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인연. (2)
고경희의 들뜬 모습을 몇 번 보는 사이 주말이 왔다.
토요일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자 손일석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분명 부모님은 물론 원주에도 인사를 했을 텐데 빨리도 왔다.
“여어! 김 교수. 이젠 교수 티가 팍팍 난다.”
잘 지냈는지 묻지도 않았다.
마치 어제 본 것처럼 편안하게만 느껴졌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손 대위 왔어? 잘 지냈지.”
“내가 요즘 많이 바쁘다. 어렵게 시간 낸 거야. 연대장이 그렇게 나를 찾네. 일과 끝나도 바둑 두자 테니스 치자 뭐 하자 그냥 온갖 걸 다 같이 하자고 그러는 통에 힘들다. 이놈의 인기는 군대를 가도 식지를 않아요.”
어련할까?
“하오문 일은 잘 되고?”
“그거야 당연하지. 군대 인맥도 좋게 잘 쌓으면 나중에 득이 될지 누가 알아? 의사나 군인이나 어차피 다 자기 일하면서 먹고 사는 거 똑 같잖아.”
김지훈이 입술을 내밀었다.
“예전보다 수준이 좀 높아진 것 같네.”
“어허! 이 사람이. 말 똑바로 합시다. 옛날부터 내가 수준이 상당히 높았는데 그땐 김 교수가 내 말을 이해 못한 거지. 이제야 좀 따라왔네.”
항상 즐겁게 사는 손일석이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홍재순의 일을 꺼냈다. 설마 군대에 있는 놈이 소문을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다. 손일석의 입과 인맥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결정 나기 전까지는 비밀이다.”
깜짝 놀라 눈만 멀뚱거리던 손일석이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평소 성격을 생각할 때 의아한 일이었다. 김지훈만큼 홍재순과 특별한 인연을 쌓은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입 무거운 사람이야. 걱정하지 마셔. 근데 뭐 어떻게 하겠어. 내가 그냥 답이잖아. 군대 가고 싶어 간 거 아닌 것처럼 홍재순 선생님도 똑같은 입장 아니겠어? 너하고 인연이 특별한 건 알지만 웃으면서 보내드려. 조그만 의원 원장도 아니고 전문 병원 병원장이면 대학 병원 의사보다 훨씬 낫다. 막말로 제대로 운영만 하면 돈하고 명예가 그냥 따라올 거 아냐.”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맞다. 아버님도 재야의 고수라고 불리시는데 서운하긴 해도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네.”
여러 사람 덕분에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어려서 홀로 살아야 했던 기억이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을 힘들게 하는지도 몰랐다. 아쉬움은 가슴에 담고 앞날을 축하해 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둠이 내려앉았다.
손일석을 배를 만지며 시계를 보았다.
“오늘도 정확하네. 요새 따박따박 제 시간에 밥을 먹었더니 이젠 시계가 필요 없을 정도야. 저녁은 내가 살게. 나가자.”
“간만에 왔는데 내가 살게.”
“김 교수.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내일 수원 갈비 사.”
“수원 갈비?”
“응. 다음 주에 너 수원가야 되잖아. 당직이다 뭐다 해서 시간 맞추기 어려울 텐데 이번 주에 우리랑 같이 가자. 일주일 빠른 거 정도는 봐 주시지 않겠어?”
순간 가슴이 턱 막혔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아 엉뚱한 말을 했다.
“경희는 어떻게 하고?”
“당연이 같이 가야지. 명색이 하나밖에 없는 친구면 나도 아들이잖아. 그럼 결혼한다고 인사는 드려야지. 사실 수원 갈비도 먹고 싶다. 대위 월급으로는 힘들어. 그놈의 IMF 때문에 딱 기본급만 받는다. 보너스까지 깎더라.”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운 이들의 기일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1월 1일이라는 특별한 날짜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손일석의 마음일 것이다. 농담마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고경아도 손일석이 새삼스럽게 보이는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사기 싫어? 이거 손위 동서면 뭐해? 짬밥은 아무리 맛있어도 짬밥인데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나 바싹 마른 거 안 보여?”
이제야 김지훈이 웃었다.
“알았어. 인마. 내일 같이 가자. 배 터지게 사 줄게.”
손일석이 손짓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허! 큰일이로세. 강호를 아직도 이렇게 살다니 우리 형수가 얼마나 답답할까. 혹시 펠로우 월급이 내 생각을 뛰어 넘는 것은 아니겠지? 처형. 처형의 부군이시자 제 친우인 김지훈이 비싼 수원 갈비를 산다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비싸다는 말에 힘을 잔뜩 주자 고경아가 크게 웃었다.
“그럼요. 당연히 우리가 사야죠. 저희 맞벌이라 이 정도는 괜찮아요. 마음껏 드세요.”
“역시 형수님이십니다. 그럼 오늘 저녁은 회로, 이차는 닭으로 하죠. 갈비까지 하면 육해공 완벽한 조합인데 괜찮으시죠?”
정말 간만에 손일석이라는 친구와 술잔을 부딪쳤다. 고경아와 고경희도 못 먹는 술을 한 잔 해 얼굴이 발개졌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 잔 더 하자는 성화에 맥주를 내놓긴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천하의 김지훈이 이럴 때가 다 있네. 경희한테 말은 들었지만 힘들긴 무지하게 힘든 모양이다. 제길! 그럼 어쩔 수 없지.”
고경아와 고경희가 붙잡혔다.
함께 술을 먹기에는 너무도 한계가 명확한 여인들이다. 혼자 술 마시며 멀쩡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은근히 힘든 일이다. 제사 지내는 사람은 더욱 힘들다.
손일석이 결국 차가운 밤하늘에 뜬 달과 벗했다.
다음 날 1년 만에 그리운 이들을 찾았다.
‘어머니. 아버지. 제 친구 일석이 아시죠? 처제하고 결혼하는데 이 자식이 굳이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네요. 축하해 주세요. 그리고 저 이제 교수라고 불려요.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 아버님. 결혼할 때 오고 이제야 찾아뵈서 죄송해요. 저희 잘 살고 있어요. 지훈 씨 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지만 정말 행복해요. 다음에는. 음! 그 다음일까요? 그때는 셋이 올게요.’
차가운 대리석 사이로 매섭게 불어오던 바람이 뚝 그쳤다. 한 마디 답도 돌아오지 않았고 언제나 밤하늘에서 지켜보던 별도 볼 수 없었지만 따스함이 감도는 것 같았다.
손일석과 고경희도 인사를 했다.
항상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는 날이었는데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갈비 집으로 향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흘러넘치는 침을 주체하지 못했다.
눈을 마주 치고는 허리띠까지 풀었다.
배 속에 거지가 들어앉은 것이 분명했다.
무섭게 갈비가 사라졌다.
손일석은 어쩔 수 없지만 김지훈은 다르다. 고경아가 은근슬쩍 눈치를 주었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추가 주문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계산을 한 후 몰라보게 얇아진 지갑에 고경아가 눈물을 흘렸다. 고경희도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주부로서 어떻게든 수입과 지출을 맞춰야 한다.
“지훈 씨. 다음 달 용돈은 없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에요?”
“누가 보면 한 달 내내 굶기는 줄 알겠어요.”
고경아의 손끝에 깨끗하게 발라먹은 앙상한 갈비대가 걸렸다. 수북한 정도가 아니었다. 하필이면 탁자를 치우던 종업원이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우리가 저렇게 많이 먹었나?’
김지훈도 같이 놀라는 순간 손일석이 스윽 고개를 내밀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채 말이다.
“처형. 무슨 일 있으십니까?”
표정 돌변이다.
“아니에요. 잘 드셨죠? 다음에 휴가 나오실 때 또 드시고 싶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야! 역시 내가 예전부터 알긴 했지만 처형 배포가 웬만한 남자 뺨쳐. 감사합니다. 처형. 그럼 후식은······.”
또 뭘 사달라고?
쪼잔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김지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일석아. 너 몇 시에 출발해? 빨리 가야되지 않아?”
“서울에 올라가자마자 바로 가야 돼. 그래도 커피 한잔 할 시간 정도는 있지. 처형. 어디로 갈까요?”
가긴 어딜 가?
수원에 오면 꼭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친구도 친구지만 결혼식 때 부모님의 자리를 대신했던 고재현의 부모님이다. 손일석과 고경희를 카페에 내려놓고 집으로 가 인사를 드렸다.
마치 친 자식이 온 것처럼 그렇게 즐거워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잘 살아줘서 고맙다며 앞으로도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교수돼서 바쁜 건 알지만 자주 좀 와.”
그렇게 또 한 번 아쉬운 작별을 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행복했다.
처가, 정훈철 가족, 고재현의 부모님 그리고 손일석과의 만남은 따스하기만 했다. 문득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한다고 해도 가슴 속에 항상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재순과도 그럴 것이다.
헤어지면 언젠가는 만나는 것이 세상이다.
어쩌면 보고 싶은 만큼 더 반가울 지도 모른다.
한 해가 지났다.
제야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일상은 달라질 것이 없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또 한 해를 힘차게 달려가야 할 것이다.
새해를 맞이한 은근한 기대와 흥분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홍재순이 김지훈과 이경석을 불렀다. 착잡한 표정으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경석 선생. 김지훈 선생. 나 펠로우 그만 둔다. 이번 주 내에 교수님들께도 말씀드릴 생각이야. 세 달이면 펠로우를 새로 뽑는데도 지장이 없겠지?”
난데없는 소리에 이경석이 몇 번이고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그만 둔다고 하신 거예요?”
자신의 사정을 설명한 홍재순이 그때마다 확실하게 결정됐다는 말을 했다. 이경석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한숨만 내쉬었다.
“다시 생각할 여지는 없는 겁니까?”
“그렇게 됐어. 이경석 선생. 이해해 줘.”
“저도 같은 상황이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계속 우리와 함께 계셨으면 하는 생각이 훨씬 크네요. 정말 많이 믿고 의지했었는데······.”
김지훈보다 인생 경험이 훨씬 많은 이경석이었다. 아쉽고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애써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꾹 다문 입술이 이경석의 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김지훈도 고개를 숙인 채 한숨 소리만 내뱉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이젠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했다고 여겼는데 막상 결정을 내렸다는 말을 듣자 생각보다 훨씬 착잡했다.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홍재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동안 잘못 살지는 않은 모양이다. 고맙고 미안하다. 전공의 때 생각하면 난 정말 후회 없다.”
“후우! 그런 말씀 마세요. 선생님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3개월 남았어. 남은 기간 예전처럼 웃고 살자. 당직 때문에 문제지만 술 한잔 꼭 하자. 나 먼저 퇴근한다.”
홍재순이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탁탁 손뼉을 치며 일어났다. 잠시 자리를 지키던 이경석이 김지훈을 보며 어깨를 두드렸다.
“너도 빨리 퇴근해. 마음이 안 좋은 텐데 푹 쉬고 내일은 웃는 얼굴로 보자. 인연 끊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아무 것도 모르고 하는 말에 내심 미안했다. 하지만 홍재순의 마음도 알 수 있었다.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상황에 따라서는 처신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홍재순과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돌연 가슴을 활짝 폈다.
‘3개월이나 남았는데 벌써 이럴 필요는 없잖아. 선생님들 말씀대로 웃으면서 열심히 일하자.’
자! 다시 집중할 때다.
환자가 없으면 의사의 존재 가치는 없다.
다음 날 일과를 마치고 연구실에 들른 김지훈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해온 수술을 확인하며 나직한 한숨을 터트렸다.
‘석사 논문으로 뭘 써야 하지? 가장 케이스가 많은 라파로 담낭 절제술이 좋긴 한데 이젠 제법 많이 발표가 돼서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네.’
이왕이면 내실 있게 쓰고 싶었다.
흔하고 쓰기 쉽다고 해서 내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생각해 온 주제가 따로 있었다. 문제는 케이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최소한 두 자리 수는 돼야 했다.
“두 가지 질환이라면 수술 건수를 확보할 수 있을까? 한 가지는 스승님도 거의 다 개복하는 경우라서 답답하네.”
욕심이 과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을 넘어 논문으로 발표까지 하고 싶었다. 수술만 제대로 된다면 환자에게도 대단한 득이 될 것이다.
고민이 이어졌다.
환자가 오지 않는 한 하릴없는 고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쌓아온 경험이 있다. 스승은 물론 내과 교수들에게도 일정 정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다.
만일 오지 않는다면 스스로 잡아야 한다.
김지훈이 이혁원, 나종진과 함께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아직까지는 널리 시도되진 않는 수술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증례에 수술 테이프조차 확보할 수 없었지만 머릿속으로라도 정리해 놓아야 했다.
목요일이다.
복강경을 이용한 담낭 절제술 두 건을 시행했다.
무난하게 진행됐고 시간도 조금씩 단축하고 있었다.
시작이 좋아 올해에는 더욱 많은 수술을 할 것이란 희망이 보였다. 어떤 수술이든 능숙하면 능숙할수록 환자에게도 유리할 것이다.
‘오늘 당직인데 어떻게 지나려나.’
오후 일과가 끝나기도 전에 응급실에서 콜이 왔다.
이혁원이었다.
(62세 남자 환자입니다. 담낭염으로 내원했는데 내과에서 바로 연락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목소리에 약간의 흥분이 담겨 있었다.
통상 담낭염은 내과에서 먼저 치료한다.
염증의 원인을 찾고 증상을 호전시킨 후 수술을 의뢰하는 절차를 밟는다. 외과에 바로 의뢰했다는 것은 그만큼 증상이 심하다는 말이었다.
바로 응급실로 내려갔다.
이혁원이 재빨리 달려와 복부 CT를 걸었다.
“쥐비 엠파이에마(GB. Empyema)로 보입니다.”
이혁원의 목소리가 들뜬 이유가 있었다.
김지훈의 표정이 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