이외에는 괜찮습니다.”
“알았어. 바로 내려갈게. CT실에서 보자.”
촬영이 시작됐다.
한 컷 한 컷 모니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횡경막과 함께 복부 대동맥이 보였다.
불과 다섯 컷도 안 돼 대동맥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답답한 신음 소리가 터졌다.
급격하게 직경이 늘어났다.
가장 확장된 곳은 무려 6센티미터에 달했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신기동 교수와 변상훈 교수의 안색이 더욱 심각해졌다. 증상이 없다고 해도 수술을 요하는 복부 대동맥류였다.
김지훈 역시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조영제 바로 투여하고 다시 찍자.”
“선생님. 설마 대동맥 박리까지 발생한 것은 아니겠죠?”
“두 배가 넘게 늘어나서 걱정이다. 일단 보자.”
확신 없는 목소리였다.
이경석은 입을 열지 못했고 홍재순의 얼굴은 아예 사색으로 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동맥류의 가장 무서운 합병증은 대동맥 박리 즉 파열이다. 더구나 심장과 바로 연결된 탓에 그 어느 혈관보다 가해지는 압력이 크다. 확장된 혈관 벽은 얇아지기 때문에 이런 압력을 버티기가 쉽지 않다. 한계를 넘어서면 어딘가는 찢어질 수밖에 없다.
결과는 치명적이다.
일단 발생하면 언제 혈관을 뚫고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그것은 곧 사망을 의미한다. 하기에 어떤 질환보다 응급 상황이지만 수술 결과는 결코 좋지 못했다.
삑! 삑! 삑!
나직한 소리와 함께 다시 단면이 보였다.
미세한 양이라도 혈관 밖으로 피가 새고 있으면 조영제가 따라 흘러 모니터 상으로는 검고 어두운 색으로 나타날 것이다. 현상을 하면 반대로 하얗고 밝게 나타난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직경도 문제지만 길이가 무려 10센티미터에 달했다.
화면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침묵만이 흘렀다.
마지막 컷까지 확인했다.
모두들 눈가를 좁히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홍재순이 다급하게 물었다.
“신기동 선생님. 어떻습니까?”
신기동 교수가 혈관 외과를 담당하고 있지만 복부 대동맥류는 심장과 관련이 있어 흉부외과에서 치료하는 것이 합당했다. 신기동 교수의 눈길을 받은 변상훈 교수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홍재순 선생. 다행히 박리까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위험한 상태야. 신기동 선생님. 우리 과 중환자실로 입원 조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맥이 너무 확장돼서 내일 아침에 응급으로 수술해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침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일부 동맥벽은 이미 상당히 얇아진 상태였다. 심장이 내뿜은 강한 혈류를 버티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심한 복통으로 보아 눈에 보이지 않게 피가 새고 있을 지도 몰랐다.
철저히 준비를 해도 모자랄 수술을 응급으로 해야 한다. 많은 준비가 필요한 대동맥 수술이 아니었다면 당장 열었을 것이다. 얼마나 위급하고 위험한 상황인지는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응급실에서 대응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오상익 교수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흉부외과 전공의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조그만 자극에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면회도 제한했다. 뒤늦게 달려온 교수들이 변상훈 교수에게 설명을 들으며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동맥류는 흉부외과에서 맡는 게 더 안전하겠지. 변 교수. 내일 아침에는 바로 수술할 수 있겠어? 보통 큰 수술이 아닌데 준비가 미흡해서는 안 되잖아.”
“최대한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우리가 도울 일은 없을까?”
“신기동 선생님과 함께 수술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복부 쪽에서 접근할 생각인데 대동맥을 노출시킬 때까지는 김지훈 선생도 도와줬으면 합니다. 길이가 10센티미터나 돼서 다른 장기 손상을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술은 없는 날이지만 외래 환자가 몇몇 있었다. 김지훈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이준영 교수가 조용히 말했다.
“김지훈,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 때 홍재순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절박한 목소리였다.
오상익 교수는 홍재순에게 스승이었다. 눈에 뜨일 정도로 크고 거창한 수술은 없었지만 거의 모든 수술을 함께 하며 가르치고 배웠다.
그것만큼 끈끈한 관계도 없다.
하기에 도리어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홍재순의 어깨를 두드렸다.
“재순아. 네 마음은 알지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건 알지? 환자가 오상익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겠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조그만 실수라도 하게 되면 누구보다도 자책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다. 신 교수와 지훈이에게 맡겨. 변 교수도 그런 이유로 네게 먼저 말하지 않은 거야.”
“홍재순 선생. 송재덕 선생님 말씀이 맞아.”
집도의인 변상훈 교수도 반대를 했다.
홍재순이 입을 열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전임이 되면 자신의 환자까지 모두 봐도 충분하겠다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던 오상익 교수였다. 그런데 병원을 그만 두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얼굴을 들 수 없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괴로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기운만이 흐르는 가운데 변상훈 교수가 보호자들을 만났다. 안면은 없지만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선배 의사의 가족이다. 반드시 해야 할 마지막 말을 꺼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수술 예정 시간은 5시간에서 6시간 정도로 생각됩니다. 만일 오늘 밤에라도 대동맥 파열이 발생하면 바로 수술해야 합니다만 도중에 사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수술 후에도 회복이 순조로울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말씀 밖에 못 드려 죄송합니다.”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의 마지막은 사망이다. 그것도 모든 수술이 갖는 일반적인 확률이 아니라 그 몇 십 배 혹은 몇 백 배에 달했다.
눈물과 두려움만이 보였다.
‘큰 스승님이 퇴원하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수술이 잘 돼서 빨리 일어나셔야 한 텐데.’
걱정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변상훈 교수에게 수술 중 해야 할 일과 주의할 점을 듣고 머릿속에 새겼다. 집으로 돌아와 간만에 해부학 책을 펼치고 복부 대동맥과 주변 장기의 구조를 확인했다.
“잘 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야죠. 큰 스승님도 안 계신데 오상익 선생님까지 못 일어나시면 정말 문제가 될 거예요. 후우! 답답하네.”
불안과 긴장에 밤새 뒤척였다.
그날 밤 홍재순도 중환자실을 떠나지 못했다.
다음 말 아침 병원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그대로 내달렸다. 중환자실에 도착하자 변상훈 교수가 막 수술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선생님. 바이탈이 흔들리다니요?”
“의식까지 흐려진 상태야. CT 찍기에는 너무 늦었고 일단 열어봐야 알 것 같다.”
“설마 파열 된 겁니까?”
“배제할 수 없어. 지훈아. 이럴 시간 없다. 빨리 내려가자. 마취 끝나자마자 바로 열고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으면 먼저 해결해야 할 것 같다.”
만일 대동맥류 일부분이 버티지 못했다면?
강한 압력을 지닌 혈류가 후복막을 뚫고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동맥 파열의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인 저혈량성 쇼크를 막을 방법이 없다. 의식까지 나빠진 것으로 보아 이미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단 일 초도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빠르게 마취와 수술 준비가 이어졌다.
“혈압은 90에서 100정도 유지하고 수액 과도하게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수혈 준비는 다 됐습니까?”
혈압 조절 역시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저혈량성 쇼크를 방지해야 하지만 무턱대고 혈압을 올릴 수는 없다. 다른 부위도 아니고 대동맥이다. 혈압이 올라가면 혈류가 더욱 강해져 출혈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준비됐습니다. 시작하셔도 됩니다.”
변상훈 교수가 집도의 자리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