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31화 (631/1,329)

2화. 실수는 멀리 있지 않다. (2)

슬며시 김지훈의 얼굴을 보고는 침대 밑으로 두 발을 내렸다. 생살을 쨌는데 전혀 안 아플 수는 없다. 살짝 얼굴을 찌푸린 환자가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도리어 보호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팔을 잡았다.

“여보. 잠깐만. 나 혼자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살살 움직여요. 그러다 큰일 나요.”

“그럼요. 지금은 욕심 부리지 마시고 보행기 잡고 걸으세요. 그러다 넘어지시면 정형외과로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뼈 부러지면 많이 아프실 거예요.”

“그렇겠죠? 알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안 아프네.”

슬슬 얼굴에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병실 문을 나가 복도를 거닐 때는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힐끗 뒤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수술 후 맛볼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이었다. 환자의 몸 상태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까지 고려해 수술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았다.

김지훈과 이혁원이 기분 좋게 웃었다.

“혁원아. 다음에도 시도해야 되겠지?”

“예. 선생님. 어떻게 다른 환자보다 더 안 아파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마 또 5시간 넘게 걸······.”

김지훈의 눈가가 사나워졌다.

이혁원이 자라목을 하며 재빨리 앞장섰다.

“선생님. 곧 집담회 할 시간입니다. 가시죠.”

굳이 직접 응징할 필요는 없다.

‘자식! 조금 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도 못하고 감히 여유를 보여? 수술은 내가 했지만 불길과 비수는 네 몫이다. 얼굴 허옇게 뜨지만 말아라.’

김지훈에게까지 탄 놈들이 노련하고 경험 많은 교수들의 무시무시한 예봉을 피해갈 수 있을까?

으하하하!

예상 적중이다.

집담회 시작과 함께 이혁원이 집중포화를 맞고 쓰러졌다. 함께 수술을 들어갔다는 죄로 질문을 받은 나종진도 장렬하게 산화했다.

1년차라는 이유로 불길을 피한 강병옥이 안도하기는커녕 눈가를 찌푸렸다.

‘차라리 질문을 받는 게 난 것 같은데 김지훈 선생님이 내 얘기를 안 하셨나? 그렇다고 해도 수술 때 이준영 선생님까지 들어오셨잖아? 왜 내게 관심이 없는 것 같지?’

송진우는 무엇 때문인지 얼굴이 벌게졌다.

‘나도 들어갔어야 했는데 요샌 왜 김지훈 선생님과 시간이 안 맞는지 모르겠네. 2년차 때는 김지훈 선생님 파트를 담당할 수 있을까? 에휴! 4년차 선생님들까지 있으니까 안 되겠구나.’

뒤에 앉아 여유롭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1년차들 사이에 알지 못할 서먹함 혹은 냉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저 자식들 둘이 싸웠나? 하긴 일이 많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속에 앙금만 만들지 않으면 괜찮아.’

후배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엠파이에마(담낭농증) 수술이 교수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특히 스승은 수술까지 직접 보았다.

“김지훈 선생. 동맥 처리하면서 문제가 있었지? 예방할 방법이 없었어?”

묵직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넋 놓고 있었던 김지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보았던 못 봤든 간에 솔직하게 말할 일이었다.

“예. 박리에 너무 신경을 쓰다가 담낭의 부피를 줄여야 할 때를 놓쳤습니다.”

“그걸 어떻게 놓칠 수가 있어? 설마 자신감만 갖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엠파이에마 환자를 복강경으로 수술을 하면서 준비조차 안 한 거야?”

“하기는 했습니다만 제 실력이······.”

신기동 교수가 쓱 치고 나왔다.

“그럼 운이었다는 말이네. 혈관 수술하면서 느낀 게 없었어? 핵심적인 부분을 간과하면 어떻게 해? 수술은 환자나 의사에게나 마지막 수단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이미 전후 사정을 다 아는 모양이었다.

“혹시 개복하겠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한 거 아니가? 선택지가 여러 개인 것과 최종 선택은 다르잖아. 일단 선택을 했으면 그 방법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걸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김 교수. 펠로우도 교수다. 교수라고 실수 안 하라는 법은 없지만 동맥 그렇게 처리하다가 환자 잡는다. 더 큰 문제는 막을 수 있는 일을 못 막았다는 거야. 그것만큼 큰 문제는 없다. 없어. 피곤하다는 소리는 환자가 괜찮을 때나 할 수 있는 소리야. 환자는 괜찮니? 괜찮아?”

이혁민 교수도 모자라 송재덕 교수까지?

마치 작정을 한 것 같았다.

화라락! 화라락!

새까맣게 탔다.

간만에 타서 그런지 아주 쉽게 재가 돼 흩날렸다.

구석에 숨어 끄덕끄덕 졸고 있던 전공의들의 눈이 갑자기 번쩍번쩍 빛났다. 김지훈이 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언제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한 바가지나 되는 땀으로 간신히 불을 껐다. 온몸에 박힌 비수는 셀 수도 없었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송재덕 교수의 동네 아저씨 웃음에도 섬뜩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어후! 혁원이가 아니라 내가 여유를 부렸네.’

머리를 긁적이던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의사이기에 환자에 관해서만은 실수를 최소화해야 한다. 스스로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깜빡 잊는 것이 또한 실수일 것이다.

때론 준엄한 말 한마디, 매서운 눈빛이 필요한 지도 몰랐다. 그 속에 상대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아니 없다고 해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일이었다. 하기에 재가 돼 흩날린 이혁원과 나종진의 발걸음에 힘이 넘칠 것이다.

깨달은 바가 많은 집담회였다.

치열했던 시간이 끝나고 여느 때처럼 교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들 즐겁게 웃으며 커피 향을 즐겼다.

이경석이 특히 즐거워했다.

‘어째 오늘따라 다들 더 즐거워하시는 것 같네. 경석이 형. 지금은 웃지만 다음 주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수술 하나만 걸리면 내가 바로 곤란한 질문 던집니다.’

김지훈의 각오 서린 눈빛을 받은 이경석이 흠칫 놀라면서도 딴청을 부렸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김지훈이 커피 잔을 들려다 말고 입술을 모았다.

“그런데 이 과장하고 재순이는 어디 간 거야? 어디? 지훈아. 경석아. 아까 뒤에 따라오지 않았어? 그치? 맞지? 내가 분명히 봤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커피도 안 하고 어디 갔어?”

홍재순이 이혁민 교수와 따로 시간을 가졌다?

잠시 잊고 있었던 문제가 머릿속을 휘감았다.

김지훈은 물론 이경석까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무 티를 낸 모양이었다. 이준영 교수도 의아한 표정으로 김지훈에게 눈길을 주었다.

“지훈아. 경석아? 뭔 일 있어? 얼굴이 왜 그래? 있구나? 있지? 뭐야? 도대체 뭐야?”

뭔가 낌새를 느낀 송재덕 교수가 채근을 했다. 다른 일이라면 무조건 말을 했겠지만 지금은 사안이 달랐다. 혹시 또 다른 일이 있을 지도 몰랐다.

“김지훈. 이경석. 얼굴이 안 좋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있는 거 아니야?”

신기동 교수까지 나섰다.

오상익 교수가 남들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김지훈과 이경석이 어색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자 송재덕 교수가 가슴을 탁탁 쳤다.

“답답하게 왜들 이래? 안 되겠다. 궁금할 때는 직접 물어보는 게 최고다. 최고. 이 과장 어디 있나? 진료실에 있나?”

가뜩이나 성격 급한 송재덕 교수였다.

막 일어서려는 순간 이혁민 교수와 홍재순이 들어왔다.

자리에 앉으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혁민 교수와 눈을 마주친 오상익 교수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조용히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항상 자리를 같이 했지만 웃기만 할 뿐 평소 거의 말이 없었던 오상익 교수였다. 교수들이 의아해 하면서도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좋지 않은 소식을 하나 전해야겠습니다. 홍재순 선생이 2월까지 근무하고 그만두게 됐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예? 원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순아. 그만둔다니 내가 제대로 들은 거야? 정말이니? 정말이야?”

홍재순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상익 교수가 사정을 설명했다.

“대학 병원 교수가 인생의 끝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전문 병원을 경영하면서 더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누구보다도 서운해 하실 송 선생님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답답한 한숨이 터졌다.

해마다 전공의들을 떠나보내는 교수들이었다. 수련 때 맺은 관계를 쭉 유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얼굴 한번 보지 못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아쉽다고 해도 그것이 현실이었고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홍재순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펠로우까지 무려 6년이라는 세월을 같이 했고 큰 문제없이 전임강사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그만큼 신뢰를 얻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온 홍재순이었다. 더구나 자의가 아닌 타의에 가까운 일이었다. 교수들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저도 오늘 들어서 당황스럽습니다만 원장님 말씀대로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홍재순 선생. 남은 2개월 열심히 하고 그 이후에도 자주 와라.”

“예. 과장님.”

커피가 다 식도록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때까지 홍재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송재덕 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가 한둘 보내니? 갈 사람은 가는 거야. 그렇지. 흐음! 그래도 서운하다. 서운해.”

씁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길게 내쉬는 숨에 답답함이 가득했다.

이혁민 교수가 다소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원장님.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준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재순 선생 빈자리를 채워야죠.”

과장이기에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런 대책 없이 시간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빈자리라는 말에 누구보다도 마음이 안 좋을 오상익 교수였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고 펠로우를 뽑는다는 공고를 낸다고 저절로 자리가 차는 것도 아니었다.

“하 원장님께 언질은 드렸고 곧 인사이동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겸사겸사 그때 새로운 선생을 펠로우로 뽑으면 될 것 같아요. 우리 이 과장님하고 송 선생님도 추천할 선생이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홍재순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서운함이 아니라 죄송함이었다.

교수들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듣기 힘든 말만 오갈 것이다.

김지훈이 일이 있는 것처럼 슬며시 일어나자 이경석도 뒤따라 나왔다. 필연적으로 이어져야 하는 일이 있어났을 뿐인데 생각 이상으로 답답하고 아쉬웠다.

“후우!”

한숨 소리만 터졌다.

자천타천 여러 사람이 입에 오르내렸다.

이름만으로도 반가운 사람이 있었고 생소한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어쨌든 새로운 펠로우 선발은 교수들과 인사 위원회 소관이었다.

홍재순만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주일 만에 담낭농증 환자가 웃은 얼굴로 퇴원했다. 거의 열흘은 퇴원을 앞당겼다. 복강경 수술을 한 덕이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걷는 모습을 보며 정말 잘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만 했다.

어느 틈엔가 바쁜 일상이 다시 김지훈을 지배했다.

새로운 환자들이 꾸준히 자리를 채웠다. 석사 논문도 준비할 겸 다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더욱 철저히 수술 준비를 해 나갔다.

심리적으로나마 조금씩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복강경으로 담낭을 제거할 때는 물론 응급 수술을 할 때마다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엠파이에마는 원래 드물다고 해도 담도 담석증은 꽤 있는데 수술을 잡기가 쉽지 않네. 양승철 교수님께 환자 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할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수술에 대한 욕심과 석사 논문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조급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다.

홍재순과 가끔 골뱅이 집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막상 떠난다고 결정이 된 후에야 이런 자리를 갖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경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 교수. 보기 힘들다. 얼굴 펴.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지만 후회하기 보다는 앞으로 잘하면 돼.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그게 더 중요하지 않겠어?”

주인아주머니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왜 이런 말은 자꾸 잊는 것일까?

“그런데 홍재순 선생님 대신 어떤 선생님이 오셔?”

“아직 결정이 안 난 모양이에요.”

“조금 있으면 2월인데 아직도 안 났어? 새로 오는 선생님도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나? 원래 그렇게 늦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에이! 여러 선생님들이 거론되니까 교수님들이 알아서 잘 뽑으시겠죠.”

“그나저나 새로 오는 선생님 나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김 교수보다 아래일 수밖에 없는데 나이가 많으면 그것도 웃긴 일 아니야?”

“나이가 뭐 중요한가요?”

별말 없이 집으로 돌아가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가를 찡그렸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말 선배 중에 한 분이 펠로우로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이거 은근히 복잡하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다.

당면한 걱정거리는 오프 날 늦게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홍재순과 술 한잔 했다는 소리에 고경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김지훈이 곧 집안에 충실해지며 가정의 평화를 무사히 지켜냈다.

2월이다.

신임 펠로우로 누구를 뽑는지 여전히 안갯속이었다. 한 달 후면 신현수가 돌아온다. 한 사람이 오고 한 사람이 그만둔다는 사실이 묘하게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