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26화 (626/1,329)

10화.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인연. (1)

생각보다 보호자와의 대화가 길었다.

간간히 큰 목소리가 들렸다.

‘에휴! 보호자 입장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처음 수술이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경우에는 의사도 어쩔 수 없지 않나?’

수술 중 홍재순이 추정한 이유는 배변이었다.

어찌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원인이었기에 의사는 생각할 수 있어도 보호자는 동의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한동안 이 문제로 여러 사람 힘들 것이다.

의사도 보호자도 환자도 말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사이 홍재순이 들어왔다.

아직도 이마에 땀자국이 남아 있었다.

수술만큼 힘들고 곤란했던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아무 것도 모른 척하며 밝게 웃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야! 정말 선생님 아니었으면 어떻게 해야 했을지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어. 다 네 덕분이지.”

홍재순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집에 갈 생각도 안하고 방금 전 수술에 대해 이것저것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항문 쪽 수술이 대부분 마이너라서 나도 가끔은 관성적으로 수술을 하는 것 같아. 그러다 이런 환자가 오면 정신이 번쩍 들어. 역시 항상 쉬운 수술은 없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아뻬도 잘못 걸리면 엄청 고생하잖아요. 솔직히 오늘 같은 수술은 피하고 싶어요.”

“수술을 피하고 싶다고? 너도 그런 생각을 다 하는구나. 그런데 지훈아, 넌 어떤 때 보람을 느끼냐?”

“그거야. 당연히 통장에 월급 찍힐 때······.”

진담 반 농담 반을 던지던 김지훈이 입을 열다말고 힐끗 홍재순을 보았다. 어째 목소리가 침울했다. 갑자기 최근에 와 호칭이 달라졌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항상 교수 아니면 선생을 꼭 붙이셨는데 이상하네. 무슨 일 있으신가?’

“썰렁하긴. 난 오늘 같은 날 힘들고 겁나기는 해도 정말 의사가 된 것 같아. 의사된 지 한두 해 된 것도 아닌데 잠도 잘 안 올 때가 있어.”

“사실 저도 그런 때가 있긴 합니다.”

“우리 김지훈이야 당연히 그렇겠지.”

무언지 모를 아쉬움이 보였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으신 건 분명한데. 뭐지? 전에 아버님 몸이 좀 안 좋다고 했는데 더 안 좋아지셨나?’

탁탁 손을 치며 일어서던 홍재순이 난데없는 소리를 했다.

“지훈아. 술 한 잔 하자.”

“술이요? 저 당직이에요.”

“나만 마시면 되잖아. 제수씨한테는 미안하지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골뱅이 먹으러 가자.”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술도 못 마시는 분이 갑자기 웬 술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신 거지? 내가 과민한 건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이모네 포장마차로 향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오늘도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웃고 떠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살짝 눈짓을 하고는 구석에 앉았다.

소주와 골뱅이가 나왔다.

평소 술을 즐기지도 않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홍재순이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안주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점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선생님. 천천히 마시세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지훈아.”

또 이름을 부르고는 말이 없었다.

“지훈아. 나 오늘 수술 멋지게 했지? 너도 최고였고 혁원이도 정말 잘해줬어. 역시 이게 써전의 맛이야. 그치?”

“그럼요. 그렇긴 한데······.”

“널 못 만났으면 지금쯤 무얼 하고 있었을까? 전문의는 어찌저찌 됐겠지만 칼은 잡을 생각도 못했겠지. 오색! 그래. 교과서에 줄만 긋다 말았을 거야.”

옛 이야기가 나왔다.

김지훈이 1년차 때 일이니까 벌써 4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런데 홍재순이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딛고 일어섰을 때의 흥분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즐겁다면 즐거울 추억이다.

아니, 분명 평생 가슴 속에 담을 추억이었다.

그런데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 잔의 술이 또 사라졌다.

홍재순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지훈아. 고맙다. 널 볼 때마다 병원에 끝까지 남아 함께 했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펠로우까지만 해야 될 것 같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김지훈이 너무 놀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뭘 그렇게 놀라? 오상익 선생님께는 이미 말씀드렸어. 아버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셔. 일은 벌려놨는데 수습할 사람이 없네. 대장 항문 전문 병원이지만 개인 병원의 한계를 넘진 못할 거야. 문제 생기면 부탁할 사람이 필요한데 나중에 외면하지 마라.”

안 될 말이었다.

홍재순은 단순히 펠로우 2년차가 아니었다.

표현은 안 했지만 김지훈에게는 언제나 든든한 선배였고 힘들 때면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홍재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선생님. 아니 형. 이건 아니잖아요.”

홍재순이 피식 웃었다.

“너한테 형 소리 들으니까 정말 좋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형이 없으면 저랑 경석이 형은 누굴 믿고 살아요. 아버님 병원인 건 알겠는데 형 없다고 안 굴러가요?”

“안 굴러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쏟아 부었는데 그걸 누구한테 맡기겠어? 내가 나서지 않으면 병원이 문제가 아니라 일 치룰 지도 몰라. 인마.”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술잔을 잡았다가 물만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이경석이라면 뭔가 답을 줄지도 몰랐다.

핸드폰을 꺼내들자 홍재순이 가로막았다.

“경석이한데 전화하려고? 하지 마. 오상익 선생님 말고는 너한테 처음 말하는 거야. 확실하게 정해지면 그때 말씀드릴 생각이야.”

김지훈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아직 확정은 안 된 건가요?”

“아니 확정은 됐지. 여기서 정리할 것도 있고 당장 해결해야 할 병원 일도 있어서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말씀드릴 거야. 어후! 그만 마셔야겠다. 지훈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나 먼저 간다.”

“말하다 말고 어딜 가세요?”

“할 얘기 다 했어. 자식!”

홍재순이 비틀거렸다.

김지훈이 부축을 하려하자 손을 휘휘 저었다.

“나 혼자 갈 수 있어. 인마. 나 예전의 오색이 아니라는 거 너는 잘 알잖아. 고맙다. 네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

눈가가 붉어진 것 같았다.

개인 병원에서 근무한다고 꿈과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훗날 어떤 결과를 얻을지 몰라도 지금은 어둠 속에 싸인 일이었다.

그 때문일 것이다.

김지훈이 한동안 일어나질 못했다.

주인아주머니도 멍한 얼굴로 한숨만 쉬었다.

“조금 있으면 전임 된다고 좋아한 게 엊그젠데 이게 무슨 일이야.”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고경아를 불렀다.

사정을 듣고는 역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김지훈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는 등을 토닥였다.

“지훈씨. 잘 해결될 거예요.”

“김 교수. 세상일은 누구도 몰라. 내일 당장 홍 교수가 웃으면서 없던 일로 하자고 할 수도 있어. 만약 홍 교수가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인연이 끊어지는 건 아니잖아.”

“경아씨. 이모. 정말 그럴까요?”

“그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이 하나 있어. 인연은 끊고 싶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니더라. 미운 놈은 잊을 것 같지? 그럴 것 같아도 평생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미운 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김지훈이 한숨만 내쉬었다.

구미에서 시작된 인연은 어떤 인연일까?

홍재순의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경아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이 현실이듯 주인아주머니의 말도 사실이길 바랐다.

한동안 술 한 잔 기울이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사라졌다.

문득 주인아주머니와의 인연도 보통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모. 고마워요.”

“고맙긴. 어깨 펴. 세상 끝난 것도 아니고 다신 못 본다는 소리도 아닌데 왜 그래? 그 정성을 와이프한테나 쏟으세요. 경아 씨. 안 그래?”

“어머! 어머! 이모, 파이팅! 지훈 씨. 이모 말 들었죠? 홍재순 선생님 일도 잘 해결될 거예요. 이모, 내 말이 맞죠?”

고경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눈에 보였다.

‘그래. 내가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는지도 몰라.’

고경아와 주인아주머니의 미소가 고마웠다.

하루하루 시간은 간다.

홍재순은 그 이후로 특별한 말이 없었다. 도리어 자신의 일에 더 열심이었다. 교수들도 특별한 눈치를 보이지 않았고 별 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김지훈만 애를 태우는 것 같았다.

불쑥불쑥 누군가와 상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아는지 그 때마다 홍재순이 고개를 저었다. 말없이 웃기만 하는 모습에 가슴이 더욱 답답했다.

‘홍재순 선생님이 말을 안 하시는데 내가 먼저 얘기를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혹시 아버님 건강이 다시 좋아지셨나?’

설혹 그렇다고 해도 다시 일선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래저래 홍재순이 병원을 그만 두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다.

어느 새 연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홍재순 때문인지 지금까지 이어진 인연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마침 고경아도 같은 생각인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오프 날 절대 다른 약속 잡으면 안 돼요.”

“당연하지. 누구 말씀인데.”

먼저 처갓집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즐거운 한때를 가졌다. 피 한 방울 안 섞였고 자주 보지도 못 했지만 날이 갈수록 가족이라는 생각이 진해졌다.

“김 서방. 동치미 맛이 어떤지 모르겠네.”

“어머니. 제가 먹어본 동치미 중에 최곱니다. 최고.”

“그래? 다행이네. 경아야. 동치미하고 감자, 쌀 담아 놓은 것 있으니까 가져가. 아참! 된장하고 고추장도 없다고 했지? 김 서방. 입맛에 맞는지 모르겠네.”

가벼운 손으로 갔는데 올 때는 두 손에 짐이 바리바리 들렸다. 여느 때처럼 별 말이 없는 장인어른의 눈빛이 무척이나 따뜻해 보였다.

이제야 느낀 것일까?

정훈철 가족과도 만났다.

언제나 반갑게 웃어주는 모습에 미안함이 앞섰다. 식사가 끝나고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했다. 술기운이랄 것도 없는데 가슴 속을 답답하게만 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이젠 정말 형으로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지훈아. 고민은 되겠지만 나 같아도 그 상황에서는 병원에 남아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서운한 일만은 아니야. 개인 병원 원장도 멋지잖아. 자기 일을 두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것 것도 아니고 말이야.”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이 따라주질 않네요. 솔직히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멀어졌구나?”

“어? 형님. 그 말이 아니잖아요.”

김지훈이 손사래를 치자 정훈철이 크게 웃었다.

“대부분 그렇긴 해. 하지만 각자 인생이 있는 거야. 아쉬운 대로 살아가는 거지. 홍재순 선생님은 마음이 편하겠어? 만일 그만 두게 되면 얼굴 구기지 말고 웃어.”

오래 간만에 만나 심각한 얘기만 나누었다.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순간 승희가 눈에 들어왔다. 가물에 콩 나듯 얼굴을 보았는데 오늘도 삼촌이라고 부르며 달려와 팔짝팔짝 뛰었다.

“승희도 많이 컸네요.”

“그럼. 벌써 10살이야. 우리 승희를 보고 있으면 가끔 네 생각이 난다. 그때 네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아 왔을까?”

한강 둔치에서 우연히 승희를 구한 것은 큰 인연이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까지 이렇게 마주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고 소중한 인연이었다.

승희와 눈이 마주 쳤다.

절로 미소가 가득 걸렸다. 심각한 분위기에 눈치만 보던 승희가 활짝 웃으며 옆에 앉았다. 가슴에도 못 미쳤던 머리가 지금은 어깨를 훌쩍 넘었다.

“삼촌. 나도 커서 삼촌처럼 일반외과 의사 될래요.”

의사가 아니라 일반외과 의사다.

“일반외과?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아?”

“그럼요. 수술하는 의사잖아요. 아픈 사람들 안 아프게 하고 몸 안에 나쁜 거 있으면 없애주는 거 아니에요?”

“야! 잘 아네. 그럼 우리 승희하고 삼촌하고 같이 아픈 사람 고칠 지도 모르겠네.”

“이모도 같이요.”

승희가 좋다고 웃자 한수임이 가자미눈을 만들었다.

“정승희. 그럼 공부를 하세요. 엄마는 100점짜리 시험지 한 번이라도 보는 게 소원이에요. 정승희 씨. 아시겠어요?”

“여보. 건강하면 됐지 왜 자꾸 공부하라고 그래. 우리 승희가 얼마나 똑똑한데. 크면 다 알아서 할 거야.”

승희가 정훈철의 가슴이 폭 안겼다.

“아휴! 내가 못 살아. 경아야. 넌 나중에 애 공부해야 할 때 아빠는 근처에도 못 오게 해. 지금 세상이 얼마나 힘든데 맨날 놀자고 만 한다.”

“형부가 바빠서 자주 못 보시니까 그렇죠.”

고경아가 말을 하다말고 휙 김지훈을 보았다. 애 낳고도 지금처럼 살면 죽을 줄 알라는 눈빛이었다. 김지훈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행복한 시간은 참 빨리도 간다.

아쉬운 작별을 했다. 승희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었다. 한수임은 애한테 너무 큰돈이라고 난리를 치고 승희는 재빨리 정훈철 뒤에 숨었다.

“승희야.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리고 나중에 꼭 삼촌이랑 같이 일 하자. 까맣게 만들어 줄게.”

기분이 한결 좋아져 알아듣지도 못할 농담까지 했다. 승희가 좋다며 크게 대답을 했다. 돌아오는 내내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고경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형부. 언니. 이번 주말에 오빠 온대요.”

난데없이 이건 또 무슨 소릴까?

“일석이가? 휴가래?”

“3박 4일짜리 특별 휴가 받았는데 시간이 남는다고 형부 얼굴 보고 싶데요.”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고경희와 데이트 할 시간도 부족할 것이다.

가슴이 먹먹하면서도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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