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때론 주변이 삶을 좌우하기도 한다. Ⅱ (1)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김 교수.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요?”
“하성원 교수님이 중앙 의료원 원장님이 되셨다. 과장님도 은근히 신경 쓰이실 텐데 별다른 말씀 없으셨어?”
“특별한 말씀 없으셨는데 왜요?”
“환자 말고 병원 일에도 관심 좀 가져. 하 교수님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벌써부터 내년 인사이동에 자기 사람들 심는다는 소리가 돌고 있어.”
“인사 위원회가 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그리고 설마 파벌 그런 걸 만드시겠어요?”
김진호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바라는 사람도 있어요. 아닌 말로 경쟁자 제치고 과장 자리 빨리 딸 수 있으면 줄 안서겠어? 없던 줄도 만들 판이야. 병원도 사회하고 똑같다. 의사는 뭐 사람 아니냐?”
듣는 것만으로도 금경태가 생각나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제 펠로우 1년차다.
“선생님 말씀이 맞는다면 씁쓸한 일이지만 아직 전임도 안 됐는데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알고는 있어. 그래야 나중에 고민하지 않고 김 교수가 하고 싶은 수술 마음껏 하지.”
전임을 생각하니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선생님. 그런데 언제 조 교수 되세요?”
“이제 석사 땄는데 아직 멀었지.”
“어? 이제 따셨어요?”
“어이구! 우리 2년 밖에 차이 안 난다.”
“그런가요? 난 선생님이 교수되신지 되게 오래 된 것 같아요. 인턴 때부터 봐서 그렇겠죠? 아니 음성 때문인가?”
은연중 드러난 마음에 김진호가 피식 웃었다.
‘나도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나중에 술 한 잔 하자.”
“예. 선생님. 소주에 골뱅이 좋습니다.”
그 때 나종진이 혈관 수술할 환자를 옮기고 있었다.
꾸벅 인사를 한 김지훈이 후다닥 달려갔다.
‘인사는 정말 열심히 해.’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며칠 후 하성원 교수의 원장 취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제는 전임 원장인 된 허경발 원장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축하해마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도 병원 분위기는 은근히 어수선했다.
김지훈에겐 역시 다른 나라 일이었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전진 하는 데만 집중했다.
이경석이나 홍재순도 다르지 않았다.
‘누가 홍재순 선생님 별명이 오색이었다는 걸 기억할까? 정말 열심히 하시네. 경석이 형은 대장암 수술을 연이어 했단 말이지. 집에도 충실하고. 나도 그건 꼭 배워야 돼.’
선택과 집중만이 살 길이었다.
은근히 눈꼬리를 치켜떴던 고경아가 예전의 얼굴로 조금씩 돌아왔다. 이래도 행복하고 저래도 행복했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였다.
카르페 디엠!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는 사이 한 텀이 또 지났다.
전공의들에게는 한 년차의 마지막 텀이고 김지훈에게는 펠로우 1년차가 거의 끝나간다는 의미였다. 이제는 매일매일 출퇴근을 하지만 텀이 바뀌는 것을 보고서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실감했다.
‘3개월만 지나면 현수도 오고 또 많은 것이 변하겠네.’
홍재순은 펠로우가 아니라 전임 강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와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살고 있었다. 불현듯 만감이 교차했다. 부럽기도 하고 오색이라 불렸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기쁘면서도 놀랍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연말이 다가오며 점점 추워졌다.
12월 막바지의 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했다.
‘일석이는 잘 지내나? 원주에는 가끔 들리는 것 같던데 경희하고 데이트할 때 연락 좀 하지. 군의관도 공수부대는 바쁜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공수부대로 배치가 떨어지는 날 울고 불며 난리를 쳤던 고경희가 생각났다. 한줄기 바람이 불며 추위가 오싹하게 다가왔다. 남들 다 가는 군대에 상대적으로 편한 군의관이지만 무사히 지내기를 바랐다.
‘훈철이 형도 본다본다 하면서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
생각난 김에 전화를 했다.
언제나 반가워하는 정훈철과 한수임의 목소리에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곱은 손으로 손일석에게 전화를 했지만 통화가 되질 않았다.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떠오른 탓인지 마치 연애할 때처럼 고경아가 보고 싶었다. 퇴근하는 길에 군고구마를 사들고 들어갔다.
고소한 냄새에 장모님 표 동치미를 앞에 두자 침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고경아와 함께 한 입 물고 오물거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오늘 당직인데 조용했으면 좋겠다.’
목이 메 동치미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하마터면 사래가 들릴 뻔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직이라는 생각조차 떠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었다.
- 이혁원입니다. 56세 남자 환자가 항문 출혈로 내원했습니다. 개인 병원에서 어제 저녁 치질 수술을 받았습니다. -
간간히 보는 합병증이었다.
재수술을 요하는 경우도 많지만 보존 치료로 좋아지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아마도 개인 병원에서 지켜보기에는 불안해 보냈을 것이다.
“심해?”
- 예. 헤모글로빈과 혈색소 수치가 9.0에 29입니다. 항문 수지 검사를 할 때도 상당한 량의 출혈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수치가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애매모호했다.
수술 중 출혈로 인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응급으로 수술해야 할 정도야?”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이혁원을 신뢰하기에 판단을 구하는 것이었다.
-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고경아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일 귀신이 붙었나봐. 들어오자마자 또 나가는 게 말이 돼요? 이건 누가 다 먹고.”
“그래도 오프 때는 일찍 오잖아. 경희도 곧 들어올 텐데 잘 됐지. 뭐. 갔다 올게요.”
입이 툭 튀어나온 고경아가 두툼한 코트를 입혀 주며 배웅을 했다. 은근히 행복한 순간이다. 입가에 잔뜩 미소를 건 김지훈이 병원으로 향하며 생각에 잠겼다.
‘실이 끊어진 걸까 아니면 혈관이라도 하나 빠진 걸까? 이쪽은 경험이 거의 없는데 홍재순 선생님을 부르지 않아도 될까?’
이 고민 저 고민하며 병원에 도착했다.
“혁원아. 혹시 수술한 병원 선생님은 안 오셨어?”
“보호자가 의뢰서만 들고 왔습니다.”
다소 의아한 일이었다.
사소한 합병증도 아니고 재수술을 요하는 출혈이다. 잘잘못을 떠나 환자나 보호자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또한 수술 후 합병증은 집도의의 소견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아쉬움이 컸다.
‘설명은 충분히 하고 보냈겠지?’
의뢰서부터 확인했다.
- Hemorrhoidectomy(치질 제거술). -
밴드로 묶거나 경화제 사용 등 다양한 치질 수술 방법이 도입되고 있는 추세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치질을 모두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수술도 많이 시행되고 있었다. 또한 그런 수술이 반드시 필요한 환자가 있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치질은 혹이 아니라 혈관 덩어리라는 것이다. 즉 다양한 이유로 압력이 높아진 항문 정맥이 확장되며 일종의 혹처럼 보이는 것이다.
제거 도중 혈관을 놓치거나 혹은 수술 후 약해진 혈관이 터지면 가장 큰 합병증인 출혈이 야기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혈관 압력이 높아 그 양이 적지 않을 수 있었다.
‘에휴! 느낌이 좋지 않네.’
환자의 안색이 의외로 창백했다.
통증도 무시 못 할 정도였지만 특히 변이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을 호소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환자 분. 일반외과 김지훈입니다. 불편하시겠지만 항문 검사 좀 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항문에 손을 넣었다.
치질 제거 후 봉합한 실이 만져졌다.
모두 세 곳이었다.
흔히 항문 전체에 치질이 뛰쳐나온 모양을 빗대 말하는 해바라기였던 모양이었다. 치질 수술 중 가장 칼을 많이 대야 하는 경우였다.
검사 직후 손가락을 빼자 선지처럼 굳은 핏덩이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손가락에 묻은 피는 선홍빛이었다. 김지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액티브 브리딩(Active Bleeding)이 분명했다.
항문 수술은 뭘 해도 시야가 좋지 않다. 더구나 수술 직후인데다 출혈까지 발생해 부종이 심할 것이 뻔했다. 섣불리 덤볐다가는 자칫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수술 과정을 예상해 보았다.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쭈뼛 섰다.
‘이건 아니다. 정말 욕심이야.’
경험이 풍부한 의사가 절실한 환자였다.
그래서 대학 병원이 있는 것이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자 이미 잔뜩 굳어있던 보호자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거 의사가 잘못한 거죠? 도대체 수술을 어떻게 했길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치질 수술 하나 했다가 사람 잡겠네. 뭔가 잘못한 건 아닙니까? 같은 의사라고 숨기지 마시고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의료 과실이 분명하죠?”
화가 많이 날 것이다. 험한 말도 당연히 나올 수 있다. 내심 이해는 하면서도 과실부터 운운하는 보호자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런 상황인데 집도한 선생님은 왜 얼굴도 안 비치지?’
“일단 수술을 해서 출혈부터 잡아야 합니다. 항문 쪽을 전문적으로 하시는 선생님이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누가 나온다고요?”
“전 간 쪽이 전문입니다. 환자 분을 위해서는 해당 전문의가 수술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럼 빨리 좀 불러 주세요.”
툭 내던지는 보호자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치료가 지연되면 난리라도 칠 것 같았다. 환자를 위해서라도 시간 끌어서 좋을 일이 없었다.
즉시 홍재순에게 연락했다.
- 알았어. 일단 수혈부터 하고 수술 바로 하자. -
오프인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바로 콜을 받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지훈의 판단이기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이 택한 분야의 환자다. 단 한 번의 경험이라도 더 쌓아야 원하는 수준에 보다 빨리 도달할 것이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환자도 안 봤는데 수혈부터 하라고 하시네. 치질 수술도 쉽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보호자 태도가 보통이 아닌데 수술한 의사는 어떻게 하냐. 혁원아. 빨리 진행하자.”
아무리 뛰어난 의사도 경험이 없으면 초보에 불과하다. 특히 분야가 확연히 다르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항문 쪽 수술은 거의 보지 못한 김지훈이 딱 그 짝이었다.
이혁원도 상당히 당황하는 눈치였다.
수혈이 시작됐다.
환자는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보호자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졌다.
똑똑 떨어지는 피를 보며 홍재순을 기다리던 김지훈이 돌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웃음까지 나올 뻔했다.
‘만일 홍재순 선생님이 못 나오신다고 했으면 대책 없을 뻔했어.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나오신다고 하니까 마음이 놓이네. 병원 분위기는 아직도 은근히 어수선한데 우리 과 분위기는 정말 최고다. 환자 등한히 할까 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사람이 어떻게 하나도 없을까?’
딱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강병옥과 송진우 간의 신경전을 빼면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재순이 도착했다.
김지훈이 슬며시 보호자에 대해 귀띔을 했다.
“환자 분. 홍재순입니다. 항문 검사를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이 부분이 아프신가요? 아니면 여긴 어떠세요.”
“아아아! 다 아파요. 그만.”
손가락을 뺀 홍재순이 심각한 표정으로 보호자를 찾았다. 출혈 양상이 심상치 않다며 수차례 경고를 했다. 보호자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일단 수술부터 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수술 방으로 향했다.
“김지훈 선생. 정말 만만치 않을 것 같아. 일단 오상익 선생님께도 연락은 드리는 게 좋겠어.”
홍재순의 얼굴이 유난히도 어두웠다.
다소 마음을 놓고 있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 정도에요?”
“정맥 출혈이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어.”
모든 수술이 그렇지만 치질 수술도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어렵다. 특히 수술 후 출혈이 발생한 경우는 더더욱 어려울 수 있었다. 하물며 정맥 출혈도 잡기 어려운데 동맥이 원인이라면 아무리 가늘다고 해도 결코 쉽게 않을 것이다.
막 수술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치질 수술을 한 의사였다. 얼핏 보아도 오십 세는 돼보였다. 상당히 경험 많은 의사일 텐데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보호자들과 얘기 좀 하느라 늦었습니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길게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치질이 심했을 뿐 수술 중 특별한 문제도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상익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으니까 잘 해결될 겁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확 치솟았다.